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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랴샤

▲ 김중혁 © 운영자

가끔씩 크랴샤라는 단어를 처음 보았던 그 순간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하나님이 자동차로 퍼즐 맞추기를 완성해놓은 것처럼 빈틈이 전혀 없던 간선도로 위에서 그날 오후의 사람들은 조바심을 내며 운전하고 있었다. 끼어들기를 허용하는 것은 운전자의 수치라고 여기는 사람들만 거리에 나와 있는 것 같았다. 앞차가 움직이면 뒤차가 놀란 듯 따라 움직였다. 그렇게 놀라는 순간들이 연쇄적으로 이어졌고, 도로 위에는 기다란 긴장의 끈들이 오후의 그림자와 함께 늘어져 있었다. 나도 그랬다. 졸음을 이겨내며 앞차를 따라 움직였다. 빨리 샘플 의자를 보여주고 일을 끝내고 싶었다. 운전하면서 계속 뒷자리에 있는 의자를 힐끔거렸다. 불편하게 얹혀 있었지만 쓰러질 염려는 없어 보였다. 그래도 자꾸만 돌아보게 됐다. 슬쩍슬쩍 엑셀러레이터를 밟으면서도 뒤를 돌아보았다. 거울을 통해 볼 수도 있었지만 직접 봐야 실체를 감지할 수 있었다. 고개를 돌려 의자를 보는 사이 갑자기 자동차 앞으로 트럭 한 대가 (앞으로) 끼어들었다. 나는 짧은 욕을 내뱉으면서, 욕이 브레이크 역할을 해주길 바랐다. 가까스로 브레이크 페달을 밟았다.
뒷자리에 놓여 있던 샘플 의자는 끄떡없었다. 생각보다 위급한 상황이 아니었고, 급제동이 아니었던지, 의자는 어긋남 없이 그 자리에 있었다. 의자를 둘러싼 보호용 포장지에도 흠집 하나 나지 않았다. 나는 자동차에서 내려 트럭 운전자에게 따질까 생각했지만, 클랙슨을 크게 한 번 울리는 걸로 항의를 대신했다. 내 앞으로 끼어든 5톤 트럭 뒤에 ‘크랴샤’라는 글자가 크게 쓰여 있었다. 무슨 뜻인지 파악하기 위해 한참 그 글자를 들여다보았다. 나는 글씨를 소리 내어 읽었다. 크, 랴, 샤, 라고 읽었지만 그게 어떤 뜻인지 알 수 없었다.
트럭은 내 앞에서 시야를 가로막았다. 트럭밖에 보이지 않았다. 크랴샤라는 글자가 하나님의 계시처럼 눈앞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트럭이 시야를 가리자 처음에는 답답하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졌다. 차선을 바꿀 마음이 들지 않았다. 딴 생각할 필요 없이 트럭의 뒤꽁무니만 쫓으면 그만이었다. 차들이 빼곡하게 들어찬 도로 위에서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트럭에 이끌려 어딘가 알 수 없는 곳으로 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일부 작업현장에서는 그렇게 불린다고 해도, 크랴샤는 분명히 잘못된 단어였다. 하지만 크랴샤라는 오자가 아니었다면 내가 트럭의 뒤꽁무니를 자세히 살피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가끔 잘못된 길이 누군가를 옳은 방향으로 이끌듯, 가끔 우연한 선택이 한 사람의 운명을 낭떠러지로 떠밀듯, 크랴샤라는 단어가 나를 뜻밖의 세계로 끌고 들어갔다. 소주를 마시고 난 다음에 내뱉아야(내뱉어야) 어울릴 듯한 ‘크’에 이어 ‘랴’ 와 ‘샤’ 에 붙은 이중모음을 연이어 발음하고 나면 지금도 두꺼운 철문 앞에 서서 비밀스러운 주문을 외고 있는 것만 같다. 크랴샤는 외계의 신호 같았다.
나는 마흔일곱이 되던 해 봄부터 취미로 마술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여름쯤에는 거기에 푹 빠져서 매일 새로운 마술을 연습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가게에 손님이 없을 때면 책상 앞에 앉아 마술을 연습했다. 새로운 마술을 익히면 열 살 먹은 아들, 병원에 계신 어머니, 옆 가게 사람들 앞에서 간단한 쇼를 했고, 모두들 별것 아닌 마술에 환호를 보냈다. 어설픈 마술에도 박수를 쳐주었다. 크랴샤라는 단어를 처음 보았을 때도 나는 마술에 쓸 주문으로 적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크랴샤, 하면 모자 속의 토끼가 사라지고, 크랴샤, 하면 무대 뒤에서 토끼가 뛰어나온다. 다시 크랴샤, 하면 연기가 피어오르고, 다시 크랴샤, 하면 토끼가 지팡이로 변한다. 그때는 뭘 보든 뭘 읽든 모든 것을 마술과 연결할 궁리만 하고 있었다.
작은 마술쇼에서 나는 많은 것들을 사라지게 했고, 다시 나타나게 했으며, 어떤 것들은 찢었다가 다시 붙였다. 모두 불가능한 일이다. 소멸된 것들은 되살아날 수 없으며 찢어진 것들은 절대 다시 붙지 않는다는 걸 모두 안다. 그들은 알면서도 매번 속아준다.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는 마술이 나를 사로잡았다. 내가 가능하게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던 때였다.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해결할 수 없는 일들이 도처에 있었다. 어머니는 6개월째 병원에 계셨고, 처가에서 하던 사업은 부도를 맞았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열심히 돈을 버는 것뿐인데, 그것도 만만치 않았다. 마술의 세계만이 만만했다. 마술은 관객과 함께 가능성을 공모하는 것이어서 불가능한 일이 실제로 일어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의 조짐을 서로 인정해 주기만 하면 되었다. 한번 그 공모에 맛을 들이자 빠져나오기 힘들었다.
내가 가장 자신 있어 하는 마술은 ‘배니싱’이었다. 배니싱이란 카드나 담배 같은 걸 눈앞에서 사라지게 했다가 다시 나타나게 하는 마술인데, 간단한 마술시 나보여도 오랜 연습이 필요하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사라진다기보다 어딘가에 숨겨놓는 것인데, 두 손의 미묘한 각도와 정확한 동작을 완벽하게 숙지하려면 카드와 담배가 손에서 떨어지는 시간이 없어야 한다. 나는 손님에게 가구를 설명하는 시간에도 손에 카드를 쥐고 있었다. 한번은 손님에게 식탁을 설명하다가 나도 모르게 카드로 장난을 치고 말았다.
“어, 마술하시나 봐요?”
“예?”
“지금 카드가 나타났다가 사라진 거 아니었어요?”
“아, 보셨어요? 잘하진 못해요.”
“마술 멋진데……, 보여주세요.”
볼이 발그레한 30대 초반의 여자 손님은 식탁 대신에 내 손에 집중했다. 나는 우물쭈물하다가 간단한 카드 배니싱을 보여주었다. 마술의 관객은 대개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마술의 비밀을 알아내기 위해 마술보다는 손동작에 주목하는 사람, 아니면 간단한 마술에도 감탄하고 빠져드는 사람. 여자 손님은 후자였다. 그런 관객을 만나면 마술 하는 사람도 신이 나게 마련이다. 조금 허술해도 문제 될 게 없었다. 여자 손님은 결국 폐목재를 재활용해서 만든 100만 원짜리 식탁을 샀다. 마술 때문이었을까.
마술 아카데미의 선생 장연창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을 때도 나는 책상 앞에 서서 두 손으로 카드 감춰놓는 연습을 하고 있었다. 가구점의 위치를 묻는 전화인 줄 알고 스피커 폰으로 전화를 받았다. 나는 두 손으로는 계속 연습을 하며 건성으로 대꾸했다.
“거기 이강민 씨 전화 아닌가요?”
“네, 말씀하십시오. 제가 이강민입니다.”
“저, 마술 아카데미 장연창이라고 합니다.”
나는 연습을 멈추고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연습하던 카드가 책상 위로 떨어졌다.
“예, 선생님. 어쩐 일이세요?”
“통화 괜찮으세요?”
“예, 예, 괜찮죠. 깜짝 놀랐습니다. 전화를 다 주시고…….”
“네, 짧게 말씀드릴게요. 하미레즈 아시죠?”
“하미레즈요? 마술사 하미레즈요?”
“네. 마술사 하미레즈.”
“알죠, 그럼. 세계적인 마술사인데요.”
“그분이 한국에 오십니다.”
“예? 정말요? 언제요?”
“오는 게 문제가 아니고요, 제가 이번에 하미레즈 쇼의 오프닝과 전체 기획을 맡았어요. 그래서 팀을 좀 꾸려볼까 하는데요, 믿을 만한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죠? 믿을 만한 사람들이라는 게.”
“네? 네, 알죠. 아마추어이긴 하지만 저도 마술사인데요. 손이 몰래 하는 일은 입으로 말하지 않는다.”
“내일 퇴근 후에 시간 어떠세요? 팀을 확정하고 일을 바로 시작해볼까 하는데요.”
“갑니다. 가야죠.”
나는 전화를 끊고 방금 일어난 일이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보았다. 진짜 마술가가 되는 거다. 식구들이나 동네 사람들을 모아놓고 하는 소꿉장난이 아니라 진짜 마술가가 되는 거다. 사람들의 박수를 받으면서, 사람들의 비명소리를 들으면서.
물론 역할이래 봐야 기껏 보조밖에 못하겠지만 큰 무대에 선다는 생각만으로도 손이 떨렸다. 다시 연습을 하려고 했지만 손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다음날 6시, 나는 아내에게 가게를 맡기고 마술 아카데미로 달려갔다. 사무실에는 선생님 말고 다섯 명의 남자가 앉아 있었다. 아카데미에서 만난 사람이 두 명 있었고, 나머지 세 명은 처음 보는 얼굴들이었다. 내가 사무실로 들어가자 말소리가 툭 끊겼다.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사무실 공기는 무거웠고 모두 심각한 표정이었다. 책상에 걸터앉아 있던 장연창이 입을 열었다.
“자, 이제 다 모였네요. 제가 계속 강조하는 거지만 이번 행사는 국가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입니다. 하미레즈를 돋보이게 해주는 게 우리의 역할이지만 이번 기회에 한국의 마술 실력을 세계에 알리는 것도 중요합니다. 저한테 다 생각이 있으니까 여러분들은 저를 따라와 주시면 됩니다. 무슨 말인지 알죠?”
“네.”
나도 모르게 큰 소리를 냈다. 장연창은 나보다도 나이가 열다섯 살이나 어렸는데, 군대시절 선임병의 명령에 큰 소리로 복종하는 듯한 목소리로 대답을 하고 말았다. 장연창은 큰 목소리의 대답이 싫지 않은 듯했다.
다음날부터 본격적인 준비가 시작됐다. 마술쇼의 전체적인 구성은 이미 장연창의 머릿속에 있었고, 우리는 그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기만 하면 됐다. 장연창은 그날 모인 마술사 중 세 명에게 하미레즈 쇼의 준비를 맡겼고, 나이가 가장 어린 마술사 다빈과 나에게는 별다른 일을 시키지 않았다.
“제가 지금 끝내주는 걸 준비하고 있으니까 두 사람은 조금만 기다려요. 엄청난 프로젝트를 맡게 될 거니까 놀랄 준비만 해놓으십시오. 무슨 말인지 알죠?”
장연창은 다빈과 나에게 그 말만 되풀이했다. 다빈과 나는 매일 아카데미 사무실에 들렀지만 5일이 지나도록 아무런 할일이 없었다. 컴퓨터 앞에 앉아서 인터넷 서핑을 하거나 사무실 책장에 빼곡하게 꽂힌 마술 녹화 디브이디를 한 장씩 꺼내서 보는 게 전부였다. 매일 저녁 아내에게 가게를 맡기는 게 눈치 보였지만, 그래도 사무실에 나와 있으면 마음이 편했다. 마술을 배우고 마술사로 데뷔한다는 것은 분명 내 처지에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다. 그렇게 한가하게 시간을 보낼 상황이 아니었다. 나는 현실의 세계에서 마술을 부리듯 몇 천만 원을 뚝딱뚝딱 만들어내야 했다. 아카데미 사무실에 나와 있으면 그런 걱정을 잠시라도 잊을 수 있었다.
“아저씨는 누구 마술 제일 좋아해요?”
“글쎄, 누굴 좋아하나? 랜스 버튼을 제일 좋아하는 거 같네.”
“그 비둘기 아저씨요? 시시하지 않아요?”
“랜스 버튼도 어려운 거 많이 했어. 비둘기로 유명해서 그렇지.”
“그 아저씨 생각하면 비둘기랑 카드밖에 생각 안나요.”
“손동작을 자세히 한 번 봐. 그게 쉬워 보여도 흉내 내기 어려운 거야. 우아하고 섬세하고, 손동작 하나만으로 이야기를 만들어내잖아. 넌 누구 좋아하는데?”
“에이, 저야 당연히 데이비드 카퍼필드죠.”
“그럴 줄 알았어.”
“언젠가는 만리장성 벽 뚫기보다 더 엄청난 마술을 발명할 거예요.”
“만리장성까지 가는 것도 만만치 않아. 카퍼필드처럼 되려면 돈 많이 필요하겠다.”
“지금부터 벌면 되죠.”
“넌 마술 왜 배워?”
“마술 하면 여자들한테 인기 많거든요. 내가 좋아하는 여자들 싹 다 꼬셔버리고 말 거예요.”
“솔직하네. 꼭 성공해라.”
“아저씨는요?”
“난 뭐 별 거 없어. 그냥 취미지.”
“아저씨, 저랑 버스킹하러 가실래요?”
“버스킹?”
“길거리에서 하는 거요. 요 앞 광장에서 가끔 하는데 연습 많이 돼요.”
“난 아직 그럴 실력이 아니라서…….”
“실력 필요 없어요. 겁만 안 먹으면 되는 거예요. 자신 없으면 아저씨가 제 조수 해주세요.”
“겁먹을 거 같은데.”
“에이, 가요. 어차피 할 일도 없잖아요.”
나는 다빈을 따라나섰다. 다빈과 나는 카드와 간단한 도구를 챙겨서 광장으로 갔다. 저녁의 광장 불빛 아래에서 기타 케이스를 펼쳐놓고 노래를 부르는 사람도 있었고, 사람들은 야외 테이블에서 커피를 마시고 맥주를 마셨다. 처음에는 창피했지만 조금씩 마음이 여유로워졌다. 다빈은 야외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을 노렸다. “제가 기막힌 마술 하나 보여드릴까요?” 그게 다빈의 공식 멘트였다. 사람들은 대부분 재미있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빈은 마술을 시작하자마자 표정이 달라졌다. 평소에 말할 때는 스무 살 꼬맹이의 느낌이었는데, 관객 앞에 서자 능숙한 마술사처럼 말하고 행동했다.
“이렇게 예쁜 아가씨들이 모여 있는데 아무도 말 걸어주지 않았어요? 이런, 이래서 우리나라가 선진국으로 가려면 멀었다니까요. 남자들에 대한 분노를 가라앉히고, 우리 함께 선진국으로 가는 초석을 마련해보아요. 뭔지 알죠? 선진국 사람들은 좋은 공연을 보고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죠. 자, 그럼 놀고 계신 돈은 저 모자에 넣어주시고, 놀고 계신 눈들은 여기로 모아주시겠어요? 이 손수건 보이시나요?”
다빈은 관객들의 눈을 어지럽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손수건을 장미꽃으로 만들어 젊은 여자 관객을 압도하고, 담배 한 개비로 중년 남자들의 시선을 가지고 놀았다. 내 역할은 다빈의 옆에서 모자를 들고 서 있는 거였다. 마흔일곱 살의 남자가 스무 살 마술사의 보조로 서 있는 모양이 우스웠지만, 다빈은 오히려 그 편이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에 유리하다고 했다. 사람들은 우리를 아버지와 아들 사이로 보는 듯했다.
다빈은 정말 프로 마술사처럼 보였다. 마술을 잘한다기보다 마술의 연출에 뛰어났다. 내가 한 일이라곤 다빈의 옆에 우두커니 서서 관객과 함께 마술에 감탄한 것뿐이었다. 관객과 달리 나는 마술의 모든 비밀을 알았지만, 알고 봐도 감탄스러운 연출이었다. 두 시간의 버스킹 동안 5만 원을 모았다.
“아저씨, 배고파요. 치킨에 맥주 어때요? 함께 벌었으니, 함께 마셔야죠.”
“치킨과 맥주, 좋지. 근데 난 한 일이 없는데.”
“왜 그러세요. 우린 한 팀이잖아요.”
“그래, 한 팀이지.”
“하이파이브!”
두 손바닥을 마주치고 우리는 곧 잔을 부딪쳤다. 다빈은 치킨을 처음 먹는 사람처럼 게걸스럽게 살점을 뜯었다. 껍질을 뜯어먹으면서는 연신 ‘우와, 너무 맛있어요, 행복해요’라는 소리를 질렀다. 조금 전까지 돈을 벌었던 광장에서 술을 마시고 있으니 신분이 급상승한 느낌이 들었다.
밤 12시까지 술자리가 이어졌고 다빈은 취했다. 이런저런 얘기를 많이 했지만 대부분 욕이었고, 데이비드 카퍼필드의 마술이 얼마나 위대한지 몇 번이나 얘기했다. 슬슬 지루해질 때쯤 맥주집 종업원으로부터 술자리를 곧 끝내라는 최후통첩을 받았다. 다빈은 비틀거렸다.
“집이 어디야?”
다빈은 대답을 못했다.
“사는 동네가 어디냐고.”
뭐라고 중얼거리며 대답하는데 알아듣지 못하겠다.
“어느 쪽인지만 얘기해.”
다빈이 중얼거린 위치를 겨우 알아들었다. 혼자 태워 보내자니 마음이 놓이질 않아서 택시에 함께 올라탔다. 아내에게 늦겠다는 전화를 했는데, 아무런 대꾸 없이 끊어버렸다. 화가 많이 났을 때의 행동이었다.
다빈의 동네는 택시로 20분 거리였다. 언덕이 많은 동네였고, 낡은 아파트와 오래된 건물이 많은 동네였다. 동네에 도착했을 때 다빈은 잠에서 깨어나질 못했다. 나는 다빈을 들쳐 업고 일단 택시에서 내렸다. 택시가 내려준 곳은 동네의 작은 공원이었는데, 거기서 도시의 광장과 높은 빌딩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한밤이었지만 도시는 환했다. 저 속에 사람들이 있다는 게, 저 좁은 건물들 사이에서 살아 있다는 게 신기했다. 공원 벤치에서 잠들어 있는 다빈을 깨우지 않고 나는 도시를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도시는 거대한 하나처럼 보였다가 수많은 낱개로 보였다가 작은 점처럼 보였다. 흐릿한 별빛과 도시의 흐릿한 불빛이 구분되지 않았다.
“아저씨, 여기 어디에요?”
다빈이 잠에서 깨어나 물었다.
“네 집 근처.”
“우리 집 어떻게 알았어요?”
“네가 얘기했어.”
나는 계속 도시를 바라보았다. 지붕들에도 표정이 있었다. 다빈은 벤치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켜더니 담배를 꺼내 물었다. 연기가 도시 쪽으로 날아갔다. 다빈과 나는 말없이 도시를 바라보았다. 다빈은 담배를 계속 피워댔다. 한 시간 정도 그렇게 앉아 있으니 다빈도 술이 깨는 모양이었다. 기지개를 켜더니 공원 끝으로 걸어가서 도시 쪽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중략)

* 본 작품은 <대산문화> 2011년 겨울호 지면을 통해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