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현대문학관 사무실에서 대담을 갖고 있는 김원일과 이혜경  © 운영자

                 
“서문에 쓴 대로, 그 당시 충격은 컸지만 글로 쓸 생각은 없었어요. 또 한 해에 책 한 권씩 내다 보니 그것 말고도 쓸 거리가 많았고. 『슬픈 시간의 기억』을 쓰고 나자 시간 여유가 많았고, 그래서 이제 인혁당 한번 써보자 하고. 그때 1년 정도 취재하고 자료 찾고, 1년 동안 계간지에 발표한 뒤 다시 다듬고.”
선생은 ‘작가의 말’에서, 민청학련 사건 보도를 접하면서 그동안 써온 소설이 ‘시대에 주눅들린 겉치장’이라는, 당면한 현실과 마주서야 한다는 각성을 했다고 밝혔다. 선생이 사회과학 공부를 하고, 초기의 개인적이고 체험적인 소설세계가 역사의 갈피에서 숨죽인 희생자들을 담아내기 시작한 것도 그 즈음부터였다.
올해는 인혁당 사건 희생자들이 세상을 떠난 지 30년 되는 해이다. 4월초, 선생은 희생자들의 묘지에 다녀왔다. 취재를 위해 만났던 유족들도 추모행사장에서 다시 만났다. “우리 그 사람을 그렇게 써주시니 고맙습니다”하고 감사해하는 유족이 있는가 하면, 그런 형태의 죽음을 당한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생리적 현상을 세밀히 그려낸 것에 대해 “아무리 소설이지만, 우리 남편은 당당히 죽었는데……”하며 서운함을 드러내는 유족도 있었다. 실존했던 인물, 그것도 유족들이 지켜보는 동시대의 인물을 그려내는 부담감이 만만치 않았을 듯하다.
“「팔공산」 같은 경우, 그 사람에 대한 자료라고는 거기서 태어났다는 것하고 검정고시를 통해 교사가 된 것, 그런저런 사건에 말려들어 고생했고 양봉한다는 것 정도가 자료고, 나머진 다 내가 만든 것이죠. 실존 인물을 그릴 때의 어려움이라면…… 유족들은 안 그래도 그 사건으로 지금까지 고통 받았는데, 소설에서 그 사람들을 나쁘게 그리면 안 되지 않겠나 싶고…… 소설이라는 것은, 인간이라는 것은 장점도 있고 결점도 있는데, 그런 부분을 다 그릴 수 없었다는 거. 성격을 만들려면 그렇게 해야 하는데……”
역사 마디마디 옹이진 상처들을 글로써 드러내어, 문학이 시대를 담아내는 그릇임을 다시 깨닫게 하는 선생의 작업은 선생의 원체험이라고 할 수 있는 6·25와 분단, 환경문제, 원폭 피해자, 인혁당 사건 희생자 등으로 이어져 왔다. 『겨울 골짜기』에서 그려진, 거창양민학살사건 때 죽임을 당한 한 주민의 외침은, 그 소설을 처음 읽던 때부터 지금까지, ‘백성’은 아랑곳없이 ‘나라’만 강조되는 일들을 대할 때마다 내 마음속에서 불쑥거린다. “백성 없는 나라가 무슨 필요 있소?” 선생의 눈길은 지금 어디에 닿아 있을까.
“난 이걸 쓰고 난 뒤에 무엇을 쓸까, 하면 아무것도 없다고 할 수밖에 없어요. 한 소설이 완성 단계쯤 들어가면 그때 새로운 게 생각이 나고. 소설을 쓸 때도 미리 구상을 해놓고 써본 적이 없어요. 대충 잡아서 이럴 것이다, 주인공 하나만 잡아놓고. 중간에 인물이 하나 나오면 이 인물을 나중에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하고, 점을 찍어놓았다가, 쓰다가 살아나면 그 인물을 넣고 안 그러면 없애고.”
인물을 고정시켜 놓는 것, 이야기 속에 지식이 날것으로 들어가는 것을 경계하는 선생의 말씀을 듣자니, 아침나절 존 버거의 산문집을 읽다가 밑줄 그은 구절이 떠오른다. ‘지나치게 표현할 필요가 어디 있는가.’ 그러고 보니, 선생을 만나는 아침에 소설가이자 미술평론가인 존 버거의 책을 집어든 게 영 우연만은 아닌 듯싶다.
어릴 적 화가가 되고 싶었던 선생은 그림에 감상을 붙인 산문집을 내기도 했고, 피카소의 생애를 소설화하기도 했다. 선생이 피카소의 생애를 썼다는 걸 들었을 때엔 잠깐 의아했다. 『환멸을 찾아서』 이후, 『푸른 혼』에 이르기까지 선생의 책에 단골로 등장한 것은 케테 콜비츠의 작품이었다. 자신이 살았던 시대를 작품으로 증언한 케테 콜비츠에 대한 선생의 경도가 표지나 책갈피에서 자연스럽게 묻어났다. 그런데 피카소라니? 피상적으로 알고 있는 피카소와 역시 글을 통해서만 알고 있는 선생은 어딘지 안 어울리는 조합 같았다. “피카소에 대해 쓰고 싶은 욕망의 이면에 도덕적으로 경직되어 가는 자신에 대한 반발이 숨어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선생의 말씀을 읽고 난 뒤에야 그렇구나, 싶었다. “끊임없는 성찰과 탐구를 통한 자기 세계의 확대, 타고난 건강과 자동기계처럼 쉴 줄 몰랐던 성실성, 너무 솔직해서 오히려 인간적이었던 진정한 자유인, 들불처럼 타올랐던 무한대의 상상력을 통해 새로움을 ‘발견’해 나간 도저한 창의력……” 선생이 피카소에게 바친 찬사가 그대로 선생에게 겹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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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은 부계로부터 낭만적 기질과 교양적 감수성을, 모계로부터 강한 생활력과 근면과 성실을 강조하는 도덕을 물려받았다. 선생의 여성관에 큰 영향을 끼쳤을 어머니 이야기는 『마당 깊은 집』 등의 소설에서 간간 드러났다. 자신을 세상에 있게 해준 어머니로부터 지속적으로 받은 억압, 그 기억과 어떻게 화해에 이르게 되는 걸까. 모진 물음이다, 생각하면서도 나는 물었다. 당돌한 질문 앞에 선생이 잠깐 침묵했다. 멈칫,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만큼 급작스러운 정적이 잠깐 그어졌다.
“그게…… 소설에서 그린 것보다 훨씬 더했어요. 숯포대, 그 당시 안기부에서 고문도구로도 쓰던 건데, 그걸로 핏줄이 터질 때까지 패고 한겨울에도 발가벗겨서 내쫓고. 나는 지금까지도 어머니가 왜 그랬는가 의심스럽고, 내가 애를 둘이나 놓고도 어머니 앞에서 눈을 못 맞추고 덜덜 떨고 그랬어요. 나이 들어서는 어머니가 그러지 않았지만, 내 속에는 짐으로 남았어요.”
어머니의 맺힌 한을 도무지 풀어드릴 수 없을 것 같아, “내가 여자로 변할 수 없다면 어서 세월이 흘러 머리 허옇게 센 노인이 되고 싶다”고, 『마당 깊은 집』의 주인공의 입을 빌려 말했던 선생의 머리카락은 그 세월을 거쳐 이제 순백으로 빛난다.
“빨리 노인이 되고 싶다고 했더니 40대 때부터 머리가 희어졌어요. 난 2~3년 사이에 부쩍 내가 노인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갑자기.”
노인이라니, 막 시작된 노안에서 문득 나이를 느끼는 내 또래 작가들 가운데 선생의 작업을 닮고 싶어 하는 몇몇의 얼굴이 스친다. 그들은 말했다. 그 연배에 그렇게 젊은 글을, 그렇게 쉼없이 쓸 수 있다니! 그러니 선생이 말한 노인이라는 단어가 낯설다.
“아마 『슬픈 시간의 기억』을 쓰던 무렵부터인 것 같은데…… 쓰는 동안에는 즐겁게 썼어요. 그런데도 노인 이야기 쓰다보니 그 영향인지 늙었다는 느낌이 들고. 그래서 우선 칠십까지만 써보고, 이런 생각도 들고. 똑같은 글 노상 쓰느니 오히려 안 쓰는 게 낫죠. 발전이 없는 글 그냥 쓰는 것보단. 정말 발전이 안 되는 걸 자기가 알 때는, 그냥 써놓은 거나 정리하고.”
말은 그렇게 하지만 선생은 이미 새 장편을 시작했다. 『동서문학』의 급작스러운 폐간 이후 이래저래 소란스러운 한때를 보낸 선생은 “이 일을 시작하니 다시 생기가 돋는 것 같다”며, 아침나절에 이미 일곱 장을 썼다고 한다. 새 소설엔 ‘악인’이 나올 것이다. 『물방울 하나 떨어지면』을 읽으며, 선한 인물들만 나오는 그 아름답고 희유한 세상이 어쩐지 선생의 희원인 것 같아 잠깐 마음이 적막해졌던 기억이 난다. 끊임없이 세계를 확장해온 선생이니만큼 이제까지와 다른 인물이 어떻게 그려질지 궁금하다. 자기의 욕망에만 지나치게 충실해 남을 눈에 들이지 않는 인물을 그려보려다 번번이 나가떨어졌던 경험이 내겐 있다.
“인간에 대한 이해라는 게, 선한 사람만 계속 쓸 수만은 없잖아요? 또 그렇지 않은 사람을 쓸 수 있어야 하고. 그런 게 체험 속에 녹아있을 만큼 아주 사실적으로, 잘 떠올리게끔 그리느냐 안 그리느냐는 장인정신이라든가 하는 데 맡겨야지, 내가 싫어하고 친밀감이 없는데 어떻게 그릴까 겁을 먹으면 못 그리는 거죠, 뭐.”
겁 때문일까요? 혼잣말하듯 웅얼거린다. 선생은 인물을 장악하는 힘에 대해서 말한다. 누군가가 폭력을 행사할 때, 그냥 악독한 것으로 여기는 게 아니라 그가 왜 그렇게 되었는지 원인을 깊이 들어가야 하고, 그럴 수 있는 게 소설이라고.
혼자 식사를 할 땐 아무리 배가 고파도 혼자서 식탁 하나를 차지하는 게 미안해서 사람들이 붐비는 시간대를 피한다는 선생의 단골집으로 자리를 옮긴다. 술은 선생의 그 소심함을 조금 완화시키는 다정한 음식이다. 최근에야 선생의 웃는 사진을 대하는 게 그리 드물지 않아졌지만, 예전의 사진에서 선생의 웃는 모습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선생의 사진이 여러 장 실린 책에서 유독 러시아에서 찍은 사진만은 선생의 표정이 풀린 것을 보았다. 그 여행이 특별히 즐거우셨던가 물었더니 선생은 웃음기를 띠었다. “술에 취해서, 늘 술에 취해서. 그 사람들은 밤낮이 없데, 술 마시는 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선생의 잔을 채우는 내 손이 은근히 박해졌다. 『동서문학』 폐간 무렵 높아졌던 당뇨 수치는 정상에 가깝게 떨어졌다지만 그래도 조심스럽다. 그러다가도, 근면 성실이라는 모토 위에 선생이 늘 다잡아온 마음의 고삐가 언제 또 느슨해지랴 싶어서 후해졌다가, 종작없어졌다.
“글을 쓰다가 꽉 막혔을 때, 그럴 땐 술을 마신다. 물론 술자리에 섞여서도 마음은 소설을 어떻게 끝낼까에 매여 있지만. 그럴 때, 인사불성에 가깝게 술을 마시다 보면 슬그머니, 그냥 넘어가자는 마음도 들고. 그래서 그 글을 끝내고 다음 글을 시작할 수 있게 된다. 일종의 타협이랄 수도 있고.”
선생이 늘 갖고 다니는 수첩엔 지난 연말의 소회가 적혀 있었다. 한 해에 한 권씩 내겠다는 결심은 지켜졌지만, 성가대에서 노래하기를 즐기는 순수한 청년, 자폐증인 아들을 혼인시키지 못한 애틋함이 남았다. 참한 아가씨 있으면 소개해 달라고, 흘리듯 말하는 선생의 부정이 간곡했다.
선생이 부축을 필요로 할 만큼 술기가 오른 건 아니었지만, 자리에서 일어서며 나는 선생의 팔을 살짝 잡아 보았다. 그런단들 선생의 부지런함이 전염될 리도 없건만. 선생의 팔은 뜻밖에 가늘었다. 선생이 살아온 세월의 무거운 너울과, 시대의 상처를 싸안고 그 그늘에서 숨죽인 존재들을 되살리는 선생의 묵중한 글쓰기와, 그 모두와 동떨어지게 가는 팔이 삭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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