일제시대의 황폐했던 한국문단에 혜성처럼 출현하여 한국 현대시사에 독특한 자리 매김을 한 박용철 시인의 시선집이 일어로 처음 출판되었다.
한일 국교 정상화가 이루어지고 40년 이래, 수치스러운 과거의 역사가 우리국민들의 한으로 맺혀 밑바닥에 깔린 채 한일 관계는 유지되어 왔었다. 얼마 전부터는 한류열풍도 합세되면서 우호의 열기가 풍선처럼 부풀어 가더니 독도 문제를 계기로 한 순간에 터져 버렸다. 한국과 중국의 반일 운동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일본 매스미디어에도 우익 세력마저 기웃대며 찬 기운이 맴돈다. 한국과 일본의 불행한 역사의 굴레를 발목에 걸고 살아가야 하는 재일교포의 생활 속에까지 그 기운은 또 다시 불길한 문바람처럼 스며들고 있다. 재일교포의 입장에 서면 한일관계의 변화무쌍한 뉴스가 늘 불안하게 신경을 건드리고 살얼음판 위를 걸어가고 있는 듯 하다.
이러한 특수한 환경 속에서 출판된 일본어 시집이 설사 박용철 시집이라고 한들 대단한 주목을 받을 리 만무하다. 더욱이 시집이 진열되는 코너는, ‘욘사마’ 관련 대중 잡지가 책가게 입구에 진열되어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가고 있는 데 비해, 일반 독자에게서 이미 외면되어 구석으로 몰려나가고 있는 실정이다. 그래서 소위 유명브랜드로 자리 잡은 시집 전문 출판사에서 시집을 출판하지 않으면 책방에 진열도 한 번 해보지 못한 채 동료 시인들의 자택에 배달되고 그것으로 막을 내리는 것이다.
늘 그래왔지만 번역이 필자의 몫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에도 박용철 시인의 번역이 의뢰되어 왔었던 것은 필자가 한국어와 일본어로 시를 쓰고 있고 한국 시단과 일본 시단 양쪽에 몸을 담고 있기 때문인지 모른다. 박용철 기념사업회에서 의뢰되었던 번역 조건은 박용철의 시를 원문에 충실하기 보다는 일본어로서 더 자연스러운 번역시로 만들어 달라는 요청이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한국어 시 원문에 충실하지 않을 수 없었고 번역을 해 나가며, 34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한 박용철 시인이 의도했던 그의 작품세계에 접근하여 그의 영혼을 찾아 그 시대의 상황을 읽어보려고 노력했다. 아무튼 박용철 시선집이 박용철 탄생 100주년이 되는 작년 말에 출간되었고 올해부터 동경을 중심으로 대형서점에 배포되었다. 그리고 필자의 몫으로 할애된 100권을 일본의 대형 도서관과 일부 대학 도서관, 그리고 일본의 몇몇 시인들에게 배부한 결과 50여 통의 편지를 받았다. 이런 시기에 보내온 시단의 중요 시인들의 편지 혹은 원고여서 더욱이 소중하게 느껴지고 그들의 글을 상세히 보고도 하고 싶지만 지면이 한정되어 여기에 그 번역문을 게재할 수 없는 게 유감스럽다.
박용철 일본어 시선집은 또 출판을 기념하여, 정지용 일본어 시선집 출판 때와 같이, 그 보다 훨씬 더 큰 규모가 될 시 축제(詩 祝祭)에서 소개된다. 올 11월 18~20일에 열릴 ‘지구(地球) 시제(詩祭)’에서 박용철 시인의 시가 시낭송을 통해 청중들 앞에 선보이게 됨으로써 일본시단 뿐만 아니라 세계에 소개되는 좋은 기회를 얻게 되었다. ‘아시아 환태평양 시인 회의’라는 타이틀을 걸고 세계 17개국에 참가를 요청하게 될 이번 시제는 『지구』 창간 55주년을 기념하는 행사이기도 하다. 이어 21일에는 한국문화원에서 음악과 시낭송을 곁들인 심포지엄이 개최된다. 문예진흥원의 지원을 받아 진행될 이번 행사의 참가자와 그 상세한 내용은 아직 미정이긴 하지만 가능하면 많은 시인들과 학자들이 참석해 줄 것을 ‘지구 시제’의 주최자를 대변해 이 지면을 통해 요청하는 바이다. 동인잡지 『지구』의 대표시인 아키야 유타카(秋谷 豊)는 일본 사회의 차디찬 시선을 아랑곳 않고 일찍부터 일본의 중요한 시인들과 함께 한국을 방문해왔다. 삼십여 년 전 그 시기는 일본에서건 한국에서건, 시인들의 관계마저도 원만치 않았음이 분명한데, 이미 고인이 된 정한모, 조병화, 구상 시인들과의 교류를 솔선해나갔으니 이제야 한창 붐을 일으키고 있는 한일 문인교류의 물꼬를 튼 셈이 된다. 시집이 발간되고 거의 일년이 지난 다음 벌어질 이번 행사가 좀 늦은 감이 없는 것은 아니며 이 점을 필자도 내내 우려하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여러 사정이 여의치 않아 어쩔 수 없이 빚어진 결과이다. 그러나 한국의 시가, 또 박용철 시선집이 일본시사에 자리매김을 해 나갈 긴 안목에서 볼 때 시기적인 문제는 참가해 주실 여러분이 넓은 아량으로 수용해 줄 것으로 생각된다.
비록 한일간의 충돌뿐만 아니라 지구촌 여기저기에서 일어나고 있는 분쟁과 갈등은 우리 모두를 불안에 떨게 만든다. 순식간에 터지고 마는 전쟁의 위험을 막기 위해 교류와 화해의 장은 쉴 새 없이 만들어 지고 있다. 그러한 교류를 실현시켜 나가기 위해서는 서로간의 끊임없는 인내와 노력과 긴 시간이 소요된다. 잘은 모르긴 해도 가장 순수한 문학예술을 지향하는 일본 시단의 누구도 일본 제국주의의 재 출동을 원하지 않으리라고 믿으며, 이런 시국이기에 더더욱 시를 통해 밀도 깊은 교류를 진행시켜 한일 시인들 상호 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봐야 하는 것은 아닐까.
※ 『朴龍喆 詩選』은 재단의 해외 한국문학 연구지원을 받아 작년 말 일본 가신샤(花神社)에서 출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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