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발터 벤야민 © 운영자

벤 형이 매일 하는 일은 웹 서핑인데, 아주 새로운 유형의 만보객 노릇을 하는 것이라고 한마디로 쉽게 설명했다. 그러면서 그는 2003년 버클리대의 리서치를 거론해가면서 매년 새롭게 생산되는 정보는 기록되는 것에만 한정해도 5엑사바이트(exabytes)고 이메일만 해도 일년에 40만 테라바이트(terabytes)나 쏟아져 나오니 자기 일은 도저히 끝날 수 없다고 덧붙였다. 엑사바이트가 10의 18승이고 테라바이트가 10의 12승이라는 얘기는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는다. 게다가 2000년 리서치의 수치가 2에서 3엑사바이트였으니 앞으로 더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서 도저히 좇아갈 수 없다고도 하소연했다. 이승에서는 그거 다 쓰레기로 치고 있다고 위로했지만 벤 형은 시큰둥한 반응이다. 약 기운이 아니면 도저히 버텨내지 못하는 일이란다. 벤 형이 자살할 때 먹은 몰핀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리고 벤 형은 날더러 책 내는 일은 괜히 꾸물거리지 말고 그때그때 빨리 묶어내는 게 낫다고 충고했다.
화제를 바꿔 보들레르는 가끔 보느냐고 물었더니 ‘나와바리’가 달라서 라고 대꾸한다. “그 친구는 파인아트고 나는 사진 쪽이니까.” 그래도 작가론을 몇 편씩이나 썼는데 너무 하는 거 아니냐고 되물었더니 보들레르는 환자라서 만나면 오히려 우울해진다는 거였다. 파울 클레의 작품을 소장했던 그가 위악적으로 나온 까닭이 바로 이 때문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대화 도중에 켜져 있는 자신의 컴퓨터 쪽으로 자주 눈길을 주는 것이었다. 원래 약속된 시간이 그리 길지 않았으므로 평소에 궁금하던 것을 물어보았다.

■■■ 켄 _ 논문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은 디지털 테크놀로지를 염두에 둔다면 전면 개작해야겠죠? 전 이래저래 일년에 두어 번 정도는 다시 읽어보곤 하는데요.
■■■ 벤 _ 그 때 내 희망적 진단과 비교해 보면 영화는 이제 상대적으로 더 우익적이고 보수적인 미디어가 되었고 사진도 요즘들은 디카나 카메라폰으로 찍어대니 어차피 새로 고쳐봤자 금방 낡아질 테니 차라리 손을 안대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해요. 또 별 거 아닌 글을 수십 번 고쳐 쓰는 것도 내 체질이 아니라서요. 그보다는 보들레르에 관한 것처럼 이리저리 변주해가면서 여러 편을 쓰는 게 차라리 더 낫지요. 그게 난 더 편해요.
■■■ 켄 _ 그럼, 요즘 보신 영화 중에서는 뭐가 재미있던가요?
■■■ 벤 _ 케이블 채널에서 틀어준 기타노 다케시의 <３－４ｘ１０月>하고 <그 여름, 아주 조용한 바다 あの夏, いちばん靜かな海>가 괜찮았고…… 그런데 나야 죽은 사람이니까 시간은 널널해요. 그러니 인터뷰를 길게 해도 상관은 없어요. 컴퓨터를 자꾸 보게 되는 것은 습관이 되어서 그래요, 잠깐만요.
컴퓨터를 끄고 난 그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그의 작업실을 둘러볼 수 있었다. 컴퓨터 테이블 옆에 놓인 책이 뭔가 하고 가서 보았더니 『나는 삐끼다』라는 책이었다. 세상에나, 절판된 책인데 어떻게 구했을까 하고 있는데 그가 머그 잔 두 개를 가지고 돌아왔다.
■■■ 벤 _ 어차피 오늘은 글쓰기도 틀렸고 소주나 한 잔 합시다. 주압이 쎄서 소줏잔으로 마시는 맛은 없지만.
■■■ 켄 _ 네. 근데 포도주나 맥주 파이프는 없나요?
■■■ 벤 _ 아아, 그거 나는 신청하지 않았어요. 역시 술은 소주가 낫지.
참, 이곳 명계는 주류공장에서 각 가정과 회사로 술 파이프가 직접 연결되어 있다. 파이프 꼭지만 틀면 술이 나오는 것이다. 매월 말에 계량기 눈금만큼 술값을 지불한다고 한다. 삼 개월이 연체되면 파이프가 끊기니 석 달까지 외상이 되는 셈인데 대신에 연체료는 아주 비싸다고 한다. 명계의 은행들이 수수료를 전혀 받지 않는 것과는 아주 대조적이다.
역시 술이 들어가니 훨씬 분위기가 좋아졌다. 내가 역시 사람은 죽고 볼 일이라고 말하자 벤 형은 자기는 파이프 공해가 싫다고 하면서 날 더러 죽을 때는 안주 많이 먹고 취해서 죽으라고 권한다. 이렇게 서로 간에 천기누설급의 대화를 나누다가 그럼 벤 형은 요즘 뭘로 먹고 사냐고 묻자 그의 안색이 조금 변한다. 아픈 곳을 찌른 게 미안해서 사실은 내 문제가 심각해서 물어본 것이라고 고백하자 자기도 가끔 가상 인터뷰를 해서 푼돈 정도 만진다고 했다.
■■■ 벤 _ 이곳 세상으로 차원이 끝나는 게 아니라 여기에서 다시 저승이라고 부르는 또 다른 이세계(異世界)들이 있어요. 이 형네 세계에서 죽은 사람이 다 여기에 머무는 게 아니라 여기서도 죽으면 다른 데로 가는 거죠.
■■■ 켄 _ 그럼, 뭐 수능시험이나 토익 같은 거 봐야 합니까? 몇 점대로 잘라서 가고 싶은 데를 가는 건가요?
■■■ 벤 _ 아, 그게 여기도 내신이 점점 더 비중이 커졌어요. 나야 인터뷰 할 때만 가끔 다른 이세계로 여행을 할 뿐, 떠도는 게 힘들고 지쳐서 딴 데 가지 않고 난 그냥 여기 사는 게 좋더군요.
■■■ 켄 _ 그럼 김현이나 채광석, 이성욱은 여기 살지 않겠네요. 벤 형은 최근엔 누구를 만나보셨는데요?
■■■ 벤 _ 『박물지』의 저자인 중국 위진(魏晋) 때 사람 장화(張華)도 만나봤고 근데 그 친구 참 웃긴 사람이더군요. 또 『과학의 탄생』을 쓴 야마모토 요시타카 하고도 인터뷰를 했지요. 아, 지금 장화는 목성의 위성인 이오(Io)의 명계에 살고 있지만 요시타카는 그 쪽 사람이니 이 형도 잘 알겠네요?
■■■ 켄 _ 그 분은 70년대 일본의 전공투 출신이고 전 한국 촌놈이라서……
■■■ 벤 _ 참 내 정신 좀 보게. 이형은 한번도 한반도를 벗어난 적이 없다고 했지.
이렇게 서로 수작을 벌이는 사이에 어느새 날이 저물었다. 나는 어차피 인터뷰는 망친 듯하니 차라리 빨리 돌아가서 내일 아침 강의 준비나 해야겠다고 했지만 벤 형은 한 잔 더 하자고 나를 꼬셨다. 벤 형이 날 데려간 곳은 ‘Nu’라는 간판이 붙은 술집이었다. 한쪽 테이블에서는 프로이트, 쉬레버, 도라, 쥐 인간, 늑대 인간이 알몸으로 마작판을 벌려놓고 있었고, 다른 테이블에서는 마르크스, 레닌, 스탈린 등이 격론을 벌이는 참이었다. 마르크스네 테이블은 상당히 어지러웠는데 일행 중의 호치민, 김일성이 합세하여 맥주 빈 병으로 스탈린 머리통을 내려치려고 하고 게바라는 옆에서 말리고 있었다. 벤 형은 마르크스에게만 목례를 하고 구석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는 소주를 시켰다.
■■■ 벤 _ 혼자 마시다가 심심해지면 가끔 이리로 오곤 해요. 여기는 파이프 나부랭이가 없어 옛날 분위기가 남아 있는데다가 지금처럼 사람들이 있어서 외롭지 않거든요.
■■■ 켄 _ 전 이런 데 익숙치 않아요. 아니, 이런 식으로 모든 테이블의 사람이 다 한둘 건너 서로 안면이 있는 데는 대개 뒤끝이 안 좋잖아요? 막판에는 말로든 몸으로든 싸움이 벌어지기 마련이고요. 술값 계산하기도 골치 아프고.
■■■ 벤 _ 어, 걱정 말고 술이나 합시다. 이곳 사람들 보기보다는 쿨 해서 테이블에서 테이블로 왔다 갔다 하진 않아요. 그리고 저거 다 장난이요. 실제로 머리통이 깨진 적은 한번도 없었지요. 조금 기다리면 숄렘과 라시스가 올 거요. 그들은 매일 여기 출근 도장 찍거든요. 으응, 마침 저기들 오네.
벤 형의 엑스-여친인 아샤 라시스는 사진보다 훨씬 미인이었고 목소리도 섹시했다. 화통한 성격이라서 그런지 내가 귀엽고 똘똘해 보인다면서 몇 번씩이나 내 머릴 쓰다듬고 내 뺨에 키스를 하곤 했다. 숄렘은 카발리스트답게 무슨 얘기가 나오든 간에 꼭 유태교 메시아주의로 화제를 끌어가려고 했다. 그래서 내가 못 참고 이라크전쟁 얘길 꺼내면서 미국과 이스라엘의 제국주의적 야만성에 대해 지적하자 그는 역사적 파국과 메시아의 도래에 사이에는 깊은 심연과 단절이 있다는 논리로 변명을 했는데, 그가 취했는지 내가 취했는지는 몰라도 무슨 얘기인지 잘 이해할 수가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벤 형은 라시스와 둘이서만 옛날 얘길 하는 데 몰두해 있었고, 숄렘과 나는 함께 침 튀겨가며 열심히 각자 딴 얘기를 해댔다. 그러면서 속으로 여기 ‘Nu’는 시공을 넘나드는 문화적 이종격투기장인데 나름대로 룰이 있다면 그건 뭘까 하는 데에 생각이 이르렀는데 갑자기 누가 뒤에서 어깨를 툭 친다. 돌아보니 석이와 숙이다.
“벌써 와 있었네. 딸 가르치느라 오늘 못 온다더니.”
깜짝 놀라 다시 고개를 바로 돌려보니 벤 형이 없다. 하지만 춘곤증에 졸기로서니 이런 얘기를 어찌 꿈결에 지어내겠는가. 몇 살에 죽는가도 중요하지만 죽는 순간에 위 속에 뭘 넣어두었는가 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따위의 얘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