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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카뮈를 생각한다

인간의 얼굴을 한 문명을 찾아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올 한 해의 세계적 화두로 기록될만한 단어는 단연 재스민이었다. 정작 재스민의 나라인 중국은 마뜩해 하지 않겠지만……. 아랍 세계의 거의 전역에 불어 닥친 재스민 혁명의 열풍은 그 발화점인 튀니지에서는 물론 수십 년간 절대 권력을 휘둘렀던 이집트의 무바라크 정권에 이어 기어이 카다피 정권까지 무너뜨리고 말았다. 그러고도 그 열풍의 토네이도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그러나 펄펄 끓는 물에서보다는 약간 식은 물에서 더 은은한 향을 풍기는 재스민 본래의 성질에 좀 더 잘 어울리는 사태는 뉴욕의 반(反)-월 가 시위 사건일 것이다. 이와 더불어 점거, 혹은 점령이라는 단어가 올해의 어휘로 재스민과 경합을 벌이게 되었다. 과격하지는 않지만 어쩌면 한층 더 고질적이고 깊은 문제와 모순에 대한 폭로와 항의의 의미를 담고 있는 이 시위와 점거 사태는 뜨겁지 않으면서도 장벽(腸壁)을 타고 흘러내리는 ‘인동차’ 같은 찌르르한 느낌을 온몸에 선사한다.
아랍 세계의 재스민 혁명은 민주화라는 항목에 해당하는 근대화의 뒤늦은 실현 정도로 이해한다 하더라도, 첨단적 현대 국가인 미국의 경제 심장부에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재스민의 김은 근대화라는 것이 일회적인 사건이나 과정으로 완수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 그것은 세계 여러 지역이나 나라에서 시간과 배경과 방식을 달리하며 반복적이면서도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역사의 구성 작업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해준다. 진보라는 이념을 자생적으로 지니지 못했던 지역에서는 역사적 진보가 이루어지고 있는데, 정작 그 이념을 만들어 전 세계에 선사하고자 했던 원산지에서는 모순으로의 퇴행이라는 반복적 악순환이 되풀이되고 있는 오늘날의 세계적 현실은 역사라는 것이 과연 선조적 진행인가 회귀적 반복인가를 다시금 성찰해보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든다.

여기서 우리는 시르트와 북아프리카와 카뮈를 떠올리게 된다. 카다피의 고향이라는 죄목으로 졸지에 폐허가 되어버린 시르트. ‘환영 같은 건물 몇 채의 형태’로 시르트의 첫인상을 묘사했던 쥘리앙 그라크는 본의 아니게도 총탄 자국 숭숭 뚫린 ‘환영같은 건물’들의 잔재만 남은 오늘의 시르트의 모습을 정확하게 예언한 셈이 되고 말았다. 비록 T·V의 영상을 통한 것이기는 하나 오늘의 시르트의 황폐한 모습 앞에서 우리는 카뮈가 북아프리카에 산재한 고대 카르타고의 유적 앞에서 느꼈던 것보다 더 진한 부조리를 느끼게 된다. 아마도 카뮈에게 그 유적들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은 후의 유럽의 참담한 실상을 성찰하게 만드는 비유적 대상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카뮈는 옛날의 폐허에 ‘지금 여기’의 모습을 투사시켜보며 시지프스를, 니체의 영원회귀를 떠올렸던 것이리라. 그리하여 역사는 진보하는 것이 아니라 되풀이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그것도 우매와 무지와 탐욕, 그리고 이 모든 악이 뭉쳐진 무의미만이 반복재생산될 뿐이고 그나마 이런 탐욕마저도 종국에 이르러서는 폐허 속에 가뭇없이 사라지는 신기루에 지나지 않는다는 데에까지 는 이 이르렀을 때 카뮈가 마지막 의지처로 삼아 기댈 수 있었던 것은 북아프리카의 자연밖에 없었을 것이다. 사막과 태양, 지중해의 푸른 물결을 타고 불어와 살갗을 간질이는 소금기 머금은 바닷바람, 그리고 압셍트의 진한 향기……. 카뮈에게 이것들은 고향이고 어머니였기 때문에. 그렇게 카뮈는 든 의 깊은 상처를 어루만져 날것 그대로의 삶을 회복시키는 자연의 모성성에 온몸을 내맡기고자 했다. 그렇게 해서 카뮈는 그리하욕,으로 태어나고자 했다. 비록 또 굴러 떨어질지언정, 굴러 떨어진 바위를 다시 정상으로 밀어 올리는 그 과정에서만큼은 그래도 인간은 진보하는 것이라고 카뮈는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마치 파도가 원운동을 반복하면서도 끊임없이 해안으로 밀려오는 것처럼……. 이런 비유적 연상을 그대로 따라가면 페스트로 유폐된 도시 오랑의 밤바다에서 홀로 수영하는 리우 의사의 모습은 원환과 진행이 교차하는 문명의 주기와 리듬에 실려 있는 인류를 상징하고 있는 것은 아닐지.

그러나 카뮈 이후 서구는 근대의 반성이라는 명분으로 인간을 버리고 주체를 버렸다. 우리가 여기서 카뮈를 회상해 본 것은 바로 그가 어쩌면 ㅡ 사르트르와 더불어 ㅡ 인간으로서, 인간의 육성으로 발언한 서구의 마지막 세대의 인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카뮈의 바로 다음 세대로서 누보로망의 기수였던 알랭 로브-그리예는 『이방인』같은 소설에서 탈인간화가 불충분하다는 점을 아쉬워했고, 로브-그리예의 이런 관점은 가령 롤랑 바르트 같은 이론가에 의해 적극 옹호되었다. 1960년대 프랑스를 필두로 한 서구의 문학과 철학계에서 이루어진 탈인간화, 탈주체화 작업은 가히 전방위적이었고 또한 장관이기까지 했다. 1970년대에 이른바 신철학파로 불렸던 베르나르 앙리-레비의 저서 제목에 빗대어 이제 인간의 얼굴을 한 것은 모두 야만으로 치부되기에 이른 것이라고 한다면 지나친 표현일까? 그러나 인간이 사라지고 주체가 분해된 빈자리를 구조와 시스템이 대체하게 되었을 때, 좀비가 되어버린 인간과 철저히 시스템화된 사회를 연결해주는 것은 무책임성이라는 윤리 아닌 윤리였고, 이 무책임성이 신자유주의라는 무한 경쟁 논리에 실려 돌이킬 수 없는 추세로 확산되었을 때 뉴욕 반-월가 시위대를 분노하게 만든 1:99의 비대칭적 구조는 이미 예고되어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세계 경제를 파탄내기 일보 직전 지원받은 막대한 공적 자금으로 그들만의 보너스 잔치를 벌이는 월가의 금융업계나 수조 원에 달하는 고객 예치금을 경영진들의 쌈짓돈처럼 유용한 부산저축은행 사태 같은 사례에서 우리가 목격하게 되는 것은 바로 이런 무책임성의 극치가 아니겠는가. 비단 이런 특정한 사안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무책임성은 우리의 정치 현실 전체를 뒤덮고 있는 먹구름이기도 하다.

당연히 반-월가 시위대의 구호 또한 실시간으로 전세계로 퍼져나갔고, 지난 10월 15일에는 우리나라에서도 이에 동참하는 시위가 열렸다. 이런 바람에 우리는 88이라는 숫자에 더하여 99라는 숫자에도 심각한 징후적 의미를 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원래 9988이란 99세까지 팔팔하게 살자는 술자리에서의 권주사였지만, 이제는 국민의 99%가 88만원의 수입밖에 갖지 못하게 되는 현실을 급박하게 예고하는 불길한 숫자가 되어버린 것이다. 우리가 반-월가 시위대의 구호나 저축은행 피해자들의 절규를 1%가 독점한 부를 99% 쪽으로 돌리라는 공평 분배의 요구나 책임얐 갖처벌하라는 요구 정헄라는받아들인다면 이 또한 사태의 본질을 호도하는 무책임성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하것이다. 되고 만다. 오늘날 사람들은 정치에서든 경제에서든 탈인간화된 시스템의 무책임성이 초래할 수 있것이끔찍한 결과에 경악 탈인간화된 이며, 이미 징후적으로 도처에서 드러나탈인간화된파국의 예감에 전율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얼굴을 한 새로운 문명의 재건을 위해 구조와 체제와 시스템이라는 추상적 괴물들을 개혁해야 하는 과제는 이제 한시도 지체할 수 없는 급선무가 되었다. 서울 시장 보궐선거에서 불었던 안철수 바람이라는 것도 사람들이 거기서 기존의 정당 시스템에서 볼 수 없었던 인간의 얼굴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제 카뮈에 대한 회상으로 시작된 이 글을 다시 한 번 카뮈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으로 마무리 짓도록 하자. 소설 『전락』에서 어느 날 밤늦게 집으로 돌아오던 클라망스가 센강에 이르렀을 때 뭔가 강물에 빠지는 ‘풍덩’ 소리가 들려온다. 직감적으로 클라망스는 누군가 물에 빠진 것임을 알아차리지만 그는 ‘이미 늦었다’는 핑계로 그 상황에서의 책임에서 벗어나려 한다. 그러나 그 이후 클라망스에게서는 줄곧 환청으로 들려오는 웃음소리가 떠나지 않는다. 그 웃음소리에 쫓겨 결국 그는 촉망되었던 장래를 포기하고 ‘전락’의 길을 걷게 된다. 클라망스에게 들려온 웃음소리는 왁자지껄하게 바깥으로 터져 나오는 민중들의 밝고 명랑한 웃음소리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으로서의 무한한 책임을 촉구하는 양심의 고막에 울릴 때 비로소 자기에게만 들려오는 소리다. 우리 모두는 이것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나의 무책임성을 조롱하는 이 웃음소리를 회피하지 않을 때 그 고통스러운 대결을 통해 우리는 최소한의 인간의 얼굴을 되찾을 수 있게 될 수 있지 않을까? 비록 음산한 것이더라도 이 내면에 울리는 웃음소리에 진정으로 귀 기울인 후에야 민중들의 밝고 명랑한 웃음이 세상의 건강을 조금이나마 회복시키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