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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과 음악, 영화를 사랑했던 소설가 - 나의 아버지 이효석

세월의 흐름은 참으로 빨라 올해로 나의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지 65년이자 탄신 100주년이 되었다. 어렸을 때 나의 눈에 비친 아버지는 오로지 문학만을 위해 존재했던 분이다.

아버지의 생애는 어떻게 보면 외면의 세계는 화려하고 아름다운 것처럼 보였지만 집안의 맏이인 나의 눈에는 무척 고독하고 불행했던 분이다.

아버지 성격은 아주 꼿꼿하고 깔끔하여 쌀쌀하게 보였지만, 외모와는 달리 가슴에는 항상 따뜻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온화한 성품에 키는 그다지 크지 않았으며, 매사에 서두르는 법 없이 언제나 차분하고 얼굴에는 부드러운 표정을 잃지 않는 외유내강의 성격을 가진 분이었다.

오직 문학만이 풍요로운 삶을 준다고 생각하고 계셨던 나의 아버지께서 1942년 5월 25일 평양 大同工業專門學校 어학교수로 계시다 돌아가셨는데, 그때 나는 비록 열한 살의 어린 나이였지만 아직까지도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또렷하다.

아버지께서는 돈과 명예보다는 문학 속에서 항상 마음의 여유를 찾으려고 하셨는데, 내가 평양에서 국민학교에 입학하던 해인 1937년, 원고지 쓰는 법을 자세히 가르쳐 주시며, "책을 읽는다는 것은 일상생활을 하는 데 항상 유익한 꿈과 희망을 안겨준다"고 하시던 말씀이 아직도 귀에 생생하게 들리는 듯하다.

평양 창전리 48번지에 살던 1935년부터 어머니께서 돌아가시던 해인 1940년 1월까지 5년 동안 우리 가정은 가장 행복하고 화려했던 시기였다. 당시 인정도서관 옆에 있던 우리 집은 빨간 벽돌의 아담한 단층 양옥이었는데, 여름이면 담쟁이가 온통 집을 가려 주위에서는 우리 집을 "푸른 집"이라고 불렀다.

30평 남짓한 아담한 뜰에는 평소 꽃을 심고 가꾸는 것을 유난히 좋아하시는 어머니께서 정성 들여 심어놓은 여러 가지 화초들이 저마다 아름다움과 향기를 풍기며 꽃을 피웠다. 마치 그림 속 풍경같이 아름다웠다. 아버지께서는 아침저녁으로 다양한 빛깔의 꽃들이 야단스럽게 뒤섞여 있는 정원을 바라보며 많은 작품을 쓰셨는데, 여름 내내 꽃의 향기를 맡는 것이 우리 가족들에게는 큰 즐거움이었다.

1930년대 중반 우리 집은 이미 현대생활 양식을 모두 갖추고 있었는데, 당시에는 아버지께서 집필하시는 서재라고는 따로 없었고, 단지 열 평 남짓한 거실 벽의 빈 공간을 활용하여 양쪽 벽으로 삥 둘러져 책들이 가지런히 꽂혀 있었다. 서향의 창문을 향해 아버지께서 원고를 쓰시는 테이블과 갈색 축음기가 자리잡고 있었고, 여름이면 테이블이 있는 반대편 한구석에 침대를 두기도 했다. 그리고 북쪽에는 피아노가 초록색 커튼으로 둘러져 있었으며, 그 바로 옆에는 아버지께서 겨울이면 즐기시는 스키와 평소 키시던 기타가 있었고, 한가운데는 등나무로 된 의자와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이 작은 공간에서 나의 아버지께서는 후세에 길이 남을 많은 작품을 쓰셨고, 원고를 쓰실 때에는 주위의 어떠한 소란에도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항상 진한 커피 향기를 맡으시면서 밤새도록 글을 쓰셨는데 가족들이 너무 냉정하다고 느껴질 만큼 모든 것을 잊고 혼자만의 문학세계에 심취하셨다.

그곳 평양 창전리 살던 시절에는 또 아침마다 배달되는 우유를 가족들과 아침저녁으로 물같이 풍족하게 마시기도 했으며, 어둠이 짙게 내리는 저녁이면 등나무 의자에 모여 앉아 축음기에서 흘러나오는 클래식 음악을 들으면서 외가인 함경북도 경성에서 보내온 사과로 어머니께서 손수 만든 애플소스를 먹으며 단란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당시 집에는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셨던 부모님께서 수집하셨던 레코드가 많았는데, 아버지께서는 특히 글씨가 금박으로 새겨져 있는 모차르트의 앨범 중 바이올린 소나타를 즐겨 들으셨고, 기분이 좋으시면 집에서 어머니가 만든 포도주를 큰 유리잔에 조금 붓고는 향기를 음미하면서 마시곤 하셨다.

이 시절 어머니께서는 아버지의 문학 향상과 발전을 위해 집안의 분위기에 늘 세심한 신경을 쓰시며 애쓰셨다. 어머니께서는 아버지가 훌륭한 작품을 창작하실 수 있도록 언제나 아름다운 가정을 꾸미려고 많은 노력을 하셨다.

아버지께서 평양에서 교수로 계시면서 학교에 가실 때에는 언제나 회색 중절모를 이마가 전부 보일 정도로 올려 쓰시고는 팔에 가방을 끼고 다니셨다. 길을 걸으실 때는 항상 깊은 생각에 잠겨 걸어가시는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며 아침이면 아버지와 함께 등교하던 때의 기억이 새롭기만 하다.

그리고 아버지께서는 꽃과 음악을 사랑하셨을 뿐만 아니라 영화에 대한 취미 또한 대단하셨다. 평양 창전리 시절 피아노가 있는 벽 위에는 당시 미국의 유명한 여배우인 다니엘 다류의 사진이 액자에 넣어 걸려 있었고, 영화도 단지 보고 느끼는 정도가 아니라 직접 시나리오를 써서 영화에 관여하신 적도 있다. 그 영화가 바로 <애련송(愛戀頌)>이다. 이 작품은 애정물로 연애 찬송의 뜻을 가진 작품이다.

이 무렵 아버지께서는 또 작품 구상을 위해 틈만 나면 가족들을 데리고 여행을 떠나셨다. 주로 찾은 곳은 한반도 최북단의 동해 바다가 한눈에 펼쳐지는 독진 해변과 주을온천이 가까이 있는 나의 외가가 있는 함경북도 경성이었다. 아버지께서는 아름다운 경치를 지닌 독진 해변과 이국정취를 느낄 수 있는 시냇물이 내를 이루는 주을온천을 배경으로 많은 작품을 남기셨다.

가족들과 일요일이면 외식을 하며 단란한 시간을 보내고, 저녁이면 등나무 의자에 앉아 축음기에서 흘러나오는 모차르트의 아름다운 선율을 들으며 행복해 하던 그 시절 아버지의 모습은 연기처럼 영원히 사라졌다. 이제는 아름다운 추억만이 아버지의 사진과 함께 남아 있을 뿐이다. 일제 식민지 아래에서 아버지께서 품고 계셨던 사상을 전부 떨치지 못하고 일찍 돌아가신 것이 너무나 안타깝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