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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직자의 길 혹은 사랑의 길, 그 흔들림 - 스페인 사실주의의 정점 후안 발레라의 『페피타 히메네스』

스페인 사실주의 소설이 처음으로 우리나라 독자들에게 선을 보였다. 그것도 스페인 사실주의의 정점인 1874년에 나온 후안 발레라의 『페피타 히메네스』가 중견 번역가의 손에 의해 우리나라 말로 소개되었다.

스페인은 문학사조나 문학사에 있어서 유럽의 영국이나 프랑스, 독일과 사뭇 다른 길을 걸어왔다. 특히 19세기 동안 유럽의 낭만주의 정서가 고갈 되었을 때 스페인 낭만주의는 시작되었고 유럽 자연주의가 발흥할 때 스페인 사실주의가 완숙기에 들어갔다. 스페인 자연주의 존재는 미미한데 이 때 스페인 낭만주의 서정미의 진수를 보여주는 작품이 출간되었다.

이렇게 된 데는 스페인의 지형적, 보수적인 민족성 외에 더 큰 요인이 있다. 원래 낭만주의란 프랑스 혁명과 같은 혁명적 사고에 대한 가치나 이성에 대한 환멸, 그리고 혁명의 위기의식의 소산물인데 스페인에는 그러한 움직임이 없었다. 이후 사회 하층민과 도시 산업 노동자들의 문제 등과 같은 사회적, 정치적 갈등과 대립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스페인 사실주의 작가들은 사회와 인간 개개인을 심각하게 보지 않았다. 세상과 인간에 대해 회의적이지 않고 무척 종교적이며 삶과 화해할 수가 있어 유럽 어느 나라 작가보다 덜 염세적이었다. 그래서 작품에는 자기 주변의 세계나 사회의 존재 형태를 용납하거나 전혀 혁명적이지 않는 개혁에 대한 낙관적인 감각이 지배적이다. 시골을 무대로 한 작품은 한 폭의 수채화 속에 그 지역의 민속과 풍습을 담아 낸 듯하고 도시를 무대로 한 경우는 세세한 필치로 중산층 사람들의 스캔들이나 간통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스페인 사실주의 소설에는 이러한 풍속. 관습소설 외에도 논제 소설이라는 것도 있다. 이것은 작가가 보여주고자 하는 논제, 즉 정치적, 도덕적, 심리적 또는 종교적 이상을, 지역의 자연과 풍습 묘사와 함께 인물들의 감정 분석을 통하여 전하고자 한다.

바로 이 논제 소설이 후안 발레라에서 확실하게 구축되었다. 주관적인 관점에서 인물들의 감정을 심리 분석하듯 하는 것이 그의 소설의 특징인데 분위기나 주제가 낭만주의에 더 가까워보인다. 그가 낭만주의 시대에 교육을 받았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페피타 히메네스』는 이상화된 목가라 해도 과언이 아닐 듯싶다. 이 소설에는 추한 것이나 유쾌하지 못한 현실은 배제되고 없다. 신을 섬기기로 작정한 사람이 사랑의 열정에 사로잡혀 겪는 갈등과 고뇌, 여인에 대한 묘사가 세련되고도 우아하기 그지없다. 여인의 이는 진주요, 희고 가는 손등에 보이는 파란 실핏줄은 사파이어이다. 17세기 바로크 시대 대시인 공고라의 사랑의 시가 겹쳐지고 이후 20세기 모더니즘의 대가인 루벤 다리오의 초기시를 읽는다는 착각에 빠져드는 건 작가의 예술 지상주의 경향 때문일 것이다.

『페피타 히메네스』의 내용은 이렇다. 12년 동안 대성당 주임 신부인 숙부 밑에서 사제가 되기 위한 교육만을 받다가 사제 서품을 앞두고 잠시 안달루시아 고향을 찾은 주인공 돈 루이스는 그곳에서 페피타 히메네스라는 두 살 연하의 미망인의 아름다움과 선행에 대한 찬사만을 듣게 된다. 사랑은 눈으로부터 난다고 그는 그녀를 본 순간 자신도 모르는 사이 커져만 가는 걷잡을 수 없는 사랑의 감정으로 자신의 종교적 신념이 크게 흔들림에 번민한다. 그런데 페피타 히메네스는 주인공의 55세 아버지가 재혼 상대로 마음에 두고 있던 여인이다.

이러한 줄거리를 3부로 나누어 독서의 긴장과 재미를 더하고 있다. 1 부는 주인공이 자신의 숙부이자 대성당 주임 신부에게 보내는 편지글이다. 주인공의 번민과 갈등이 점차 커지고 강해지는 것을 보여주는 내용인지라 사랑의 결말이 무척 궁금해진다. 그래서 2부는 작가의 입을 빌려 주인공이 숙부에게 밝힌 사랑의 이야기 외에 숨겨진 이야기를 실었다. 돈 루이스가 숙부에게 마지막 편지를 쓴 닷새 뒤부터 이 이야기는 시작된다. 마지막 3부는 에필로그 스타일로 주인공의 아버지가 자신의 형인 대성당 주임 신부에게 주인공의 결혼식 이후 4년 동안 보낸 편지들에서 발췌하여 실었다. 이 부분에 작가는 자신의 메시지를 숨겨 놓았다.

외국 문학을 전공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방학이면 보통 학기 중에 읽지 못했던 책들을 옆에 끼고 산다고 한다. 우리 문단의 모습을 알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문장력 향상을 위한 이유도 있다는데 나도 예외는 아니다. 전공이 전공이다 보니 학기 내내 원서만 읽다가 우리말로 글을 쓸라치면 번역 투의 문장이 절로 나온다. 수식 형용사의 명사화나 서술형용사의 수식 및 조사의 사용에서 특히 그렇다. 어떤 때는 그런 표현이 이상한 지도 모르고 넘어가는 경우도 많다. 이런 이유로 번역서를 읽으면 문장상의 문법적 오류를 찾는 데에 혈안이 된다.

그리고 번역가라면 누구나 번역을 할 때 갈등하는 부분이 있다고 본다. 가독성을 높이기 위하여 가급적 주석을 달지 않는 게 좋은 것인지, 아니면 원저자의 문체며 문화적 배경을 이해시키는데도 신경을 써야하는 것인지가 그것이다. 어떻게 번역을 해야 하는 가에 대한 이론은 번역서 수만큼이나 다양하다. 결론은 번역가 마음이다 싶다. 물론 독자의 선택도 독자 자신의 기호에 달렸다. 따뜻한 밥 먹고 무슨 소리냐 싶겠지만 번역가들은 보통 자신들의 철칙에 따라 번역한다. 나의 스타일은 후자이다. 내가 원저의 독특한 특징을 무시하거나 또는 원저의 문화적 배경을 알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모르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주석을 챙기지 않고 그저 독자들이 쉽게 읽을 수 있게 의역 위주의 번역을 하면 왠지 작가에게 죄를 짓는 기분이 든다. 그래서 내 번역서에는 해설이 더 많은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일반 독자들은 재미있게 줄거리를 즐기면 그만이지 웬 문화 사치며 작가의 문체적 매력의 호사까지 바라겠냐고 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점들을 최대한 살리면서 가독성도 높이면 되지 않겠는가?

다행히도 바로 이 번역서가 그러하다. 그런데 이 작품에는 주석이 하나도 없다. 언급된 정보 중에 일반 상식을 넘어서는 것도 있지만 그것에 대한 이해가 없이도 작품 감상에 어려움이 없게 하는 것이 역자의 재능이다. 오히려 한 순간도 책을 손에서 떼지 못하고 내리 읽을 수 있게 하는 흡인력이 놀랍다. 작가의 세련되고 세세하면서도 민첩한 주인공들의 심리분석이 번역자의 손을 거치면서 더 은밀해진다는 느낌이 들 정도이다. 나의 친절한 철칙이 무너지면서 내 갈등을 다시 발동시키는 대목이다. 특히 역자의 가톨릭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눈부시다. 그 방면 역자의 많은 연구물들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 좀 더 시간적 여유가 있었더라면 서너 군데의 번역문 투와 ‘해설’에서 번역자가 잠깐 하느님을 만나고 오느라 놓친 부분을 손 볼 수 있었을 텐데. 옥에 티이다.

※ 『페피타 히메네스』는 재단의 외국문학 번역지원을 받아 문학과지성사에서 대산세계문학총서 60권으로 발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