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그 겨울의 목어소리
- 산사 묵빈대처의 결실 「목탁조」 |
| |
사형을 만났다. 해우소 밑 지레목에 있는 방 한 칸짜리 토굴을 얻었다. 11월 말까지만 머무르겠다고 하였다. 한 달 남짓 기간이었다. 묵빈대처(默擯對處) 해 주겠다는 약조를 받아내었다. 죄를 범한 비구와 비구니에게 대중들이 한 마디도 말하지 않는 징벌을 가리켜 묵빈이라 하니, 내버려달라는 것이었다. 조석예불과 사시마지를 저쑵는 데 참예하든 안하든, 지어 반야탕을 마시고 향공양을 올리며 칼나물이나 도끼나물을 먹든 안 먹든, 아무런 알음도 하지 말아달라는 것이었다. 이 많이 모자라는 중생이 큰 절에 올라가지 않을 테니 큰 절 대중들도 토굴 언저리에는 그림자도 미치지 말아달라고 하였다. 삼각산 만장봉 밑에 있는 천축사라는 옛 절에서였다.
《주간종교》지 사고를 토굴 벽에 붙였다. 종무소에 굴러다니던 묵은 신문지였는데 대중들 몰래 몇 겹으로 접어 염낭 속에 넣고 해우소로 가 오려둔 것이었다. 공양주 행자한테 호마이카 쪽소반을 얻어다 그 밑에 놓았다. 한쪽 다리가 고장 나서 기울어지는 쪽소반 다리 밑에 돌멩이를 받치었다. 시내까지 내려가서 백 장짜리 한 묶음으로 된 이백 자 원고지 두 권을 사왔는데, 푸우. 원고지 쓰는 법을 알 수 없었다. 못쓰게 된 옛날 축원카드 수십 장을 원주실 다락에서 구해다 쪽소반 위에 올려놓았다. 종무소에서 돌돌붓을 슬쩍 집어다가 뒤집어 놓은 축원카드 위에 올려놓았다.
막막하였다. 눈앞에 아득해지면서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를 않았다. 가슴 속 저 깊은 호수 아래서는 실바람 한 줄기만 스쳐 지나가도 몰록 솟구쳐 올라올 용암덩어리들이 부글부글 들끓고 있는데, 어떻게 무슨 수로 그 용암덩어리들을 터뜨려볼 수 있는 것인지, 아예 그 꾀를 알아낼 도리가 없는 것이었다.
곡차를 마셨다. 향공양을 올렸다. 단식에 가까운 일중식을 하였는데, 라면이었다. 난생 처음으로 그러니까 똑똑히 말하자면 사람 몸을 받아 이 사바세계에 태어난 지 27년 10개월 만에 먹어 보는 라면이라는 물건은 참으로 맛있었지만, 닭기름으로 튀긴 가루것이라 그러한가. 곡차를 마셔서 그러한가. 필름이 끊어진 술꾼처럼 정신이 옹송망송하여지면서 무엇을 어떻게 써야 소설이 될 수 있을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어떻게 써야 하는 것인지는 그만두고 먼저 무엇을 써야 할 것인지부터가 아예 막막하기만 해서 처음부터 땅뜀도 할 수 없는 것이었다. 불목하니한테 부탁해서 방구석에 쌓아 둔 한 상자 라면과 됫병들이 막소주 한 궤짝은 벌써 바닥을 보이는데, 한 줄도 쓰지 못하였다. 죽고 싶었다. 무엇을 어떻게 써야만 시러금 종교소설이 될 수 있는 것인지, 소설이 될 수 있는 것인지, 종교소설이든 여느 소설이든 소설은 그만두고 빽빽이 먼저 이야기가 될 수 있는 것인지 무엇보다도 말이 될 수 있는 것인지, 몸을 바꿔버리고 싶을 뿐이었다. 묵빈대처 해 주는 사형한테 죄송하고 무신 조실(祖室) 대접하듯 특권을 주는 대중들한테 쑥스러우며 무엇보다도 스스로에게 미안하여 이 중생은 장삼끈으로 자리개미라도 하고 싶었다.
비틀거리며 산길을 내려간 이 중생은 문학잡지 한 권을 샀다. 속인들이 쓴 소설명색들을 읽어 무엇을 배워보자는 것이 아니라 원고지 다루는 법을 알아보자는 것이었다.
제목은 커다란 활자로 박혀 있고 작가의 성명 삼자는 두어 줄쯤 칸을 띄워서 제목보다 반쯤 나가는 활자로 박혀 있었다. 다시 두어 줄쯤 떨어져서 바탕글이 비롯되고 있었는데 줄이 바뀌는 대목마다 활자가 한 칸씩 밑으로 내려와 있었다. 한 줄에 몇 자가 박혀 있는지 세어보았다. 한 쪽이 몇 줄인지 세어 보았다. 한 줄에 막힌 활자와 한 쪽을 이루고 있는 줄과 곱한 다음 그것을 다시 전체 쪽수와 곱하였다. 그러고 나서 이백으로 나누자 얼추 칠팔십 장에서 백 몇 십장까지 나왔고, 아하 알겠다. 단편소설이라는 것은 그러니까 이백 자 원고지로 백장 안팎 분량이 되는구나. 축원카드 뒷장에 써놓은 글자를 세어보니 이백 자 원고지로 일백이십 장 쯤 되었다. 일백 내외라는 응모규정에 딱 맞는 부피였다. 「목탁조」라는 제목이었다.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