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문학사에서의 위치에 비해 한국에는 대중적으로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작가 테오도어 슈토름(Theodor Storm, 1817~1888)은 북독일의 후줌에서 태어나 괴테의 시와 쉴러의 드라마를 애독하며 일찍이 문학청년의 길로 접어들었다. 변호사였던 아버지의 뜻을 따라 법학을 공부하고 법관으로서의 길을 가면서 그는 아달베르트 슈티프터, 고트프리트 켈러, 테오도어 폰타네 등이 속한 독일의 ‘시적 사실주의’를 대표하는 작가로 자리매김했으며 초기의 감미로운 서정시와 노벨레(독일 문학사에서 노벨레의 개념은 비란트[Wieland]의 『돈 실비오와 로살바 Don Sylvio und Rosalva』[1764] 이후 처음 연구자들의 입에 회자되었다. 노벨레는 아직도 정립되지 않은 개념이지만 ‘새로운 사실에 초점을 맞추어 쓴 길지 않은 산문’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임멘호수 Immensee」 등을 통해 생전에 상당한 대중적 인기를 얻기도 했다. 그러나 그를 독일 문학사의 거장으로 남게 한 작품은 무엇보다 그의 마지막 작품이며 가장 완성도 높은 작품으로 평가되는 노벨레 「백마의 기사 Der Schimmelreiter」일 것이다.
1886년, 늑막염에 걸린 슈토름은 조용한 여름 한 철을 보내고 「백마의 기사」의 집필을 위한 준비 단계에 있었다. 늑골 사이에 샌드페이퍼를 끼워 넣은 듯 흉곽에서 부시럭거리는 소리, 식도가 좁아지고 열이 오르는 증상이 점점 심해졌으며 작품 시작은 더디기만 했다. 그해 가을 아들의 부고를 접하고 병석에 누웠다가 어렵게 평온을 되찾은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위암판정이었다.
세상에 가치 있는 일이란 있을까? 삶, 문학? 북해의 잿빛 도시, 후줌 시내를 배회하는 그의 엄숙한 고요 뒤에서 하루하루 무기력한 우울증이 깊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 슈토름이 평소 아끼던 처남 아에밀이 근방에서 소문난 의사 두 명을 데리고 그를 찾아와 위암 판정이 오진이었다는 선의의 거짓말을 한다. 활력을 되찾은 슈토름의 칠순을 기념하는 파티가 곳곳에서 열리고 그에게는 다시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러나 그는 머물기로, 그리고 노벨레 「백마의 기사」의 소재를 “현실에 기초한”, “품격 있는 노벨레”로 승격시킬 준비를 하기로 마음을 먹는다.
「백마의 기사」의 토대가 된 ‘유령기사’ 이야기의 모체는 1838년 4월 『단치히 증기선 Danziger Dampfboot』에 실렸던 ‘벚나무골 원귀(寃鬼)’의 전설이다. 지명과 고유명사를 빼면 「백마의 기사」의 서두와 거의 흡사한 이 전설을 슈토름은 지금은 유실되고 남아있지 않은 19세기의 대중문예지 『라이프치히 문집』과 『파페의 함부르크 이야기 선집』에서 읽고 무대를 바익셀에서 북독일의 저지대로 옮겼다고 한다.
세 겹의 액자 형식(슈토름의 노벨레 대부분이 액자 형식)으로 구성된 노벨레 「백마의 기사」의 중심이야기는 평범한 개펄농가의 아들로 태어난 주인공 하우케 하이엔이 천부적인 수학적 재능과 부지런함을 발판으로 북해 개펄마을의 제방감독관이 되어 마을사람들로 상징되는 미신, 구습과 싸우며 우여곡절 끝에 새 제방을 건설하지만, 후에 구제방이 붕괴되는 사고로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다는 내용이다.
만년의 테오도어 슈토름과 「백마의 기사」의 배경이 된 저지대 마을
편부 슬하에서 자라는 하우케의 정신적 성장에 전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그의 아버지는 측량과 계산에 재능이 뛰어난, 마을에서 가장 현명한 인물이며 미신과 구습에 연연하는 마을 사람들과는 달리 이성적 판단에 의지해 세계를 해석하는 데 익숙한 사람이다. 아버지인 테데 하이엔은 지식인도 농부도 아닌, 평생 죽도 밥도 아니게 살아 온 자신의 인생을 거울삼아 아들을 ‘유클리드 Euklid’로 상징되는 지적인 작업으로부터 떼어놓으려고 일부러 제방공사장에 보내는 등 애를 써보지만 아들의 집념 앞에서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결국 아들을 후원하는 처지까지 된다. 기술의 절대성과 계몽시대 특유의 미래적 전망에 대한 확고한 믿음에 사로잡힌 채, 일방적인 남성적 영향 속에서 성장하는 하우케의 ‘에고이스트로’서의 윤곽과 공동체에 이익을 줄 수 있는 천부적인 재능을 지녔지만 사회적으로는 불구나 다름없는 그의 ‘딜레마’는 슈토름 연구의 대가 빈프리트 프로인트가 본 이 작품의 중심구도이기도 하다. 하우케의 아버지와 전 제방감독관의 죽음, 엘케와의 결혼, 그리고 숙원이던 제방감독관 자리에 부임하는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고립된 하우케의 삶에 잠시 공동체와의 화해를 모색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는 듯 하다. 그러나 제방감독관의 집에서 같이 일했던 하인이며 오랜 적수였던 올레 페터스가 하우케를 비방하는 말들을 마을에 퍼뜨리자 그는 그 누구를 위해서도 아닌, ‘내가 제방감독관에 앉을 만한 사람’임을 보여주기 위한 과시욕에서 새로운 제방건설 계획을 시작한다. 제방은 ‘지적, 육체적 노동이며 개인과 공동체라는 연대작업의 산물’이다. 그런 면에서, 건설계획부터 축조과정까지 하우케의 개인적 집념 하에 비민주적인 과정을 거쳐 축조된 ‘하우케-하이엔 제방’이 결국 구제방을 붕괴시키고 하우케와 그의 가족을 파국으로 몰아간다는 「백마의 기사」의 줄거리는 마땅히 조화를 이루어야 했을 요소들 사이의 균열이 부른 비극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슈토름은 마지막 장면에 황금빛 햇살을 받으며 건재하고 있는 하우케-하이엔 제방을 묘사함으로써 자연의 위협을 저지하는 효과적인 대응책으로서의 제방, 진보하는 미래에 대한 긍정적 믿음을 암시하고 있다.
「백마의 기사」를 비롯, 고향인 북독일을 배경으로 한 작품들의 강한 인상으로 인해 슈토름의 작품세계는 곧잘 ‘독일적 안온함’이나 ‘고향의 시’로 평가되곤 했다. 1차 대전을 전후하여 더욱 편협해지던 슈토름에 대한 이러한 선입견은 1920년대의 향토예술운동과 더불어 ‘전형적인 독일의 향토예술가’, ‘북독일의 타고난 정서’라는 꼬리표를 매달고 더욱 확산되기에 이른다. 이런 흐름과 달리 루카치와 토마스 만은 각각 그들의 에세이『영혼과 형식 Die Seele und die Formen』(1911)과 『슈토름 에세이 Storm Essay』(1930)에서 당대의 평자들과는 상이한 슈토름의 초상을 제시하며 일반적 통념을 극복하고 그의 작품의 다양성을 보여주려고 애쓰기도 했다. 특히, 그의 서사적 원천이 슈토름에 있다고 말한 토마스 만은 ‘지방색’과 ‘후줌색’이라는 말로 슈토름에 대한 왜곡된 평가를 부추긴 폰타네를 의식하며 “생기발랄하던 폰타네의 입장에서 보면 예술가적이라 생각되는 특성들, 모험적이고 기인적인 무절제함과 일상에 저항하는 기질은 슈토름에게 결여된 부분일 수 있으나 슈토름의 격조 높고 풍부한 예술가적 성취는 단순함이나 우직함, 혹은 향토예술과는 거리가 멀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러나 토마스 만의 애정 어린 지적과 루카치의 평가도 ‘전원시인’, ‘향토시인’이라는 슈토름에 대한 일반적인 선입견을 쉽게 바꿔놓지는 못했으며, 급기야 히틀러 정권은 그를 ‘피와 땅의 시인 Blut und Boden-Dichter’으로 끌어들이기까지 한다. 주인공 하우케 하이엔의 영웅적인 리더십에 초점을 맞춰, 괴벨스의 민중선동과 프로파간다의 일환으로 1933~34년에 걸쳐 제작된 영화 「백마의 기사」(쿠르트 외르텔, 한스 뎁페 감독)는 국내외에서 수차례 상영되며 각처에서 호평을 받았다. 독일의 국민배우로 추앙받던 마티아스 비만과 마리안네 호퍼가 주연을 맡은 이 영화에서 하우케는 극중 동작과 결합된 텍스트들을 통해 은밀한 방법으로 당시의 지도자였던 히틀러와 동일시되고 그에게 정치적 타당성을 부여하는 인물로 탈바꿈했던 것이다.
이후, 슈토름의 작품 「백마의 기사」에서 제3제국 ‘고향 Heomat’의 이미지가 희석되고 ‘북독일의 서사시’, ‘독일 리얼리즘 문학이 거둔 최대의 성과’로서 작품의 전모를 다양한 관점에서 평가받기까지는 적지 않은 세월이 흘러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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