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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과 속의 경계에서 푸른 침묵으로 살다-나의 아버지 김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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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자주 집을 떠나셨습니다.
제가 대학을 다니던 1970년대 초 아버지는 당시 운허 스님이 주지로 계시던 광릉의 봉선사에 자주 가 계셨습니다. 저는 경동시장 앞에서 언니들과 버스를 타고 아버지를 뵈러 갔습니다. 예의 그 천진한 미소로 저희를 반기시면서 돌계단을 내려서며 고무신을 신으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그렇게 수척해보일 수가 없었습니다. 아버지와 봉선사 경내를 걸으면서 아버지께 집으로 돌아가자고 말씀드렸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으시고 저희를 보내셨습니다. 돌아오는 길, 멀리서 손을 흔드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허허로워 보였습니다. 버스를 타고 돌아오는 내내 아버지는 왜 가족을 떠나 저렇게 외롭고 고독하게 지내실까 하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습니다.
집에 돌아와 어머니에게 아버지가 건강이 좋지 않으신 것 같으니 빨리 집으로 모시고 오자고 했습니다. 어머니는 “너희 아버지는 집에 계실 때는 항상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 하시지만, 오래 못 계시고 돌아오신단다. 이번에도 오래지 않아 돌아오실 거다.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말씀하시는 목소리에 체념이 묻어났습니다.
제 기억에도 아버지는 속(俗)에 계실 때는 언제나 속을 떠나고 싶어 하셨고, 그렇게 속을 떠나셨다가 다시 속으로 돌아오시곤 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저는 아버지가 성(聖)과 속의 경계에 계셨던 분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문득 아버지의 시 한 편이 떠오릅니다.
그리는 세계 있기에
그 세계 위하여,
生의 나무의
뿌리로 살자.
넓게 굳세게,
또 깊게,
어둠의 고뇌 속을
파고들어,
모든 才氣와 賢明 앞에
하나 어리석은 침묵으로--
그 어느 劫外의 하늘 아래
찬란히 피어나는 꽃과,
익어가는 열매
멀리 바라보면서-- (「그리는 세계 있기에」)
아버지는 평생을 그리는 세계를 위하여 생의 나무의 뿌리로 살고자 하셨습니다. 아버지는 일생 재기를 멀리하시고 온갖 세속의 명리에 줄곧 침묵으로 답해오셨습니다. 어릴 적에 자주 어머니가 이를 푸념하시던 기억이 납니다. 저 역시 왜 아버지는 명예와 안락을 마다하시고 혼자서 고독하고 고고하게 살면서 가족을 불편하게 하실까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세속적으로 볼 때 어리석어 보였을 수도 있는 그 침묵이 진정 구도자의 삶의 자세였음을 깨달은 것은 오랜 시간이 지난 후였습니다.
아, 아버지, 당신은 청자기처럼 살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청자기, 청자기, 청자기처럼 살꺼나. 땅 속에 묻혀 있는 청자기처럼 살꺼나. 이슬 내린 아침 화원의 찬란한 영화는 모란이 받게 하라. 비 갠 가을 하늘 경쾌한 방랑은 흰 구름에 맡겨두라. 이름은 얻어 무엇하리, 이 위에 零을 보태지 말자. 기림은 좇아 무엇하리, 입솔 따라 오르나리는 하나의 장난감. 요설(饒舌)은 우치(愚痴), 진에(瞋恚)는 독사(毒蛇), 간탐(慳貪) 다시 일으키랴!
청자기처럼 살꺼나. 땅 속에 묻혀 있는 청자기처럼 살꺼나. 그 빛깔 그대로, 그 무늬 그대로. 내 운명 조용히 사랑하며 스스로 간직하고, 오로지 깊이 나를 지키어 청자기처럼 살꺼나.--영원히 푸른 ‘용렬慵劣’, 영원히 푸른 ‘침묵’. (「청자기(靑磁器)처럼」)
아버지, 올해로 당신이 이승에 오신 지 100년이 되었습니다.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여 많은 기념행사가 있었습니다. 새로 범우사에서 발간한『 씬냉이꽃(외)』에는「화과원 시」 등 그간 묻혀 있었던 12편의 시와 2편의 산문이 새로이 발굴되어 소개되기도 했습니다. 아버지를 비롯하여 이효석, 신석정, 박세영 선생님 등 탄생 100주년을 맞은 문학인을 기리는 기념문학제(2007년 5월 11일 서울 프레스센터 기자회견장에서 개최)를 성대하게 준비한 대산문화재단과 민족문학작가회의에 감사의 말씀을 올려야겠습니다. 그리고 작품을 새롭게 발굴하고 아버지의 문학세계를 연구하는 연구자들에게도 고맙다는 말씀을 전해야겠습니다. 아버지의 시집과 산문집을 새삼 펼쳐듭니다. 이미 제 나이 이전에 깨달음에 이르신 아버지를 뵙고 얼굴이 붉어집니다. 아마 아직도 제 삶의 뿌리를 제대로 찾지 못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평생 명성을 멀리하고, 자신을 지키고자 당신은 청자기처럼 영원히 푸른 ‘침묵’으로 살고자 하셨습니다.
제가 그리는 세계는 바로 당신이었습니다.
제 삶의 뿌리는 바로 당신이었던 것입니다.
이제 당신은 당신이 그리던 세계에서 그 어느 겁외의 하늘 아래 한 송이 꽃으로 찬란하게 피어오릅니다.
내 살은 대지.
내 피는 태양,
그리하여 내 생명은 바다의 대기. (「경건한 정열」)
대지와 태양과 바다의 푸른 대기를 떠돌며 당신은 저를 굽어보고 계십니다.
그리운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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