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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마지막 충신 정몽주, 일본을 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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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구의 침입 때문에 고려에서 사신을 파견하다
옛날 우리나라에서는 우는 아이를 겁주려고 울면 호랑이가 잡아 간다고 말했지만, 쓰시마에서는 ‘무쿠리 고쿠리 온다’라고 했다. 무쿠리는 몽골군, 고쿠리는 고려군을 뜻하는 말이다. 1273년 제주도의 삼별초를 전멸한 원나라 군대는 고려군과 연합해 두 차례 일본 원정을 단행했는데, 그때의 공포가 아직까지도 이런 말 속에 전해오는 것이다. 이 일로 고려와 일본의 통교는 단절되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왜구 때문에 다시 국교가 재개되기에 이르렀다.
1350년 이후로 왜구의 침탈은 고려의 가장 큰 골칫거리였다. 단순히 해안 지역만 아니라 평안도, 함경도까지 전국적으로 극성을 부렸고 심지어 수도 개경 부근까지도 침입해 왔다. 이들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식량 확보였지만, 포로를 납치하고 문화재를 약탈해 가서 매매하여 이익을 올리기도 했다. 고려는 왜구의 주요 근거지로 주목된 쓰시마를 정벌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당시 일본의 무로마치 막부에 사신을 보내 왜구의 진압을 요청하기로 했다. 그러나 일본 사신 길이 평탄치만은 않았다.
1366년 처음으로 파견된 김룡(金龍) 일행은 이즈모에 도착해서 도적들에게 예물을 약탈당했다. 1375년 파견된 나흥유(羅興儒)는 도착하자마자 원나라의 첩자로 오인 받아 오랜 시간 갇혀서 조사를 받아야 했다. 1377년 파견된 안길상(安吉祥)은 일본에서 병사했다. 교토의 무로마치 막부에 도착해서는 환대를 받았으나, 고려인으로서는 별로 나서고 싶지 않은 위험한 사행길이었다. 게다가 무로마치 막부의 영향력이 미약했기 때문에 왜구 진압을 약속 받아도 별다른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안길상에 이어 일본 사신에 추천된 사람이 바로 고려의 마지막 충신 정몽주(鄭夢周, 1337~1392)였다.
| ▲ 일본 사행시가 실린 정몽주의 문집. 1607년에 간행된 것이다. | | 죽음의 사신길도 받아들인 충신 정몽주
그의 원래 이름은 몽란(夢蘭)이었다. 어머니 이씨가 임신했을 때 난초화분을 깨뜨리는 꿈을 꾸었기 때문이었다. 9살이 되었을 때 몽룡(夢龍)으로 이름을 고쳤다. 이씨가 검은 용이 배나무를 타고 올라가는 꿈을 꾸다가 깨어났는데, 실제로 정몽주가 배나무에 올라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몽주(夢周)라고 개명하였다. 이유는 확실히 밝혀져 있지 않지만, “꿈에서 주공을 보지 못한 지 오래되었다(久矣 吾不復夢見周公)”고 탄식한 공자의 말에서 온 것이 아니겠는가? 주나라의 문물을 정비한 주공(周公)을 본받으려다 보니 주공 꿈을 자주 꾸었던 공자.
| ▲ 숭양서원에 있었던 정몽주 초상을모사한 초상화 | |
정몽주는 그런 공자를 본받으려 했던 철저한 유학자였다. 스승인 이색(李穡)조차 그를 우리나라 성리학의 창시자라고 찬탄하였다. 당시 신흥사대부들이 그러했듯 정몽주도 중원의 새로운 강자로 등장한 명나라와 친할 것을 주장하는 친명파에 속해 있었다. 그러나 고려조정은 친명을 지지했던 공민왕이 시해당하고 명나라 사신까지 살해당하는 친원파의 세상이었다. 정몽주는 원나라 사신을 받아들이면 안 된다는 상소를 올린 일로 친원파 이인임 일파의 미움을 받아 언양에 유배되었다. 그리고 이인임 등은 일부러 위험한 일본 사신길에 정몽주를 추천했던 것이다.
정몽주는 의연히 추천을 받아들여, 1377년 9월 왜구를 금지해 달라는 요청을 하기 위해 일본으로 파견되었다. 그때 지은 시 「홍무정사봉사일본작십일수(洪武丁巳奉使日本作十一首)」를 비롯해 총 13수의 시가 전한다. 김룡 일행도 시를 주고받았다는 기록이 보이지만, 정몽주의 시가 아마도 현전하는 가장 오래된 일본 사행시일 것이다. 이 시를 보면 당시 정몽주의 일본 사행이 어떠했는지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다.
타고난 외교가 정몽주, 일본을 노래하다
죽음의 길로 내몰리기는 했으나, 정몽주는 뛰어난 외교가였다. 하카타에 도착해 당시 무로마치 막부에서 파견돼 규슈를 다스리고 있던 구주탐제(九州探題) 이마가와 사다요를 만났다. 이들의 안내로 교토에 가서 무로마치 막부를 접견했지만, 정몽주는 왜구 억제를 위해서는 규슈 지역의 탐제 역할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왜구는 대부분 삼도라고 일컬어지는 쓰시마, 잇키, 마츠우라로부터 창궐했고 규슈와 시코쿠 연해 지역에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 정몽주는 왜구의 금지에 대해 역설해서 이마가와를 경복시켰다. 이마가와 쪽의 접대도 나쁘지 않았던 듯하다.
천년 된 바다 섬에 마을이 열려있어 海島千年郡邑開
뗏목타고 여기 와서 오랫동안 배회했네 乘槎到此久徘徊
산승은 시 구하러 날마다 찾아오고 山僧每爲求詩至
땅주인은 때때로 술을 보내 오는구나 地主時能送酒來
인정을 오히려 믿을 만해 기쁘니 却喜人情猶可賴
물색을 가지고 시기하지 말구려 休將物色共相猜
타국이라 누군들 흥취 없다 말하랴? 殊方孰謂無佳興
날마다 가마 빌려 이른 매화 구경 가네 日借肩輿訪早梅
정몽주는 약 9개월가량 일본에 있었는데, 위 시는 하카다에 머물며 일상을 읊은 것이다. 일본에서 문자를 아는 사람은 거의 승려였는데, 정몽주는 찾아와 시를 지어달라고 한 스님들에게 즉석에서 시를 써주었다. 이렇게 남겨진 시는 일본인들의 존경을 불러일으켜, 후에 정몽주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슬퍼하며 재를 올린 승려들도 있었다.
시에 보이는 땅주인이란 바로 이마가와를 가리키는데, 접대를 위해 종종 술을 보내왔던 모양이다. “인정을 믿을 만하다”는 말을 통해 이들의 접대가 정성스러웠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정몽주는 남쪽 지방이라 매화가 일찍 펴 가마타고 구경 다니는 여유를 부릴 수도 있었다. 특히 관음사를 유람하고 2수의 시를 남겼다. 그중 한 수는 다음과 같다.
들판 절간에 봄바람 불어 푸른 이끼가 자라는데
여기 와서 종일 노느라 돌아갈 줄 모르네
동산 안에 수없는 매화나무들
이 모두 스님이 손수 심은 것들일세
-「관음사에서 놀다」, 『포은정몽주시선』, 허경진 옮김, 평민사
관음사란 후쿠오카에 있는 관세음사(觀世音寺)를 가리킨다. 7세기 중반 텐치 천황이 어머니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운 절로, 다자이후 가는 들판에 있다. 교토로 가기 위해 기다리는 동안 규슈에서 봄을 맞이했기 때문인지 매화에 대한 언급이 많다.
바다 위에 신선 산다 듣기만 했었는데 但道神仙居海上
동쪽에 나라가 있을 줄 누가 알았으랴 誰知民社在天東
아롱진 옷 진나라 동자에서 온 것 같고 斑衣想自秦童化
검은 이는 월나라 풍속과 통한 것 같네 染齒曾將越俗通
원래 동쪽에는 신선이 사는 섬이 있다고 한다. 봉래산이니 영주산이니 하는 것들이다. 그래서 진시황은 불사초를 구하기 위해 동남동녀 오백 명을 동쪽으로 보냈다. 이 진나라 동자들이 도착한 곳이 일본이라, 일본에는 진나라 때 유물이 남아있다는 속설이 퍼졌다. 정몽주가 바라본 일본은 신선나라가 아닌, 어엿한 백성과 문물이 있는 나라였다. 우리와 다른 그들의 무늬 옷은 진나라에서 유래된 것 같고, 이에 검은 물을 들이는 일본 여인의 풍습은 옛날 중국의 월나라 풍속이 전해진 것처럼 느껴졌다. 이미 오·월(吳越)의 땅에 사신으로 다녀왔기에, 자신 있게 말한 것이다.
조선까지 미친 그의 외교력
정성스러운 접대와 신기한 이국 풍속에도 고향 떠난 외로움은 어쩔 수 없었다.
매화 피는 창가라서 봄빛 이르고
판자집이라 빗소리 더욱 시끄럽네
홀로 앉아 긴긴 날을 보내노라니
집 생각 너무 심해 견딜 수 없네
(「홍무정사봉사일본작 4」, 『포은정몽주시선』, 허경진 옮김, 평민사)
판자로 널을 올린 일본식 집은 기와집이나 초가집과 달리 빗소리가 더 크게 들린다. 더구나 남쪽 지방이라 비가 더 자주 온다. 매화 구경하러 가마타고 나갈 수도 없으니, 무료한 시간 고향 생각은 더욱 심했을 것이다.
▲정몽주에게 경복한 이마가와 사다요를 묘사한 그림. 그는 규슈를 평정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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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몽주가 교토에서 만난 이시카가 요시미츠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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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몽주는 드디어 1378년 6월경 교토의 막부를 방문하고 7월경 귀국했다. 이마가와는 삼도 왜구를 제압할 것을 약조하였고, 승려 주맹인(周孟仁)을 사자로 딸려 보냈다. 아울러 포로 백여 명을 함께 송환시켰다. 이마가와는 이후에도 군대를 파견해 고려의 왜구 방어에 적극적으로 협력했고, 포로도 찾아내어 송환시켰다. 이 모두가 정몽주의 탁월한 외교능력에 기인했던 것이다. 정몽주는 명나라와의 외교에서도 실력을 발휘해, 남경에도 여러 차례 파견되었다.
고려에 대한 충성을 버리지 않았던 정몽주는 개성의 선죽교에서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했다. 그런데 정몽주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장본인인 이방원은 조선의 왕이 되어서 도리어 정몽주를 영의정에 추증하였다. 명의 선진 제도와 문물을 받아들여 조선 건국의 기초가 되게 한 공과 그의 충성을 인정했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에게도 정몽주같이 충성스런 신하가 필요한데다, 조선 전기 일본과의 외교가 고려를 그대로 답습했던 것을 보면 정몽주의 공은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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