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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 60년을 넘어, 언어와 감정의 층위를 넘어

1.

7월 20일 새벽. ‘6․15 공동선언 실천을 위한 민족작가대회’에 참석키 위해 인천국제공항으로 가는 길은 안개가 자욱했다. 안개는 출발지연으로 이어졌다. 왠지 마음이 불안했지만 59년을 기다리고 다시 1년을 기다렸는데 그깟 몇 시간이야 하는 말로 위로하며 공항 로비를 서성였다. 이윽고 10시경 공항 한켠의 대형 장백폭포 그림을 배경으로 작가회의 염무웅 이사장이 다소 긴장되고 떨리는 목소리로 출발성명을 읽어 내려갔다. 비행기는 11시 40분경 인천공항을 이륙했다. 금강산샘물, 배단물, 룡성맥주 등이 제공되었고 이어 ‘로동신문’과 『청년문학』『금수강산』 등의 잡지가 배포되었다. 낯설고 긴장된 분위기가 조금씩 익숙해질 무렵 비행기는 천천히 평양 순안 비행장에 날개를 접었다. 남과 북의 작가가 다시 만나는데 60년이 걸렸지만 비행기는 50여 분 만에 남측 작가단을 평양에 내려놓았다.

선발대로 하루 먼저 중국을 경유해서 도착한 소설가 방현석과 김종광이 환한 얼굴로 마중 나왔고 풍경들도 설지 않아 어디 지방도시의 버스터미널에 온 듯한 느낌이었다. 까랑까랑한 목소리로 소설가 황석영이 도착성명을 읽고 기념촬영을 한 후 준비된 4대의 버스에 나누어 올랐다. 44층의 쌍둥이 건물, 고려호텔이 일행의 숙소였다. 늦은 점심을 서두르고 본대회가 열릴 인민문화궁전으로 향하는 버스에 올랐는데 한참을 떠나지 않았고 미묘한 긴장이 돌았다. 북측이 당초 합의와 달리 자신들이 초청한 조총련과 재중 작가 십여 명에게 대표권과 남북작가단과 동등한 지분을 주자고 주장한다고 했다. 이대로 가면 제2의 범민련화가 우려되어 불가입장을 전달한 상태이므로 대회장 입장을 미루고 북측의 새로운 입장을 기다리기로 했다. 2시간가량 지난 후에 원래 합의대로 하고 해외 작가들은 참관자격만 부여하자는 의견조정이 이루어졌다.

인민문화궁전에는 벌써부터 북측 작가들이 입장해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예정보다 3시간 30분 늦은 7시 30분이 지나서야 남과 북의 의장단이 입장하고 민족작가대회 본대회가 시작되었다. 김병훈 조선작가동맹 위원장의 개회인사와 축사가 있은 후 ‘6․15 시대 작가의 임무와 역할’, ‘6․15 민족문학인협회 결성’, ‘6․15 통일문학상 제정’ 등에 대해 2시간 동안 남과 북 그리고 해외 작가들의 보고와 토론이 빠르게 진행되었다. 그리고 ‘6․15 공동선언’을 이정표로 삼아 ‘우리 민족끼리’의 기치 아래 사상, 신앙, 출신지역, (문학적)입장을 넘어 창작에 매진하고 연대를 강화한다는 전제 아래 ▲6․15 민족문학인협회 결성 ▲기관지 『통일문학』 발행 ▲6․15 통일문학상을 제정하자는 ‘6․15 공동선언 실천을 위한 민족작가대회 공동선언문’을 채택하였다. 60년을 기다린 설레고 애타고 흥분되고 긴장하고 환호한 하루가 이렇게 끝이 났다.

이튿날, 동승한 보장성원의 이름을 물을 수 있을 만큼 가벼워진 마음과 옷차림으로 평양 시내를 둘러보았다. 만수대 김일성 주석의 생가, 1948년 김구 등 민족지도자들이 김일성과 회담을 했다는 대동강 쑥섬, 그리고 주체사상탑을 둘러보고 대동강변 옥류관에서 평양냉면으로 점심을 들었다. 그리고 개선문을 둘러본 일행은 평양 지하철과 평양산원, 재북인사 묘역 등 세 팀으로 갈라졌다. 첫날 밤 본대회로 모든 것이 합의되고 하나가 된 것은 아니었다. 북은 당초와는 달리 재북인사 묘역에 갈 수 없다고 했고 남측 상황실과 협상 끝에 버스 1대에 해당하는 인원만 허락했다. 이후 모든 일정은 내내 불확실성이라는 말로 대신할 수 있었다. 양측의 날카로운 신경전이 반복되었고 그날의 일정은 출발 직전에야 조장들에게 전달되었고 그마저도 종종 변경되곤 했다.

재북인사 묘역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지시로 2003년 평양시 용성구역에 1500평방미터 규모로 조성되었다고 했다. 독립운동가 안재홍을 비롯하여 김약수 초대 국회부의장, 현상윤 고려대 초대 총장, 문인 정인보․이광수 등 총 62기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었다. 강원도 정선서 초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었다는 최태규 재북평화통일촉진협회 상무위원으로부터 묘역 조성과 안치된 인물들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85세의 그는 춘원이 1950년 9월 18일 서울을 출발하여 10월 20일 평양에 도착했으며 병을 치료하기 위해 만포병원으로 가던 중 10월 25일 차안에서 폐결핵으로 사망했다고 했다. 그는 개인적으로는 춘원을 혐오했지만 북의 수령은 그를 포용했으며 아마 살았으면 북을 위해 큰 활동을 했을 것이라고 안타까워했다. 하지만 나는 그가 거기서 죽은 것이 그에게도, 모두에게도 참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2.

백두고원 베개봉 호텔은 23일 새벽 2시부터 백두산 정상에서 해돋이와 ‘통일문학의 새벽’ 행사를 갖기 위해서 부산했다. 미니버스는 1시간 30분여를 달린 끝에 백두산 정상에 작가들을 토해냈다. 천지는 거센 바람을 뿜어내며 어둠을 걷고 신비로운 검푸른 남색 얼굴을 조금씩 드러내기 시작했고 향도봉 너머 멀리 광활하게 펼쳐진 운해를 뚫고 해가 떠올랐다.

백두산 정상은 통일을 염원하는 작가들의 함성과 열정으로 가득했다. 새벽 5시, 150여 명의 작가들은 장군봉과 향도봉 사이 개활지에 모여 ‘통일문학의 새벽’을 열었다. 남측의 소설가 은희경과 북의 시인 리호근의 사회로 남측의 김형수 작가회의 사무총장과 북측의 장해명 작가동맹 부위원장이 본대회에서 채택한 공동선언문을 읽는 것으로 행사는 시작됐다. 고은 시인은 전날 숙소에서 쓴 「다시 백두산에서」를 특유의 열정적인 목소리로 낭독했고 이어 홍석중이 “6․15 공동선언의 우리민족끼리의 대의를 받든 통일 지향을 누구도 막을 수 없으며 조국통일이 이루어지는 날 백두산에 올라 조국통일 만세를 다시 부르기를 염원한다”고 소리 높였다. 소설 『빨치산의 딸』의 작가 정지아가 “조국은 하나다. 이것이 나의 슬로건이다……”로 이어지는 고 김남주 시인의 「조국은 하나다」를 낭독했으며 전남 강진이 고향인 북의 오영재 시인은 「잡은 손 더 굳게 잡읍시다」라는 시로 화답했다. 그리고 모든 작가들이 “백두산 만세”, “민족문학 만세”, “조국통일만세”를 외치며 ‘통일문학의 새벽’의 대미를 장식했다. 북측의 작가들은 한결같이 1년에 20일 정도 밖에 볼 수 없는 백두산 해돋이 가운데 최고였다며 남북 작가들의 염원에 천지가 감동한 것 같다는 덕담과 함께 서로를 뜨겁게 끌어안았다.

3.

일행을 괴롭힌 가장 큰 복병은 불확실성과 안개였다. 장엄한 해돋이를 맞은 백두고원을 뒤로 하고 삼지연 공항에 왔을 때 안개 때문에 비행기가 착륙하지 못하고 평양으로 돌아갔다는 소식을 접했다. 열악한 현지 사정상 작은 비행기가 2차례 왕복하며 작가들을 실어 나른 까닭에 저녁 7시 무렵 평양에서 묘향산행 버스에 오를 수 있었다.

묘향산으로 가는 동안 어느새 친숙해진 보장성원 K와 S, 두 사람과 비교적 솔직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들은 북에는 평양과 개성, 평양과 향산을 잇는 2개의 고속도로가 있다고 했다. 가로등 하나 없는 칠흑의 어둠 속을 2시간여 달리면서 다른 자동차를 거의 볼 수 없었는데 일부러 차량을 통제해서 그렇다는 것이 그들의 변명이었다. 애써 그들의 말꼬리를 잡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그들의 생활과 개성공단, 백두산과 평양 시범관광 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통일과 민주화 그리고 민족에 대한 책임의식이 강한 남쪽의 40～50대가 중심세력으로 있을 때 남북통일이 이루어지든지 아니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남북관계에 진전이 있어야 하고, 남북관계에서 작은 문제에 매달리지 말고 큰 목표를 향해 성큼성큼 나아가야 한다는 부분에 그들의 표정은 진지해졌다. 하지만 남측이 광고료 수입으로 방송국을 운영한다든지 신문에 수만 불씩 비용을 들여 광고를 한다는 부분에 대해서는 끝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안개의 여파는 일행을 밤 9시가 넘어서야 묘향산의 향산호텔에 내려놓았고 묘향산에서의 ‘민족문학의 밤’은 취소되었다. 그날 밤, 스카이라운지에서는 백두산에서의 남측 작가들의 ‘경솔한 언행’을 두고 남과 북 실무자들간의 입씨름이 벌어지는 것이 목격되었다. 한참을 이야기하던 그들은 이내 함께 건배하고 서로의 노래를 불러 제쳤다. 그들은 첫날부터 그랬고 끝날 때까지 그럴 것이다. 합의하고 갈등하고 언쟁하고 다시 의기투합하는.

24일 아침, 해외 각국에서 김일성 주석 부자에게 보낸 선물을 전시하는 묘향산의 국제친선박람관을 관람한 후 오후에는 서산대사가 47세에 와서 85세에 입적할 때까지 머물렀다는 보현사를 둘러보았다. 수려하기도 하고 웅장하기도 하다는 묘향산 한 가운데에 1042년 터를 잡은 보현사 대웅전에서는 동국대 홍기삼 총장을 비롯한 문인 30여명이 예불을 드렸다. 내년 개교 100주년을 맞는 동국대 설립에 참여한 16개 사찰 가운데 북쪽에 5개의 사찰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보현사라고 했다. 돌아오는 길에 청천강변에 잠시 멈추고 도로 한복판에서 사진을 찍을 때 지나간 군용트럭 한대가 묘향산을 왕복하며 만난 유일한 차량이었다.

인민문화궁전에서의 환송만찬. 남측의 신세훈 문인협회 이사장과 북측의 현승남 작가동맹 부위원장의 송사가 이어졌다. 테이블에는 남측작가단의 대변인들(대변인 강태형 김훈, 부대변인 이문재 곽효환)과 북의 시인 박경심, 소설가 신용순, 김형직사범대 언어문제연구소부소장 홍기풍, 그리고 갓 서른이 넘은 보장성원이 함께 자리했다. 환영만찬에 이어 북의 작가들과 가까이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두 번째 자리였다. 자리가 파할 무렵 신용순은 “북의 문학은 시대와 인민들이 지향하는 심리를 잘 반영하고 있는데 비해 남의 문학은 분단문제를 회피하고 미국식 섹스나 이혼 등의 소소한 가족사 문제에 매달리는 등 때부시(때를 벗다)를 못하고 있다”고 불만을 터트렸다. 문학을 바라보는 양측의 시각차를 절감했다.

4.

1945년 12월 이기영, 한설야 등 북의 작가들이 서울을 방문한 조선문학가동맹대회가 남북 작가들의 처음이자 마지막 만남이었다. 그리고 꼭 60년 만에 남북의 작가들은 다시 만났다. 60년 전은 이제 기억이 아닌 기록으로만 남아있을 뿐이고 사실상 다시 첫걸음을 뗀 셈이다. 많은 아쉬움과 과제를 남겨 놓은 채.

우선 실질적인 작가교류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양측의 문인들은 두 차례의 공식만찬 외에는 개별적으로 만나고 대화할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없었다. 실무협상단만이 불확실성을 걷어내기 위해, 언어와 감정의 층위의 차이로 인한 충돌을 해명하기 위해, 그리고 아직 실타래처럼 얽힌 많은 일들을 풀기 위해 빈번히 북의 작가들과 보장성원들을 접촉했을 뿐이었다. 어떤 이는 어렵게 북측 작가들과 대화라도 하려 하면 안내원들이 감시에 나섰다고 아쉬움을 토로했고 어떤 이는 작가대회가 아닌 김주석 부자의 유적지를 따라 캡슐여행을 한 것 같다고 불편해 했다. 남과 북의 작가들이 삼삼오오 같이 거리를 걷기도 하고 집을 방문해 사는 형편을 들여다보며 가족들과 인사하고 그리고 선술집에서 격의 없이 어울려 이야기하고 노래하는 그런 교류까지는 아직도 많은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고은 시인은 대회를 마치고 기자회견에서 “남과 북이 자기문학에 대한 신념이 충돌하는 과정을 거쳐서 통일 시대에 다채로운 문학을 형성할 것을 예감한다”고 말했다. 내년 6월쯤 계획하고 있는 2차 대회에서는 한라산 백록담에서 남쪽의 일출을 보며 두 신념이 훌훌 벗고 충돌했으면 좋겠다. 그래서 서로의 벽을 허물고 다채로운 통일 문학을 향해 한 발짝 더 나아가는 자리가 되기를 바란다면 너무 상투적인 결말이 되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