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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에게 들은 장인 이야기 - 나의 아버지 신석정

‘아버님 날 낳으시고 어머님 날 기르시니’의 지난 날 어버이에 대한 호칭에서 보면 아내의 아버지를 아버지라 이를 수 없다. 아내의 어버이를 일컫는 호칭은 장인․장모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장인․장모도 스스럼없이 아버님․어머님으로 부른다. 이를 탓할 생각은 없다. 오직 선석정(1907-1974) 선생과 나와는 장인 사위의 관계 ｢翁壻間옹서간｣임을 밝혀 두고자 한 앞사설일 뿐이다.

여기서는 빙부(聘父)의 호칭으로 이야기를 이어가고자 한다. 빙부로 뫼시게 된 것은 내 나이 스물네 살 때였다. 제때 빙부의 연세는 마흔 여덟이셨다. 나는 대학 4년에 재학 중이었고, 빙부는 『촛불』과 『슬픈 목가』로 명성 높은 시인이었다.

시작품으로써가 아니라 이 어른을 조석으로 뵙게 된 것은 맏사위가 되어서의 일이다. 때문에 빙부의 젊은 시절 이야기는 아내에게 들은 것일 뿐이다. 아내의 이름(신일림)은 혼례를 올리기 전부터 알고 있었다. 『촛불』에도 수록된 「푸른 침실」이란 시를 통해서였다.

일림아 / 촛불을 꺼라 / 소박한 정원에 강물처럼 흐르는 푸른 달빛을 / 어서 우리 침실로 맞어 와야지 / … / 일림아 / 너와 나는 푸른 침실의 작은배를 잡아타고 / 또 / 어디로 출발을 약속하여야겠느냐

아내는 때로 묵은 사진첩을 꺼내놓고 「푸른 침실」을 읊조리기도 한다. 사진첩에는 아내의 어린시절 사진도 몇 장 들어있다.

“이것은 아버지께서 찍어 주신 사진인데….”

넘겨다 보니, ‘1936. 3. 청구원에서’라고 기입한 빙부의 필적도 볼 수 있다.

청구원(靑丘園)이란 1920년대 말 빙부께서 제금나기 위하여 성조(成造)한 집의 당호요 서재명이기도 하다. 사진첩에는 이 서재에서 책을 보시는 빙부의 모습, 난초분․수선화분이 놓여있는 책상과 책장을 볼 수 있는 두 장의 빛바랜 사진도 담겨 있다.

개피새끼 흙탑을 쌓아 올리듯 / 작은 서가에 틈 없이 책을 쌓아놓고 / 마음이 호수처럼 가라앉는 날 / 한 권 두 권 내들고 읽는 한가한 날 / 때로는 서가가 드높은 산같이 보이기도 하고 / 나는 그 산을 천천히 오르기도 하고 / 곤륜산 보다 더 깊숙한 내 서가여 / 오늘은 난초향기가 그윽히 흐르는 듯하여…

서가(書架)>의 시도 이때(1936)에 쓰셨던 것이 아닌가 싶다. 이로부터 3년 후 『촛불』이 상재된 것이다. 편석촌 김기림은 이 시집의 독후평에서 ‘첫 시집 『촛불』이 씨의 10년간의 수확을 한 곳에 싣고 실로 너무 늦게야 나왔다. 시인은 겸손하게 『촛불』이라고 불렀으나, 그러나 그것은 분명히 우리 신시사의 최근 일편의 한 모를 휘황하게 밝히는 횃불’ (조선일보. 1939. 12. 25)이라고 말한 바 있다.

빙부의 젊은 시절의 모습 몇 가지를 아내의 이야기에서 간추려 보고자 한다. 먼저, 자녀들(8남매)에 대한 깊은 사랑을 들 수 있겠다. 집에는 언제나 옥도정기․붕대․반창고․정로환․녹일환 등 상비약이 갖추어 있었고, 자녀들뿐 아닌 마을 아이들의 작은 상처에도 빙장께서는 바로바로 손을 쓰셨다고 한다. 어렸을 때의 아내는 자기의 몸이 좀 아파서 아버지에게 응석을 부리고 싶은 마음이 일기도 하였다는 이야기다. ‘윤석중의 동요도 아버지로부터 배웠다’는 자랑이다.

빙부는 산을 좋아한 성품이셨던 것 같다. 아내는 또 자랑이다. ‘집에는 산행에 필요한 천막이 있었고, 아버지는 친구분들과 등산을 자주 하셨다’고 한다. 때로는 아버지를 따라 마을 뒷동산에 올라 서해바다를 바라보며 나무이름․꽃이름도 배워 익혔다는 이야기다. 빙부의 저 무렵 시에 「산으로 가는 마음」「산수도」「청산백문도」「등고(橙高)」 등 산이 많이 등장하고, 휘호에 도연명의 시구 ‘소무적속운 성본애구산(少無適俗韻性本愛邱山)’을 즐겨 쓰신 까닭을 헤아려 볼 수 있다.

아내는 빙부를 ‘원예사(園藝師)’로 비유하여 자랑하기도 한다. 청주원에는 은행나무, 호랑가시, 대나무도 있었고, 꽃철이면 화사하고 향기 짙은 철쭉, 영산홍, 태산목, 후박나무, 백합, 국화가 철을 잇는 아름다움이었으며, 나무 가지 사이엔 멥새가 앙증스러운 둥지를 틀기도 하였다는 것이다. 청구원의 정원은 나도 1954년 이곳 뜰에서 혼례를 올린 후, 그 아름다움에 직접 젖어볼 기회가 있었다.

특히, 일제말기의 빙부는 남새밭도 손수 가꾸어 철철의 채소는 자급자족이었다고 한다.

빙모(박소정)의 음식솜씨는 나도 때로 친구 간에 자랑한 바 있지만, 아내는 ‘아버지께서도 음식의 맛을 챙기셨다’는 이야기다. 카레라이스를 처음 먹어본 것도 아버지 덕이었고, 토알젓 담는 법을 배운 것도 아버지가 무척 귀히 알고 즐기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위가 되어 20년 세월을 지근(至近)에서 뵈온 빙부의 모습과 마음쓰심도 이 몇 가지에서 다른 바가 없었다. ‘사위도 반자식이라’란 말마따나, 빙부는 아들 딸에 다름없는 정으로 나를 챙겨주시고 일깨워 주셨다. 세상살이의 길에서도 그렇고 문학의 길에서도 그렇다.

한두 가지만 덧붙인다. 빙부는 내게 술자리뿐 아니라 담배까지도 허락하셨다. 그러나 담배만은 빙부 앞에서 끝내 피지 못하였다. 뫼시고 서울길의 어느 날(1960년대) 다방에서였다. 담배팔이 소년에게 양담배 두 갑을 구하여 한 갑을 내 찻잔 앞으로 밀어놓으신 일이 있었다.

또 하나는 병상에 계실 때(1974년 봄)의 일이다. 어눌하시자, 빙모께 무엇인가를 가져오라는 손짓이었다. 빙모는 목도리 하나를 가져 오셨다. ‘강은교 시인이 보내준 선물인데, 자네에게 주라는 말씀’이라고 하셨다. 빙부는 나를 향하여 ‘목에 목두리를 둘러보라’는 손짓이었다.

이제 돌이켜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사위로서의 구실을 제대로 하지 못하였던 아쉬움과 후회일 뿐이다. 이 또한 ‘풍수지탄’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