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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 해외로... 외연 넓히는 한국 문학

가을바람이 옷소매를 파고들기 시작한 지난 9월23일. 매주 발표되는 베스트셀러 순위(한국출판인회의 집계)에 ‘난데없는’ 소설 한 편이 1위를 차지했다.

‘난데없다’고 표현한 것은 이 소설이 출간된 지 이미 2년이나 지났기 때문. 8월까지 36만부 정도 나갔던 이 소설은 동명 영화가 개봉한다는 소식과 맞물리며 80만부까지 순식간에 판매됐다. 공지영 소설가의 장편 『도가니』 이야기다.

소설 『도가니』를 재료로 삼은 동명 영화는 두 달 가까이 우리 사회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광주 인화학교에서 벌어진 짐승 같은 성폭행 사건에 시민과 네티즌은 치를 떨었다. 재수사와 시설 폐쇄 요구가 빗발쳤고 국회는 ‘도가니법’으로 불리는 ‘성폭력범죄의 처벌 특례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같은 날 발표된 베스트셀러 순위에서는 『마당을 나온 암탉 - 애니메이션 그림책』과 동화 『마당을 나온 암탉』이 나란히 12위와 13위에 올랐다. 역시 문학 자체의 힘이 바탕이 됐고 동명 애니메이션이 200만 관객을 넘게 동원한 저력이 더해지며 폭발적인 관심을 모았다.

지난 18일 발표된 베스트셀러 순위에서도 영화 등 영상과 손잡은 문학의 힘을 느낄 수 있다. SBS TV 인기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의 동명 원작 소설 1권(이정명 지음)이 5위를 차지했고, 최근 개봉한 영화 <완득이>의 원작 소설(김려령 지음)도 8위에 오르는 등 출간된 지 오래된 소설이 다시 독자와 만나고 있다.

이 참에 기획 단계부터 영화와 드라마를 겨냥한 ‘맞춤형 소설’을 시도하는 작가도 나오고 있다.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 <황진이> 등의 원작 소설가인 김탁환은 지난 9월 7일 콘텐츠 제작사 ‘원탁’을 설립했다. 김탁환은 이곳을 통해 소설을 시나리오로 각색하고 영화 제작까지 소화할 생각이다.

콘텐츠 기획·스토리텔링 프로젝트팀인 ‘식스센’스도 원작 소설부터 영화, 드라마까지 일관성 있게 제작하겠다는 의도로 탄생했다. <주몽>, <선덕여왕>의 김태원 프로듀서, 영화감독 김성수, 추창민 등에 소설가 김이환이 가세했다. 첫 결과물인 소설 『동네전쟁』도 이미 내놨다.

소설과 시 같은 문학이 자신의 공간에 머무르며 ‘순수함’에 만족하는 시대가 빠르게 저물고 있는 것이다. 지난 가을 우리 문학계는 이런 격류의 한 복판에 서 있었다.

장르뿐만 아니다. 한국문학은 지난 가을 해외 진출의 결실도 풍성하게 수확했다.

31개국에 번역 판권이 팔리며 해외에서 한국 문학 사상 최고의 성과를 거두고 있는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는 9월 중순 일본 시장에 진출해 선전하고 있다. 발간한 지 한 달 만에 3쇄에 돌입했고 1만3천부 이상을 찍어냈다.

신경숙은 9월 초 호주 브리즈번에서 열린 '브리즈번 작가 페스티벌(BWF)'에 한국 작가로는 유일하게 초청됐고 역시 한국 작가로는 처음으로 '맨 아시아 문학상' 후보로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넉 달간에 걸친 '해외 북투어' 행사를 마치고 지난 8월말 국내로 돌아온 신경숙은 “『엄마를 부탁해』는 나에게 해외 문화와 독자를 만나고 느끼게 한 엄마 같은 역할을 했다”고 소감을 전했다.

국내 문학을 대표하는 소설가 이문열도 지난 몇 달 동안 분주하게 움직였다. 단편소설 「익명의 섬」이 한국 소설로는 처음으로 미국 굴지의 시사교양지인 《뉴요커》 9월 12일자에 번역돼 실린 것이다.

이문열은 이어 1년 9개월 만에 신작 소설 『리투아니아 여인』도 출간했다. 이 소설은 리투아니아계 미국인 어머니와 한국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나 다국적 정체성을 지닌 뮤지컬 음악 감독 김혜련을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작가는 “예술가의 정체성 문제에 대해 탐구해본 소설”이라며 “예술하는 사람들이나 운동 선수에게 국적을 묻는 것이 과연 의미가 있는지 생각해봤다”고 말했다.

시 부문에서는 한국 현대시의 흐름을 이끌어 온 <문학과지성 시인선>이 의미있는 성과를 내놨다. 1978년 황동규 시인의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로 시작한 이 시인선이 지난 10월 400호를 내 놓았다. 총 판매부수가 400만부나 되는 이 시인선은 그동안 기형도의 『입 속의 검은 잎』(약 30만부), 이성복의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12만부), 황지우의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10만부) 등으로 꾸준한 사랑을 받아왔다.

400호 『내 생의 중력』은 301~399호에 실린 시인 83명의 시 중에서 골라 실었다. 테마는 ‘시인의 초상’으로, 황동규를 비롯해 시력이 50년을 넘는 마종기, 1990년대부터 한국 시의 한 축을 맡고 있는 함성호, 박형준 등의 시까지 아우르고 있다.

‘섬진강 시인’으로 유명한 김용택은 신작 시집 『속눈썹』을 출간했다. 시인이 9년 만에 낸 연가집(戀歌集)이라 더욱 눈길을 끌었다. 시인은 이 시집을 내면서 “10년 전에는 미사여구를 동원해서 사랑의 아름다움을 썼다면 지금은 아름다움은 물론 이별과 고통까지 다뤘다”고 출간 소감을 전했다.

또 지난 가을 선보인 문학 작품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인기 소설가 김훈의 장편 『흑산』이다. 지난 4월 경기도 안산시 대부도 인근 선감도에서 집필에 들어간 그는 칩거 5개월 만인 9월초 원고지 1천135매 분량으로 탈고했다. 소설에서는 형식적 주인공인 정약전의 흑산도 유배 생활과 그의 조카사위이자 천주교 순교자인 황사영의 이야기가 한 축을 이룬다. 다른 한 축에서는 양반 지식인, 배교자, 하급 관원, 마부 등 당시 시대를 엮어간 여러 계층의 삶을 다양하게 담았다.

한국 문단의 기둥으로 떠오르고 있는 소설가 한강도 장편 소설 『희랍어 사전』을 발간해 특유의 세련된 문장을 과시했다. 이 소설은 말을 잃어버린 여자와 시력을 잃어가는 남자가 만나는 독특한 이야기를 담았다. 작가는 두 사람을 내세워 침묵과 소리, 어둠과 빛, 소멸과 생명에 관해 다뤘다.

주요 행사로는 한국 문학 비평사에 한 획을 그은 문학평론가 김현을 기리는 전시관이 9월 30일 동료 문인들이 참석한 가운데 목포문학관에서 문을 열었다. 전시관에는 육필 원고, 안경, 책상 등 유품 300여점이 전시된다.

지난 가을에는 한국문학이 노벨문학상 수상에서 또 고배를 마셔 아쉬움을 남겼다. 올해는 노벨문학상이 소설가 편중 현상에서 벗어나리라는 기대와 함께 시인의 수상 가능성이 점쳐졌지만 고은 시인은 또 다시 후일을 기약하게 됐다. 수상의 영예는 스웨덴의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에게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