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재단 - 21세기 문학의 창 -

웹진 대산문화

*서울국제문학포럼 후기 - '무언가'를 알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잊어야 한다

지금 나는 베를린에서 북쪽으로 두 시간여 떨어진 메클렌부르크의 우리집 정원에 앉아 이 글을 쓰고 있다.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여름 날씨. 하늘은 푸른빛을 내뿜고, 미풍에 나뭇잎들이 살랑거리고, 새들이 지저귀고, 나비가 주변을 맴돌며 춤을 춘다.

태어난 지 갓 8주가 지난, 두 마리 새끼 고양이는 잔디밭 여기저기를 뒹굴며 놀고 있다. 잠시 후면 나는 부엌으로 가 맛있는 밀크커피 한 잔을 만들 작정이다.

이것이 평화이다.

정확히 5일 전, 7월 7일 나는 런던에 있었다. 베를린으로 돌아올 예정이었고, 비행기표는 예약돼 있는 상태였지만, 결국 나는 공항에 도착할 수 없었다. 런던의 모든 대중교통 수단이 몇 시간 동안 운행 정지됐다. 나는 워털루 역에 붙들려 꼼짝할 수 없었다. 처음 공항으로 가는 길이 막혔을 때만 해도 어떻게 해서든 공항에 닿기를 바랐지만, 이미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비행기 편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사태를 파악하기 위해 시내 쪽으로 걸어갔다. 사람들은 당황스럽고 근심어린 모습이었으나 경황없이 굴지는 않았다. 전화거는 사람들 - 아마도 가족들을 안심시키기 위한 - 이 많았고 통화량 폭주로 휴대폰 네트워크망은 마비되었다.

헬기가 머리 위를 날아다니고 거리에서는 구급차의 사이렌 소리가 가까워졌다가 멀어지기를 끊임없이 반복했다. 무슨 일이 일어났음을 알 수 있었다. 런던에 전쟁이 터진 것은 아니었어도 그렇다고 평화라고 일컬을 수 있는 상황은 이미 아니었던 것이다.

나는 냉전시대에 베를린, 그러니까 체제의 접합점에서 자랐다. 우리집에서 200미터 가량 걸으면 베를린 장벽이 있었다. 우리에게 ‘전쟁에 대한 공포’는 ‘핵전쟁에 대한 공포’를 의미했다. 고르바초프의 등장 이후 이 공포감은 사라졌다. 적어도 유럽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지구상에서 독일을 위협하는 나라는 한 나라도 없고, 우리는 적이 아닌 친구들에 둘러싸이게 되었다. ‘평화를 위한 글쓰기’라는 국제회의를 위한 대산문화재단의 초대는 곧 1990년 이래 우리가 유럽에서 획득한 안전성이 세계 모든 지역에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사실은 아니라는 말이었다.

한국으로의 초대에 응하는 나의 마음은 일면 호기심으로 가득했다. 세계 각지에서 초대된 문인들에 대한 호기심, 무엇보다 핵폭탄을 소유하고 있다는 북한의 성명이 발표된 직후의 분단국가인 한국 내 분위기에 대한 호기심, 그리고 2002년 방문했던 적이 있는 거대도시 서울에 대한 호기심. 내 책을 출판한 한국의 출판사 관계자들을 만나게 되는 것도 기분 설레는 일이었다.

대산문화재단 덕분에 나는 서울에서 매우 흥미로운 닷새를 보낼 수 있었다. 초대손님에 대한 예우와 넉넉함, 대산재단 직원들의 진심어린 환대 속에 나는 주어진 시간을 맘껏 누릴 수 있었다. 매우 인상에 남았던 것은 오에 겐자부로와 오르한 파묵의 발제문이었다. 오에 겐자부로는 일본 헌법 조항에 명시되어 있는 정치적 평화에 대한 의지를 일본 민간인들에게 일깨우는 일종의 민중운동을 이끌고 있다. 문인으로서 확고한 상황에 확고하게 대응할 수 있다는 그의 생각은 정당하고 시기적절해 보였다. 오르한 파묵은 유쾌하고 재치있게 서양과 동양 사이의 긴장감 넘치는 관계를 설명했다. 동양 역시 서양에 대해 경탄하는 만큼 불편하게 느끼는 점이 있다(그럴 만한 타당한 이유에서)는 말을 듣고 나 역시 깨닫는 바가 있었다.

그리고 당연히 나를 비롯한 모든 다른 참여자들에게 나의 동료 볼프 비어만의 등장이 기억에 남을 줄로 안다. 우리 중 누구도 그때까지 이런 연설자 - 발표문 중간 중간 노래를 불러주는 - 를 경험하지 못했을 것이다!

특별히 나의 관심을 끌던 문제는 남북관계, 나와 직접 대담을 나눈 한국문인들의 남북분단을 보는 시각이었다. 분단된 독일에서 자란 독일작가로서 내가 그에 대해 의문을 갖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일 것이다. 놀랍게도 나는 과거 독일의 분단상황을 한국에 그대로 적용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문득문득 한국에 대해 ‘무엇인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독일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잊어야 한다는 느낌마저 들 정도였다.

한국은 올해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의 주빈국이며 여기서 나는 황석영, 신경숙 두 분의 한국작가를 독일 대중들에게 소개하는 영광을 누리게 됐다. 나 역시도 이 두 작가에 대해 궁금한 점이 많다. 왜냐하면 한국에서 돌아오는 길에 나는 여행 전보다 오히려 더 한국에 대해 아는 게 없어진 것 같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이런 류의 여행이 좋다 ― 거기에 친구를 얻었다는 느낌까지 들면 더 바랄 것이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