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진 대산문화
 
*나의 아버지 - 아버지의 박꽃을 그리며
 

내 아버지는 만 61세가 되신 1966년 가을에, 갑자기 몇 시간 아프시지도 않고 뇌일혈로 돌아가셨다.

나는 그 갑작스런 사고가 일어나기 4개월 전, 고국의 공군 군의관 생활을 마치고 미국의 수련 의사로 고용되어 그 곳 병원서 보내준 비행기 표로 오하이오주의 한 병원에서 인턴 노릇을 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갑작스런 소식에도 나는 고용을 파기하고 귀국할 비행기표 값이 없었고, 돈을 빌릴 친구도 신용도 없었고, 며칠간의 휴가조차 불가능했다.

그래서 나는 큰 아들이 되어서도 아버지의 임종을 못 본 것은 물론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했다. 거기에 더해 미국에 살고 있다는 이유로 자주 산소를 찾지도 못했고, 한심하게도 그 후 40여 년, 외국 의사 노릇을 하며 사느라 아버지의 뒷일도 도와드리지 못했다.

돌이켜보면 나는 아버지께 많은 사랑과 특별한 도움을 받았다. 그 중에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것은 내가 어릴 때부터 시간과 기회만 있으면 문학, 음악, 미술, 연극이나 무용 등 예술 전반에 대한 취미를 고루 갖추어 가지라고 나를 독려해 주신 것이다.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정신없이 바쁘게 공부를 해야 했던 대학의 예과와 본과 시절에까지 아버지는 기회만 있으면 좋은 책의 이름을 알려주셨고, 좋은 음악회나 미술전의 일자를 알려주시며 의사가 되든 다른 직업인이 되든 예술을 사랑할 줄 아는 자세와 그것을 올바로 감상할 줄 아는 지식과 상식은 생활의 질을 윤택하게 해주고, 안정된 정신과 정서 생활에 도움이 된다고 말씀해 주셨다.

내가 중학교 2학년인 대구 피난 시절, 방 한 칸에서 다섯 식구가 모두 함께 살아야했던 찢어지게 가난했던 시절, 아버지는 원고료가 갑자기 많이 생기셨다며 내게 한 턱을 내시겠다고 하셨다. 그런데 음식을 사주실까 하던 내 기대와는 다르게 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르네쌍스’라고 하던 어른들만 들어가는 다방에 들어가셨다.

나중에 이곳이 고전 음악만 들려주던 음악감상실 같은 곳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나는 그때 아버지가 나를 위해 사주신 따끈한 우유를 조금씩 마셔가며 들었던 슈베르트의 미완성교향악이니 쇼팽의 피아노곡들을 아직도 황홀하게 기억하고 있다. 아버지는 아마도 그 당시에 학생 단체 관람으로 슈베르트와 쇼팽의 일대기를 그린 오래된 흑백영화를 보고, 그 영화에 나왔던 음악들을 내가 흥얼거리며 지내던 것을 들으셨기 때문에 이런 놀랄 일을 주선해 주셨던 것 같다.

그 후 환도를 하고 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예과를 거쳐 거의 매일을 시험 지옥 속을 헤매던 의과 대학생 시절, 그 어느 초가을 날 밤이었다. 그날도 나는 시험 때문에 늦게까지 방에서 공부를 하다가 화장실에라도 가려고 했는지 방문을 열고 마당으로 내려왔다.

작은 마당의 다른 쪽, 겨우 대여섯 발자국 밖에 떨어지지 않은 아버지의 방은 방문이 열려 있었고, 아버지는 망연히 건넛집 지붕에 넓게 피어있는 박꽃을 보고 계셨다. 그 밤이 바로 보름이었는지, 달빛이 푸른 아우라로 수많이 핀 흰 박꽃의 주위를 감돌고 있었다. 아름답고 교교한 달밤의 흰 박꽃을 보시면서 아버지는 아버지 방의 낡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듣고 계셨다. 그것은 나도 잘 알고 있었던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4번이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박꽃의 아름다움에 취해 아버지 방의 툇마루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때 나는 아버지가 황급히 옷소매로 눈물을 닦으시는 것을 보았다. 나는 아버지의 그날 밤의 눈물이 하나도 어색하게 보이지 않아 아무 말 없이 아버지께 더 다가가 툇마루에 앉았다. 눈물을 닦으신 아버지는 덤덤히 내게 몇 마디 해주셨다. 그러나 그런 말씀보다 나는 아버지 옆에 그냥 앉아 함께 음악을 들었다. 음악이 환한 달밤에 청초하게 피어있는 박꽃의 주위로 조용히 퍼져가는 것을 보며 오랫동안 그렇게 꿈꾸듯이 앉아 있었다. 정말로 그렇게 아름다운 박꽃을 나는 전에는 본 적이 없었다.

그날 밤의 그 광경을 나는 오래 잊지 못하고 있다가 최근에 아버지를 그리며 한 편의 시로 만들어 보기로 하였다. 아버지는 그날 왜 박꽃을 보며 우셨을까? 한동안 나는 아버지가 아마도 당신의 옛 애인이 생각나셔서 그랬으리라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 이유가 없이도 눈물이 왈칵 흐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후부터 나는 그날 밤 아버지가 그 음악과 흰 박꽃과 달빛과 초가을의 푸른색 침묵 때문에 우셨으리라고 믿게 되었다.

아버지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시고 난 뒤, 나는 기막히게 바쁘던 일상의 병원 생활 중 시간이 없으면 한동안은 화장실에서도 울었고 병원 옥상에 올라가서도 울었지만 내가 고국을 떠나온 그 4개월 동안 아버지가 내게 주신 7통의 항공 우편도 자주 읽어보곤 했다.

아버지가 내게 보내주신 마지막 항공 우편은 그 해의 시월 중순경에 쓰신 것인데 그 맨 마지막 줄은 이렇게 끝이 난다.

“……인생이 뜬 구름이라지만 남의 나라에서 호강, 호사한 생활은 더한 뜬구름이다. 수입이 없어 의식이 불편해도 내 나라에 사는 것만도 애국하는 태도라고 생각하며 살고 있다……”

아버지는 청소년 시절부터 유교적 구습의 병폐의 피해자였다. 그런 고루한 풍습에 맞서야한다고 아버지는 일찍부터 어린이 운동에 앞장서셨고 18세의 젊은 나이에 한국 최초의 창작 동화 「바위 나리와 아기별」, 「어머님의 선물」 등을 써서 발표하셨다.

아버지는 일본서 귀국하신 30대 후반 이후, 한번도 변변한 직장을 안가지시고 그 어린 날부터의 결심을 지키며 돌아가시는 날까지 아름답고 뜻 깊은 동화를 쓰셨다. 어린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비록 가난하지만 고결하고 훌륭한 인생을 살고 가신 아버지. 오랜 세월이 흘러 간 오늘날까지 나는 그 아버지가 눈물나게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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