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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퀴즈시대 이야기

▲ 박상현 © 운영자

1973년 봄 나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진학했다. 그 즈음 우리 집에도 흑백TV를 들여 놓았는데, 집안에서 ‘따르릉―’하는 전화벨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던 것도 그 때였다. 이것은 1960년대와는 다른, 70년대식 풍경이었는데, 이 때 즈음이면 서울의 강남에도 ― 지금의 강남이 아니다. 그 때 한강 이남에는 영등포구 밖에 없었는데, 지금의 동작구, 관악구, 영등포구, 구로구 등을 다 포함하는 구역이었다 ― 몇 집 걸러서 하나씩 TV와 전화가 놓이기 시작했다는 얘기다.
1960년대에는 달랐다. 그 때는 동네에서 TV나 전화기를 갖추고 사는 집이 손에 꼽힐 정도였다. 그래서 우리 어머니도 급한 일로 시골에 연락을 할 일이 있으면 만면에 비굴한 미소를 띠고 통장 댁을 찾아가 시골 이장 댁에 전화를 걸면 이장이 이웃에 사는 삼촌을 불러 통화가 성사되곤 했다. 일 년에 한번 있을까말까 한 일이었다. 김일이 나오는 프로레슬링을 하는 날이면 작은 형과 나는 해가 지기도 전부터 조바심에 입안이 타들어가곤 했다. 저녁을 먹고 나면 우리는 TV가 있는 이웃집 대문 앞에서 심호흡을 한 뒤에 ‘지잉―’ 소리가 나는 초인종을 눌렀다. 그리고 주인 아주머니가 반기는 표정 전혀 없이 문을 열어주면 우리는 뻔뻔스럽게도 그 집 안방까지 따라 들어가 맨 윗목에 앉아 사관생도처럼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레슬링을 보았다.
그러니까 1970년대는 내게 집에서 모로 누워 마음껏 TV를 볼 수 있었던 시대였다. 그 때 박정희 대통령이 유신을 선포하고 독재를 하든 어쩌든 나는 ‘국민교육헌장’을 잘도 외는 총명한 소년이었고, 선한 부모님이 TV 끄고 공부하라는 잔소리를 안 하시니 참으로 편하게 문화생활을 누렸던 것이다.

그 즈음 시작된 프로그램이 하나 있다. MBC <장학퀴즈>라고, 지금도 EBS에서 이어받아 방송하고 있는,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퀴즈 프로그램이다. 제일모직 엘리트 학생복과 시장의 자웅을 겨루던 선경 스마트 학생복 광고가 끝나고 나면 다섯 명의 고등학교 2학년 학생들이 나란히 앉아 설익은 지식을 겨루었고, 이마가 넓은 젊은 아나운서 차인태가 진행을 보았다.
그런데 매주 일요일 아침에 방영되는 이 프로그램을 보면서 나는 나의 퀴즈 실력에 스스로 놀라게 되었던 것이다. <장학퀴즈>는 매주 주 장원을 뽑고, 주 장원이 다섯 명 모이면 월 장원을, 월 장원이 다섯 되면 기 장원을 뽑는 식이었는데, 내 실력은 웬만한 주 장원을 능가하는 것이었다. 물론 안방 이부자리에서 뒹굴면서 부담도 긴장도 없이, “찡―”이나 “스톱”도 없이 뱉어내는 답이니 스튜디오 조명 아래 전국에 방송되는 실전의 출전자들보다야 훨씬 쉬운 조건이었겠지만, 중학교 1학년짜리가 고2를 능가하는 실력을 보이는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아나운서의 질문이 채 끝나기도 전에 출연자들보다 먼저 척척 답을 내놓는 나를 보며 우리 부모님은 무척 흐뭇해 하셨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런 아이가 성적은 왜 그리 안 좋을고?” 이런 의문은 가지지 않으셨던 것 같다.
사실 초등학교 다닐 때부터 형, 누나의 교과서는 나의 양식이었다. 나는 고등학교 국사, 세계사, 지리 교과서를 만화책이나 소설책 보듯이 탐독했는데, 그러니 자연히 상식이 쌓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 시절 나는 조선왕조는 물론 고려왕조와 삼국의 역대 임금들을 줄줄이 외었고, 각종 역사적 이벤트를 연도별로 달달 외고 다녔다. 또 세계 여섯 대륙 모든 국가의 수도를 노래로 만들어 외었는데, 후에 소련이 해체되고 신흥국가들이 건국되어 모르는 수도 명들이 생겨날 때까지 내가 모르는 수도라는 건 세상에 없었던 게 사실이다.
이렇게 나는 나의 상식을 <장학퀴즈>를 보며 과시했고, <장학퀴즈>를 통해 다시 상식을 닦았던 것이다.
중3이 되고 어느 토요일이었나, 일찌감치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와 TV를 켠 나는 옷을 갈아입다 말고 TV수상기 앞으로 바싹 다가앉았다. 중학생 퀴즈 프로그램인 <중학생 퀴즈왕>에 친구 동수가 나오는 것이었다. 2학년 때 나와 한반이었던 그는 3학년이 되어서도 가끔 나와 함께 귀가하면서 서로 퀴즈를 주고받으며 실력을 겨루던 나의 교내 맞수였었다. 그런 그가 나에게 말도 없이 혼자 방송에 나가다니……! 결국 그는 2등으로 탈락했고, 다음 주에 나는 친구들을 몰고 예심을 보러 방송국으로 갔다. 방청석에 앉아 있는 200명가량의 중학생들을 놓고 PD가 문제를 냈다. 그리고 우리는 저마다 공책을 찢어 답을 적어 냈다. 채점이 끝나고 고점자들이 호명되었다. 우리 학교에서는 나와 내 옆에 앉은 친구가 일어섰다. PD는 우리 둘의 얼굴을 번갈아 보더니 옆에 서 있는 친구를 지명했다. 아아, 걔는 내 꺼 보고 쓴 건데!
그날 녹화를 끝내면서 아나운서는 마지막 고지를 했다, <중학생 퀴즈왕>은 오늘로서 끝이라고. 폐지된다고.
그 후 나는 다시 퀴즈놀이 같은 걸 하지 않았다. 고등학교에 진학해서도, 고2가 되어 출연 적령이 되어서도 나는 <장학퀴즈>에 출연해 볼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 대신 소설과 시를 닥치는 대로 읽어댔다. 어느새 나는 우울하고 냉소적인 문학소년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