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소설가 이인성의 처녀작이자 대표작인 『낯선 시간 속으로』의 프랑스어판 『Saisons d’exil 유배의 계절들』이 83년 역사의 프랑스 유력 문학비평지 『유럽 L’Europe』에서 주목을 받았다. 캉대학 불문학 교수를 역임했으며 앙드레 지드, 알랭 로브-그리예, 조르주 페렉 등 20세기 작가들에 대한 여러 비평서를 펴낸 바 있는 알랭 굴레(Alain Goulet)가 쓴 이 기사의 전문을 번역해 수록한다.『Saison d’exil』은 최애영(번역가)과 장 벨맹-노엘(Jean Bellemin-No
ël, 파리8대학 명예교수)의 공역으로 재단의 한국문학 번역지원을 받아 작년에 아르마탕(L’Harmattan)에서 출간되었다. 기사의 번역은 전승화(서울대 불문과 강사) 씨가 맡아 수고했다.
이즈음의 한국 선풍은, 아름다운 영화들(예를 들어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뿐만 아니라, 잘 소개하고 싶은 중요한 소설들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 황석영의 『손님』에 이어, 최근엔 그 뛰어난 번역(가치 있는 주석들도 풍부한)이 각별하게 주목받을 만한 소설이 새로 나왔는데, 한국에서는 이미 정평을 얻고 있은 한 작가의 첫 작품으로, 이인성의 『낯선 시간 속으로』가 바로 그것이다. 1983년에 처음 출간되었던 이 소설은, 주인공-서술자가 점차 현실감을 잃어가다가 급기야는 자아 정체성마저 상실하게 되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프랑스 독자들에겐 각각 아주 독특한 혁신적 문체로 유사한 증후들을 불러일으켰던 『구토』 『이방인』 『질투』와 같은 소설들을 떠올리게 한다.
『유배의 계절들』, 그것은 아버지의 죽음으로 - 카뮈의 『이방인』이 메르소 어머니의 죽음으로 시작하는 것과 흡사하게 - 군대를 조기 제대해서 집으로 돌아가는 한 젊은이가 자기 자신, 자신의 인생, 자기의 주변으로부터 유배되는 계절들을 가리킨다. 소설은 그 어떤 것에도 명확한 답을 내릴 수 없는, “그때, 그가 돌아오려 했던 곳은 어디인가? 여기인가? 그렇다면, 여기서, 그가 여전히 돌아가려 했던 곳은 어디인가?”라는 일련의 질문들로 시작하고 있다. 이때 ‘귀향’은 익숙한 정취를 되찾고 개인사를 풀어내어 하나의 정체성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감각, 여러 생각, 또 각종 추억의 굴레가 얽혀 있는, 어떤 풍경의 내용물들이 연속적으로 흘러가는 것에 불과하다. 여기 동반된 추억들은 결코, 한 사람이 자신이 원하는 바와 삶의 흐름 가운데서 자신의 현 위치를 깨닫고 나서 자기 인생과 터전을 되찾는 여정을 구성하지 못한다. 그 모든 것들은 오히려, ‘반(反)영웅’의 투영이라고 밖에 볼 수 없는 주인공의 정신적 혼란을 보여줄 뿐이며, 그래서 이 소설은 “그는 더듬이를 잃은 벌레처럼 제자리를 한 바퀴 맴돌았다. 빌어먹을, 어쩐다? 어디로 가야지?”라는 구절이 보여주듯이, 자신의 삶과 정체성이 난파당한 자의 표류를 쫓고 있다.
지속적인 ‘무력감’과 더불어 질문들은 증식한다. 아타락시아를 욕망하는 남자는 자기 자신을 자신에게 “너는 개다, 너는 개다, 너는 이미 개처럼 살기 시작했다, 우리가 너를 개처럼 살게 할 것이다, 우리가 너를 개처럼 죽게 할 것이다……”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발신자로 여긴다. 그가 풍경 속으로 녹아 들어가고자 시도함으로써 그의 감각들과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추억들의 굴레들이 번갈아 이어진다. 그런데도 “그것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없음’의 ‘있음’에 빠져들 수밖에 없는 상태를, 그는 헤매고 있었다”는 말처럼 아무 것도 구성되지 않고 아무 것도 그 남자에게 평온을 주지 못한다. 바로 그 순간에 남자는 “그의 ‘나’와 ‘너’, 언젠가는 만나 하나가 되어야 할 그의 떨어진 두 몸”처럼 자신이 둘로 쪼개진 듯한 느낌에 사로잡힌다.
그러나 실제로 하나가 되는 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해체되어 가는 듯 보이는 한 자아의 분열과 영향력의 확대가 소설이 진행됨에 따라 오히려 강화되고 심화되기 때문이다. 첫 번째 계절인 봄이 어머니 곁으로 귀향함으로써 끝을 맺고 두 번째 계절인 여름이 시작된다.
이 여름은 “그 세월의 무덤”과도 같은 계절로서, 이 계절에 제1부에서의 ‘그’였던 내가 거울 앞에서 내면의 대화를 연속적으로 나누며, “난, 뭐랄까, 난 내가 아니야……”라는 식으로 그가 막 끝낸 희곡에서 중점을 두고 있는 자아에 관한 질문들을 증식시키는 ‘나-그’로 나눠진다. ‘나’는 ‘그’에게 말을 건 다음 자기 할아버지한테 말을 걸고, 마지막에는 그가 찾아간 무덤에서 “결국 저 때문에 죽으신 거예요, 아버진. 제 대신에”라고 자기 아버지한테 말을 건다.
| ▲ 이인성과 불역판 <낯선 시간 속으로> © 운영자 | |
한 마디로 분열이라고 할 수 있는 두 번째 계절이 지나고, 「지금 그가 내 앞에서」라는 제목이 붙은 세 번째 계절이 시작된다. ‘그’와 ‘나’가 ‘텅 빈 무대’ 앞에서 사라진다. 그 무대는 ‘그’가 쓴 희곡을 상연하기로 예정되어 있는 곳일 수도 있고, 또 “나, 자신? 내가 나이기 이전에, 나는 그였다. [……] 지나가버린 나인 그가 나를 나이게 한 때가 언제였을까? [……] 지금 여기에 없는 그는 텅 빈 시간, 텅 빈 공간이다. 텅 빈 시공? [……] 그의 ‘없음으로-있음’이 실은 ‘비어-있음’으로 있는 것이라는 느낌이 든다”에서 밝히고 있듯이 그의 ‘없음으로-있음’을 의미하는 장소일 수도 있다.
네 번째 계절이 우리를 ‘유배의 끝’으로 이끈다. ‘나’는 무작정 기차를 타고 동쪽 끝의 바다까지 표류한다. 바다, 죽음의 갈망과 더불어 살인에 대한 강박으로 그가 뛰어들고 싶어 하는 곳. 이 계절에 일어나는 일은 전부 미구시(市)라는 상상의 공간에서 일어난다. 부분적으로 되풀이되거나 반향을 일으키는, 일관되지 못한 것으로 일관하는 장면들을 연속적으로 이어가면서 말이다. “하나의 면 속에 자욱한, 헤아릴 수 없는 미궁을 숨긴 깊이다”에서 드러나고 있는, 윤곽을 잡으려고 종이 위를 달리는 신비로운 한 자루의 ‘볼펜’과, 이야기의 격자 구조. 우리가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것처럼 느껴지는 그때, 소설은 “지나간 매순간이었으며 다가올 매순간”만을 의미하는 그 ‘순간’의 미분화(未分化) 상태에서 끝을 맺는다.
이렇게 ‘세계-내-존재’의 비극은 종결된다. 우리 눈앞에서, 비극적 순환을 뒤쫓는 데 적절해 보이는 듯한 사계절 동안, 계절의 변화처럼 시간의 매듭이 묶인 게 전혀 없는 것도 아니고 풀린 게 실제로 없는 것도 아닌 듯이 그렇게 공연된 비극. 때로 로브-그리예의 『고무』를 생각나게 하는 글쓰기 방식을 통해 이인성은 지드의 열병(熱病)의 계보를 잇고, 누구도 빠져나올 수 없는 수렁의 형상화를 통해 사르트르의 『구토(嘔吐)』의 계보를 잇고 있는데, 세계 내의 이방인을 그린다는 점에서 카뮈적이기도 하며, 도박의 끝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베케트적이기도 하다. 그것은 자아의 안과 밖의 좌표, 현실 감각과 가치가 상실된 세계, 돌이킬 수 없이 해체된 세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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