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재단 - 21세기 문학의 창 -

웹진 대산문화

자연에서 길을 묻다
천양희 시인과의 만남

▲ 천양희 시인

천양희_시인. 1942년생
시집『마음의 수수밭』『오래된 골목』『너무 많은 입』『나는 가끔 우두커니가 된다』, 산문집『직소포에 들다』『시의 숲을 거닐다』등

기차를 타고 떠나고 싶은 계절이다. 길을 잃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기차는 영원한 디아스포라, 정처가 없다”(｢기차를 기다리며｣). 그런데 제 길을 잘 찾아 초가을 오후 학림다방으로 간다. 학림다방(學林茶房)이라는 옛 이름이 정겹다. 그곳에 가을을 닮은 시인이 이제 막 도착할 것이다. “지나간 기차가 나를 깨우”듯이 그는 나를 다른 세계로 데려갈 것이다. 뜨거운 선로가 서서히 식어가듯 우리들의 차 한 잔도 그렇겠지. 그런데 학림다방은 만원이었다. 그곳을 나와 골목길에 접어들었다. 조그만 정원이 있는 카페가 나왔다. 카페의 빨간 창문에 초가을 햇살이 들었다. 한 줌 햇살이 시인의 얼굴에 어른거렸다.

이근화: 천양희 선생님, 안녕하세요.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연초에 발간된 시집을 읽으며 서늘한 봄을 보냈더랬습니다. 최근 만해문학상 수상 소식도 접하게 되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근황을 듣고 싶습니다.

천양희: 몸이 좀 아팠어요. 아프기 전에는 가을이 온다 싶어서 두근거렸는데, 꼭 한 번씩 아프고 그러네. 가을처럼 아름답고 싶은데……. 나이 들어서 늙는 게 아니라 이상을 잃어서 늙어가는 것이고, 세월의 흐름은 피부의 주름살을 늘리지만 정열의 상실은 영혼의 주름살을 늘린다는 구절을 좋아해요. 시든 삶이든 열정이 없으면 안 되잖아요.

이근화: 선생님께서 이상과 열정을 말씀하시니 한 시대를 뜨겁게 살다간 에디트 피아프의 노래가 흘러나오네요. 선생님과 잘 어울리는 노래인 것 같습니다.

천양희: 에디트 피아프도 가난하고 힘겹게 살다간 사람이야. 그러니 저런 노래가 나오지요. 나는 심심한 것은 싫어요. 이것도 저것도 아닌 삶은 싫어. 둥글둥글한 것보다 모난 게 더 낫다고. 오히려 두루뭉술한 사람한테 치받치지. 내 시에도 모서리 없는 것이 무섭다고 썼어요.

이근화: 가수도 시인도 뾰족하고 예민한 존재들이죠. 그들에게는 마르지 않는 열정과 이상이 요구되는 것 같습니다. 여러 권의 시집을 상자하셨어요. 일곱 권입니다. 오랜 세월 시와 만나면서 문학적 전환점 같은 게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길은 모를수록 새롭고 새 길은 새로워서 낯설다”(｢길을 찾아서 4｣)고 하셨어요. 새로운 길에 접어들거나 익숙한 길의 모퉁이를 새로운 기분으로 돌거나 하는 일들이 있을 것 같아요.

천양희: 대학 3학년 때 등단했는데 그것도 과작이죠. 한참 못썼어요. 내가 문학적 전환점을 갖게 된 것이라……. 내 생활이 참 힘들었고, 나는 계속 길을 떠났어요. 세 번째 시집까지는 내가 좀 내 안에 갇혔던 것 같아. 그런데 네 번째 시집 「마음의 수수밭」이 나오면서 전환점이 되었어요. 길을 통해 삶을 쓰고, 길은 나에게 삶을 보여주는 또 다른 방식이라고 할 수 있어. 죽으려고 직소폭포에 갔다가 살아 돌아오고 그랬어요. 죽을 만큼 살지 못했으니까 살아야겠다 하면서 내 시에도 변화가 오더라고. 그 전에도 길을 찾아 떠나며 나를 단련시키고 그랬어요. 내 삶의 변화도 그 때 찾아오고요.

이근화: 「마음의 수수밭」은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은 시집이에요. 내 마음 지금 수수밭이야, 라고 빗대어 말한 적도 있어요.

천양희: 그 수수밭이. 그러니까 내가 시골 출신이고 우리 집이 지주였는데, 농장, 과수원, 수수밭이 있었어요. 어릴 때 수수밭을 봤지. 그러니까 몇 십 년 전에 보고 못 보다가 사십 여년 만에 강원도 춘천 어디에서 수수밭을 봤어요. 그날따라 바람이 많아서 수수가 흔들렸어. 수수밭 고랑에 앉아 울었어요. 그러고 나니 눈앞이 환해지면서 깨달음이 오더라고. 이제 서울로 돌아가야겠다 하고 돌아와서 팔 년 만에 쓴 것이 ｢마음의 수수밭｣이에요. 변산반도에 직소폭포가 있는데 그 폭포가 또 나를 살렸어. 임금에게 신하가 직소하는 모양을 닮아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신문에 났는데, 1979년 여름 그 신문 한 장 들고 찾아갔어요. 그 때는 아무도 그 폭포에 가는 사람이 없었어요. 내소사를 지나 삼십분 쯤 가니까 물소리가 들려. 보통 폭포가 길 중간에 사선으로 떨어지는데 직소는 길이 끝나는 지점에서 떨어져요. 바위에 몇 시간을 앉아 폭포처럼 울었어. 그 때 네가 죽을 만큼 살았느냐는 말이 들리더라고. 나는 왜 죽으려고 하는가 다시 물으며 폭포소리를 가슴에 안고 돌아와서 십삼 년 만에 완성했어. 그렇게 얻어진 시에요. 그래서 그 두 편을 나의 대표 시로 생각해요.

이근화: 선생님의 시는 삶의 고통으로부터 나오는 것 같아요. 최근 시집의 해설에 “시와 삶을 구분하지 않기 때문에 삶에 대한 사유는 늘 시에 대한 성찰로 이어진다”(이숭원)는 구절이 있습니다. 시와 삶 사이에 선생님께서 놓으신 ‘다리’는 매우 가깝고 직선적입니다. ‘시적인 삶’(｢시인은 시적으로 지상에 산다｣)에 대해서도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일상적 자아를 시 쓰기에서 배제하는 시인들과는 좀 다른 것 같습니다.

천양희: 일상과 시가 하나인 것은 나만의 특징이지요. 내 삶은 시에 바쳐져 있어요. 생계를 해결하고 가족을 책임지려고 하면 삶을 시에 바치기가 힘들지요. 시와 삶을 같이 하기 사실 힘들어요.

이근화: ｢무서운 시간｣ 같은 작품을 보면, 선생님께서는 선조적 시간으로부터 자유로우신 것 같습니다. 시간의 속성이나 그 성질을 끄집어내서 훤히 들여다보신다고 할까요? 일상적인 평범한 시간 위에서 ‘봄밤’처럼 무서운 시간을 대면하는 일이 시인의 일이겠지요? 저 역시 문득, 나는 시인의 시간을 살고 있는가, 이대로 좋은가 자문할 때가 있어요. ‘시인의 시간’이란 어떻게 다를까요?

천양희: 나만의 시간이 다른 사람에 비해 많아요. 시간이 많다고 해서 시간을 잘 쓰는 건 아니지만. 시간에서 자유롭지 않으면 시간은 없는 거예요. 나는 혼자 밤에 잘 나가는데, 공원에 나가면 바람소리며, 달빛이며, 쓰르라미 풀벌레도 울고 그러는데 그것을 내 안에, 품에 안아요. 계절의 일과처럼 나는 그것들과 접신하듯 만나요. 그들과 하나 되어 교감하는 시간을 가져요. 내가 산을 좋아하고, 꽃도 좋아해요. 얼마 전에 산에 갔는데, 수쿠렁, 달개비 같은 계절에 피는 꽃을 보면, 꽃도 계절마다 다 달라요. 그것들과 마주하는 것이 나만의 독특한 시간인 것 같아요. 나를 반기는 꽃, 웃는 꽃과 말도 하고 그러지요. 그래서 ｢자연을 위한 헌사｣라는 시도 쓸 수 있었어요.

이근화: 선생님께는 자연과 교감하는 특별한 능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선생님의 시는 숲과 나무, 바람과 새, 강물과 구름과 함께 합니다. 선생님께서 자연에 달아주신 ‘입술’이 매력적입니다(｢너무 많은 입｣).

천양희: 내 시에서 새, 바람, 구름 같이 가벼운 것들이 많이 나오는데, 내가 삶이 무거워서 그들처럼 가벼웠으면 하는 열망이 담겨 있어요. 그런데 그렇지 못하니까 그들과 시에서 함께 놀아요.

이근화: 젊은 세대들은 ‘자연’을 거의 보지 않는 것 같습니다. 가상공간으로서 미디어에 익숙하고, 도시 생활을 하면서 인공 공간에 더 많이 노출되어 있습니다. 자연에서 자기 자신을 들여다 볼 수 없는 것이 하나의 특성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세대들로부터 선생님의 (먼)거리가 감지될 때 어떤 느낌이 드시는지요. ‘자연’이 빠진 세대들의 시를 어떻게 읽고 계신지요?

천양희: 그들한테 자연이 없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이 자연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겠지요. 그들에게도 슬픔과 비애가 있더라고. 그런데 그들에게 미래가 없는 거 같아. 단지 아쉬운 것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배제하다 보면 감동이 없는 거 같아요. 자연친화적인 미래가 필요해. 그게 걱정이긴 해도, 젊은 시인들의 작품을 보면 때론 놀랄 때도 있어요. 내가 보지 못한 걸로 시를 쓰더라고. 서정시의 자연친화적인 전통을 무시하지 말고 수용하면서 다른 길을 모색하는 것이 필요한 거 같아요. 전통을 수용하면서도 넘어서는 이중전략이라고 할까, 시대관과 자연관이 달라도 전통을 무시해서는 안 되지요. 법고창신(法古創新)은 연암 박지원의 말이지만 말이에요.

이근화: 귀중한 조언 감사합니다. 우리 문단은 ‘젊음’ 혹은 ‘새로움’에 대한 콤플렉스를 여전히 가지고 있는 것 같아요. 그것이 문학의 생존 법칙이기 때문일까요. 원숙함이나 느긋함을 견디어내는 힘이 적은 것 같습니다. 또 그게 아니라면 양극화 되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빠른 세대교체는 비단 문학 분야에서만 일어나는 일은 아니지만, 시간을 견디는 문학의 고유한 방식을 생각해본다면 비문학적 태도인 것 같습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젊음의 양식으로서의 문학, 혹은 문학하기의 새로움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천양희: 시 쓰면 갇히기 쉬운데 우리야말로 새로워져야 해요. 특히 나를 포함해 나이든 시인들이 새로워져야 할 것 같아요. 낡아지면 안 돼요. 나이든 세대부터 먼저 반성해야지요. 그러고 나서 젊은이들에게 새로운 것이 무엇인가, 새로움의 진정한 가치는 어디 있는가 물어야 해요. 새로움이란 ‘아름다움’이잖아요. 시 쓰는 데 반드시 새로움이 필요하다고 봐요. 시 쓰는 데는 늙음과 젊음의 구분이 없잖아요. 늙었다고 늙은 시를 쓰는 것이 아니고, 젊다고 젊은 시를 쓰는 것도 아닌 것 같아. 우리가 함께 뚫고 가야할 ‘벽’이지요.

이근화: 선생님 말씀대로 ‘벽’을 대면하는 고통스런 시간으로부터 나오는 ‘아름다움’은 새로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선생님 시에는 젊은 언어 감각이 있습니다. 말의 재미를 삶의 의미로 전환시키는 위트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또 일련의 시편들은 시론으로 읽힙니다. 시로 쓰는 시론이라고 할까요. 적절한 표현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가벼움과 무거움을 오가는 것, 아니 가벼움과 무거움을 무화시키는 지점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 사이를 오가는 자유로운 운동성, 유연함이 선생님 시의 특성인 것 같습니다만…….

천양희: 내가 무겁게 살아서 그렇지. 내 성격은 본래 그렇지 않아요. 대학시절까지는 고생 모르고 자랐어요. 칠남매 막내로 태어났는데 유머 감각도 있었고, 경남 여중 다닐 때는 교단에 올라가서 선생님 흉내도 내고 그랬어. 명랑했는데 시 쓰면서 무겁고 염세적으로 갔던 거 같아요. 내 본연의 모습도 가슴 속 깊이 있는데 무거운 쪽으로 기울고 옮아가더라고요. 너무 힘들게 살아서 내가 가진 자존심이 그 무거움 때문에 굉장히 많이 상했어요. 내 자신 탓도 있었고 외부 탓도 있었어요. 나는 진정으로 했는데 상대방이 그렇지 않을 때 공허했지요. 하늘에는 아무것도 없구나 생각했지요. 하늘이 내게 아무것도 내려주지 않았나 했는데 그건 아닌 것 같고. 마음의 상처를 없애려 하고, 무거움에서 가벼움으로 가려고 노력하고 그랬어요. 가벼움도 모르는 무거움은 안 될 거 같아요. 반면에 자연으로 돌아가면 나는 가벼워져요. 자연 속에서 나는 무가 되는 것 같아요. 니체가 나무의 그늘이 무라고 했는데, 나비를 보고 아이를 보고 하면 그렇게 가벼울 수 없어.

이근화 시인

이근화: 새, 구름, 바람의 가볍고 자유로운 영혼에 대해 이미 말씀 하셨지만, 말의 재미나 위트를 추구하는 면도 선생님께서 자유롭고 가벼운 상태를 지향하는 일면으로 이해할 수 있겠네요. 선생님 안에 숨어 있는 활달함, 명랑함도 조명 받아야 할 것 같아요.

“무엇에 대해 말하고 싶었으나 말할 수 없어 말없이 걸었다”(｢2월은 홀로 걷는 달｣)라는 구절을 읽고 반가웠어요. 목적 없이 걷는 것이 제 취미인데, 그럴 때 “헤맨다고 다 방황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걸으면서 새로운 에너지와 활력을 느낄 때도 있고, 말없는 위로와 위안을 얻을 때도 있어요. 혼자 걷고 있노라면, 관계로부터 끊어져 나간다는 해방감이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요. 몇 시간 후에는 되돌아올 수밖에 없지만요. 시인들의 주소는 “집이 아니라 길”이라는 생각도 들고요 선생님은 어떠신가요? 특별한 취미나 특기를 가지고 있으신지요? 자유와 해방감을 느끼는 탈출구 같은 걸 마련해두셨는지요?

천양희: 여행이 나에게 탈출구예요. 그런데 떠나기 어려울 때가 많아요. 혼자 살다보면 일이 생기고 생활도 책임져야 하고. 현실적인 생활의 어려움이 나를 옥죄일 때가 많은데, 마음은 언제나 여행 중이야. 마음은 계속 떠돌지. 떠도는 마음을 가지고 있을 때 나는 혼자라도 웃고 있어요. 자유로울 때 자기를 찾거든. 그리고 멍하니 앉아 있는 것, 명상하는 것, 산책하는 것, 그게 나의 일과이자 탈출구야. 책도 많이 보지만 예전에는 운동을 잘했어요. 장거리 선수, 뜀틀, 수영 같은 것. 학생 때는 그랬고 그 이후에는 이십는 년 간 등산을 했지요. 그런 점에서는 활동적이고 자유롭지. 주섬주섬 챙겨 입고 배낭 메고 떠나는 거지. 예전에는 동대문에 버스가 있어서 언제라도 편승해서 떠나고는 했어요. 산을 굉장히 좋아하고 많이 갔지. 거기서 나무, 물, 새소리 그런 게 나를 살려줬어요. 중독되다시피 해서 산에 안 가면 오히려 몸살이 날 정도로. 지금은 건강 때문에 못 가니 몸도 더 나빠지고 그립기만 하지. 마음먹기 힘들지만 떠나면 기분 좋고 상쾌해요.

이근화: 저도 부지런히 떠나겠습니다. 시인이라는 존재는, 바람이 불면 바람 속에 쉬는 발 없는 새처럼, “바람이 왜 불지?” 묻는 새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발 없는 새｣). 다른 꽃밭을 꿈꾸며 둥근 꽃씨를 옮기는 꽃(｢숨은 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시인의 존재감을 잘 말해주는 구절입니다. 최근 시집 제목이기도 하지만, 다른 시에서도 발견되는 구절 “가끔 우두커니가 되”는 이들이 시인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이 구절에 애착을 갖고 계신 것 같아요.

▲천양희 시인

천양희: 애착이 있어요. 쌀을 씻다가도 우두커니 있게 되고, 어디 가다가도 우두커니 있어서 오해를 받기도 해요. 작년인가 산에 가다가 내가 어디 가는지 모른 채 멍하니 우두커니 서 있었나 봐요. 그래서 어느 아주머니가 “편찮으세요, 괜찮아요?” 묻더라고. 내가 그렇게 우두커니 하는 상태를 즐기나 봐요. 나는 더 이상 어디로 가지 않아도 되는구나, 하는 안정감 같은 것이라고 해야 할까. 끊임없이 노력하며 살아야 해서 이게 언제 끝나지 했으니까요. 이제 우두커니 있어도 되고 그럴 때가 행복해요. 멍하니 있을 때.

이근화: 멍하니 뚝 떨어져나간 상태, 휴지의 시간 같은 것인가 봐요. 저도 모든 것이 멈추고 나라는 존재가 순간 정지한 느낌이 들 때가 있어요. 모든 관계가 끊어진 채로.

천양희: 내가 한때는 “쉬면 녹슨다”는, 어느 유명 디자이너의 말을 기둥처럼 붙잡고 있었어요. 쉬면 녹슬까봐. 그런데 너무 그러니까 힘들어서 몸이 녹슬더라고. 지금은 거기서 놓여나고 있어. 그래도 쉬면 안 될 거 같아요. 정신이 녹슬면 안 되지. 몸이 아프면 산책도, 운동도, 글도 못쓰고 그래서 불행하지요. 시를 쓰지 않으면 의미를 찾지 못해. 살아 있는 이유를 찾지 못할 때 시를 쓰라는 릴케의 말을 내 말처럼 하고는 해요. 아돌프 멘첼이라는 유명화가에게 한 젊은 화가가 찾아와서는 그림으로 성공하고 싶다고 그랬대. 이삼 일 만에 한 폭씩 그리는데 팔리는 것은 이삼 년에 한 폭씩 팔린다고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했대. 그래서 아돌프 멘첼이 그렇게 말했다는군. “이삼 년에 걸쳐 한 폭씩 그려보게. 그럼 이삼 일 만에 그림이 팔릴 것이니.”(웃음) 요즘은 젊은이들이 너무 성미가 급한 거 같아. 빨리 유명해지려고. 글 쓰는 게 흥부의 다산 전략도 아니고, 잡초 전략도 아니고 좀 천천히, 높이, 오래 해야 하는데 빨리빨리 올라가려는 것 같아요. 방패연 같아야 하는데 가오리연 같아. 그런 면은 젊은이들이 좀 조심해야 할 거 같아요.

이근화: 젊은 시인들에게 조언의 말씀 부탁드리려고 했는데, 앞서 해주셨네요. 내 안의 타자와 대면하기 위해서는 용기와 절제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선생님의 시에는 재밌고 조용한 대화들이 많습니다. 자신과 나누는 부지런한 대화를 오래 이어가시는 선생님의 시 쓰기 작업이야말로 젊은 시인들이 귀감으로 삼아야 할 부분인 것 같습니다. 귀중한 말씀 감사합니다. 천천히, 높이, 오래하라는 말씀 새겨듣겠습니다.

“세상에는 베이는 일들이 너무 많”습니다(｢풀 베는 날｣). “세상에는 풀보다 더 시퍼런 칼날이 있”어 “풀 베듯 베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사람들｣). 시인으로서도 시민으로서도 그렇습니다. 근래 이 세계에 대한 선생님의 심경은 어떠신지요. 최근에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는 사건이 있으신지요.

천양희: 희망버스는 해결될 거 같지요? 김진숙 씨 내려오면 어떻게 해준다는 것 같지요. 상태가 그렇게 나빠지기 전에 우리 기업가들이 모심으로, 김지하 선생이 말했던 것처럼 어머니의 마음을 회복했으면 좋겠어. 그런 사태가 없어야 하는데, 꼭 일이 벌어지고 난 후에 사태 수습하려고 하니까 말이에요. 쓸모없으면 버려지는 것이 자본주의 원리지만 사람에게 그래서는 안 되지. 모심을 회복해야 할 것 같아요. 서울 시장 선거에서 보았듯이, 정치판이 너무 양극화되어 있어 걱정이야. 보수주의자는 너무 노회하고 갇혀 있고, 참여연대나 시민단체 들은 상대방을 비판만하고 자기들뿐이라 하고. 상생하는 방법은 없을까? 마음속에 늘 걸리는 것이 함께 살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하는 것이에요. 그런데 지금 상황에서는 투표해야 하나 어려워. 반대는 반대만 낳고, 서로 밀어내고 하는 정치판, 기업판에서 상처받는 것은 우리 서민들뿐이야. 정부도 국민의 의사를 좀 더 존중하고, 기업가도 모심을 회복해서 서민을 위해야 하고. 가진 사람들은 상처받지 않는 것 같아. 교묘하게 비자금이나 숨기고. 존경할만한 전직 대통령을 갖는 것이 내 꿈이야. 그러면 행복할 거 같아요. 그리고 또 한 사람 한 사람이 올바로 살아야 좋아지지 않겠어요? 남들 욕만 하고 개인이 달라지지 않으니까 나빠지는 거예요. 그럼 소용없어요.

이근화: 시인들도 정치적 입장을 표명하는 목소리를 내는 일이 활발해졌어요. 시의 언어로 할 일과 발 딛고 사는 이 세계에서 몸을 움직여 할 수 있는 일에 모두 책임감을 가져야 할 것 같습니다. 선생님 시 중에 “이제 다시는 아무 곳에나 내 이름을 적지 않을 것입니다”(｢뒷산｣)라는 구절이 인상적이었어요. 슬픔과 고독으로부터 결연한 의지와 책임감에 이르는 자기 성찰의 자세 같은 것 말이에요. 우리가 갈 수 없는 ‘별’(｢옷깃을 여미다｣)이란 어떤 세계일까요? ‘물 같이’ 산다는 건 어떤 것일까요? 풀어서 설명 부탁드립니다.

천양희: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말인데, 그 말을 빌려 연작을 몇 편 썼어요. 상처받았을 때 물가를 자주 찾아갔지. 물은 거슬러 올라가지 않잖아요. 아래로 낮게 흐르지요. 물은 하심하며 내려가잖아요. 아래로 아래로 흐르는 물을 배워야겠다 생각하고 있었지요. 그런데 주천강이 있어요. 왕방연이 단종을 청양포에 유배 보내놓고 돌아오면서 주천강에 앉아서,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 님 여의었고 내 안 둘 때 없어 물가에 앉았으니 내 마음도 저와 같아”라고 읊은 왕방현의 시조가 있어요. 거기에 내가 앉았는데 너무 놀랐어요. 물이 거슬러 올라가지 않는 법인데 주천강은 거슬러 올라가는 거야. 그 때 내가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몰라요. 세조가 단종을 결국 죽였잖아요. 잘못된 거잖아. 물이 노해서 거슬러 올라가는 게 아닌가 싶어. 요즘 정치꾼들이 가서 좀 봤으면 좋겠어요. 물은 다투지 않고 흐르는데 사람은 늘 다투잖아. 물 같이 살고 싶은데 그렇게 하기 어렵구나, 그런 생각들을 하게 되었어요.

이근화: 저도 언제 한 번 꼭 가봐야겠어요. 거슬러가는 주천강 물길을 보고 싶습니다. “나는 꿈을 가지지 않기로 합니다 날마다 골목이 나를 불러 꿈을 주고 세상 구석까지 따라가게 합니다”(｢외동, 외등｣)의 구절이 아프게 다가왔습니다. ‘길’은 선생님의 시에서 아주 중요한 메타포인 것 같습니다. 골목, 물길, 도로, 여행길 위에서 선생님의 시들은 탄생합니다. 그 길들을 저주하기도 사랑하기도 하고, 고통과 위안을 동시에 주는 것이 길인 것도 같습니다. 우리가 가는 길이, 어느 하나 속 시원히 해명되지 않으니 앞으로도 그 길 위에서 계속 시를 적으시리라 믿습니다.
그런데 선생님 계속 메모를 하시나 봐요? 선생님의 메모장이 궁금합니다.

천양희: 내가 메모광이에요. 이십년 전부터. 어느 날 책을 보는데 이하라는 당나라 시인이 아침에 나귀를 타고 집을 나서면서 나귀 옆구리에 비단 주머니를 걸어 놓고, 길 가다 시상이 떠오르면 써서 거기에 넣고 그랬대요. 집에 와서 손을 씻고 그걸 정리해서 새 주머니에 넣었다는데 그 때부터 메모를 하기 시작했어요. 나도 원래 손 씻고 글을 쓰는데 그 이야기가 굉장히 감동적이었어요. 메모란 아주 중요한 것 같아요. 몇 년 전에 지하철을 타러 가는데 전동차에 발을 올리는 순간 뭔가 떠올라서 쭈뼛거리니까 뒤에서 욕을 하더라고. 그래도 그 자리에 서서 썼다니까요. 계단 오르내릴 때도 마찬가지에요. 메모를 하지 않으면 달아나잖아요. 그러고 나서 퇴고하는 거지. ｢그믐달｣이라는 시는 삼십 분 만에 쓸 수 있었는데, ‘어머니’는 포도주 향기처럼 마음 속 깊이 있어서 삼십 분 만에 썼지만 대개는 메모하고 고치고 그러지. 당나라 시인 가도가 “새는 연못가 나무 위에 자고 스님은 달 아래 문을 민다”라는 즉흥시를 읊으니까, 옆에서 듣던 한유 시인이 ‘밀 퇴(推)’보다 ‘두드릴 고(敲)’가 낫다고 해서 ‘퇴고’라는 말이 생겼다잖아요. 아참, 내가 메모하는 이 나무펜은 번역원에서 보내주는 스웨덴 창작 연수 가서 호텔에서 들고 온 거예요. 남의 것에 손대는 것이라 망설였는데, 예뻐서 가져가고 싶다고 하니 다 가져가도 된다고 하더라고. 근데 딱 하나 가져왔어요. 늘 이걸로 메모하고 집에 가서 손 씻고 글을 쓰고 퇴고하고 그래요.

그래도 요즘은 내가 복을 받나 봐요. 한 때는 불행해서 생을 마감할까도 싶었는데 말이에요. 이제는 내가 시인으로서 다른 사람한테 베풀 게 없나 생각해보는데, 좋은 시 쓰는 것 말고는 없더라고요. 아주 옛날에 시골에 갔을 때 돈 천원이 없어서 병원을 못 가는 사람들을 보고 시인으로서는 내가 할 게 없구나 생각했어요. 배고픈 사람들한테는 밥을 줘야하는데 그 때 시인으로서 갈등을 느꼈어요. 얼마 전에 시 축제에서 만난 인디 밴드 여가수가 자신도 어려운데 아프리카 아이들을 도우며 산대요. 그 말을 듣고 부끄럽더라고. 여기저기 아파서 나 말고는 신경을 못 쓰고 살았는데, 이제 도우며 살고 싶어요.

이근화: 진흙을 구워 빵 대신 먹는 인도의 아이들이 생각납니다. 대도시에서의 삶이 그렇습니다. 많은 것을 외면하고 자신을 낭비하며 살아가니까요. 생활인으로서도 반성을 해야 할 것 같네요. 귀중한 말씀 감사합니다. 선생님 건강하십시오.

카페의 빨간 창문으로 들어오던 햇살이 조금 더 빗겨 있었다. 조그만 정원에 이름을 알 수 없는 꽃들이 아름다운 초가을이었다. 나는 아직 어리고 미숙해서 “제 키를 그늘로 낮춘 나무를 보”지 못한다(｢나의 처소｣). “끊어진 것은 끊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납득하지 못한다. “얼마나 더 우두커니 서 있”어야 하는지 묻고 싶었지만 나의 그런 질문들이 어리석은 것 같고, 묻는다면 함께 목 놓아 우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렇게 우리의 처소는 ‘아직’ 없어서 조금 웃고 돌아왔다. 따뜻하고 아늑한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