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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묵시록
1983년의 화제작, 서영은의「먼 그대」

서영은의 「먼 그대」가 발표되었던 1983년, 나는 대학 졸업반이었다. 가까스로 386세대의 초입에 끼었던 세대 누구나 그러하였듯 미래는 불투명하고 현재는 암울했다.

한 회사의 사보 편집실, 다른 회사의 비서직에 서류를 제출하고 면접을 보았지만 연락이 오지 않았다. 괜찮은 학점, 나름 단정한 용모이니 그런 회사에는 무리 없이 채용되리라 생각했던 나는 진지하게 원인분석에 들어갔다. 아무래도 회색 원피스 차림의 여직원을 가리키며 혹 채용되면 저런 걸 입어야 하느냐 면접관에게 물은 게 잘못이었어. 눈을 뚱그렇게 뜨고 겁먹은 얼굴이었을 게 분명해. 그저 관행적으로 발행하는 잡지가 아닌, 사원의 입장을 대변하는 살아있는 사보를 만들어보겠다 큰소리 친 것도 마이너스였을 거야. 그런 얼뜨기 짓을 하다니. 이제 다시는 그런 바보 같은 질문은 말아야지, 다짐했지만 다른 면접의 기회는 생기지 않았다. 대학원에 진학할 학문적 열의도 없었으며 그 시절 선생님들이 여학생들에게 노상 얘기하던 영원한 취직-결혼은 도무지 나와는 거리가 먼 일로 여겨지던 시절이었다.

그 때의 내게 「먼 그대」는 가학과 피학의 충동을 동시에 불러일으켰다. 더, 더, 좀 더 강하게, 주인공의 인내를 응원하고 심리적, 물리적 폭력을 가하는 인물들에게 그것 밖에 못해? 충동질하고 싶어지는 거였다. 열심히 살았지만 세상은 나만 따돌리고, 그 모든 것을 감수하며 살았어도 아무 보상이 없다 싶어 울증이 도진 어린 여자에게 주인공 문자의 처지가 쉽게 이입된 탓이었다.

문자는 노처녀이다. 요즘 유행하는 골드미스와는 거리가 먼, 가르마에 새치가 희끗희끗하도록 무엇 하나 이룩해 놓은 것 없이, 한평생 있어봐야 별 볼일 없는 출판사에, 그것도 말석에서만 십년을 보낸 노처녀. 동료들은 그네의 존재 자체를 자존심 상해하며 따돌리지만 문자는 나이 어린 부장, 일직을 부탁하는 동료, 슬그머니 청소를 미루는 어린 후배에게도 불평 한마디 할 줄 모른다.

직장에서만 그러한 것이 아니다. 매운 연기를 마셔가며 물이 스미는 아궁이에 부채질을 할 때도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낙수가 지는 지붕, 개구멍 같은 출입문이 달린 용두동의 셋방 주인이 터무니없는 물세, 불세를 물리어도 문자는 달라는 대로 선선이 내준다. 마치 큰 여유가 있는 듯이나. 이 쯤 되면 누구라 할 것 없이 약간 모자라는 여인, 살짝 맛이 간 사람으로 여길만한 캐릭터이니, 문자의 이웃 여인네들이 돌았다는 시늉을 해보이고 함께 폭소를 터뜨리는 것도 전혀 무리가 아니다.

녹슨 캐비닛 이외에는 세간이라고는 없는 쪽방에 살면서, 따돌림을 당할 지경의 초라한 직책이면서도 문자의 뺨이 늘 발그레한 홍조로 빛나는 까닭? 당연히 사랑이다. 콩나물을 다듬든, 연탄불을 피우든, 지붕 위의 눈을 치우든 그를 생각하노라면 어딘가 높은 곳에 등불을 걸어둔 듯 마음 한구석이 따스해지는 남자, 한수를 위해 문자는 가난한 자가 일주일 내내 거친 솔과 젖은 걸레로 바닥을 힘들여 닦아 번 돈으로 성전 앞에 켤 양초를 사는 심정으로 저녁상을 마련하지만 한수는 사실 그런 대접에 걸맞은 남자가 아니다.

온방에 가득 찬 금빛을 보지 못하는 남자. 가만히 있어도 그 침묵이 노래임을 알지 못하는 남자, 심지어는 그녀의 몸을 만지면서도 잘 익은 과육에서 나는 것과 같은 향기가 자기 손가락에 묻어나는 것조차 알지 못하는 무디고 이기적인 남자……. 한수는 그런 사람이다. 요즘말로 차도남이라 할 만 하다고? 아니, 그는 찌질남이다. 잘 나가던 시절, 좋은 옷에 고급 구두를 신었을 때도 그러했거니와 여당 국회위원의 비서, 빈관반민의 광업소 소장직에서도 떨려난 처지의 한수의 행태는 가히 목불인견이다. 노상 방뇨 일삼기, 동네 구멍가게에 푼돈의 외상 깔아놓기, 끊임없이 사교비 요구하기……. 문자를 영원히 자신에게 붙잡아 둘 수 있으리라는 계산으로 아내의 등을 떠밀어 문자가 낳은 딸, 옥조를 데려오게 했을 때 한수의 파렴치는 절정에 이른다. 그런 주제에 “너까지 날 괄시하면 죽여 버릴테다”고 일갈하는 사람, 문자는 왜 이런 남자에게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일까. 대체 무엇 때문에? 이모의 청에 못 이기는 척 한쪽 눈이 짜부러진, 애 둘 딸린 홀아비 변호사에게 시집가 팔자가 확, 핀 채 살기까지는 아니더라도, 슈퍼마켓이 너무 잘되니 손을 보태달라는 미국의 오빠에게 가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취한 한수를 한번쯤 얼음 바닥에 내동댕이치는 과감함은 아닐지라도 그저 한수의 눈앞에서 조용히 문을 닫는 수준의 저항 정도는 보여주어도 좋지 않겠는가 말이다. 갑갑하다 못해 화가 날 지경일 즈음 문자의 독백이 들려온다.

고통이여, 어서 나를 찔러라. 너의 무자비한 칼날이 나를 갈가리 찢어도 나는 산다. 다리로 설 수 없으면 몸통으로라도, 몸통이 없으면 모가지만으로 라도. 나는 결코 항복하지 않을 거야. 그가 나에게 준 고통을 나는 철저히 그를 사랑함으로써 복수할 테다……. 지독하다 못해 섬뜩한 사랑이다.

아들을 버리고, 혈육에 대한 사랑까지도 밟고 비로소 영웅이 된 칭기즈칸을 빌어 옥조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말하는 문자를 보노라면 이 여자의 극기가 어디까지인가 궁금해지고 이 대목에서 우리는 서영은의 낙타를 만난다. “가엾은 자식, 엄마가 네게 지운 짐이 가혹하지? 하지만 너도 네 힘으로 네 속에서 낙타를 끌어내야 한다. 엄마가 고통의 늪가에 던져 놓은 이유를 그 낙타가 알게 해 줄 거야. 그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게 해 줄 거야”라는 문자의 탄식에서.

웬 낙타? 「사막을 건너는 법」, 「살과 뼈의 축제」에서 언뜻 언뜻 보이는 그 사막, 그 낙타이다. 문자는 거듭 말한다. 돌멩이조차 타고 부서져 모래로 변한 죽음의 땅, 보호해 줄 것은 그 자신의 살갗뿐인 열사(熱砂)의 땅에서 뚜벅뚜벅 걸음을 옮기는 낙타가 찾아 헤매는 것은 땅 속 깊은 곳으로 흐르는 푸른 물길, 신(神)의 길이라고. 사막의 오지에서 나오지 않는 사람들, 아무러한 안락함에도 유혹 되지 않는 이들만이 그 길을 간다고.

텁수룩한 머리, 때에 전 셔츠 차림의 한수가 등을 구부리고 자는 모습을 보며 문자는 생각한다. 이제야말로 이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게 아닐까. 깨어난 한수는 문자를 비웃듯 문자가 내민 돈 봉투를 받자마자 밥을 푸다 만 밥솥을 뒤로하고 집을 나선다. 멀어지는 그는 문자에게 더 한층 큰 시련을 주기 위해 더 높은 곳으로 멀어지는 신의 등불처럼 여겨지고 그것에 도달하고픈 열렬한 갈망으로 문자의 온몸이 갈기처럼 펄럭이는 장면으로 소설은 끝이 난다.

문자는 이미 알고 있는 것이며 우리도 이쯤에서는 싫어도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누구라 할 것 없이 사막을 가고 있다는 것, 우리들의 아이들, 수많은 옥조 또한 그 길을 가게 되리라는 것을. 잠깐의 휴식, 한순간의 달콤한 위안이 없지 않을지라도 삶이란 본래 가혹하다는 사실을.

작가 서영은을 말할 때는 자연스럽게 김동리를 떠올리게 된다. 한 인터뷰에서 동리 선생은 말했단다. 소설가는 남자로서 한번 해 볼만 한 일이라고. 한번 해 볼만 한 일을 제대로 해낸 남자의 오랜 연인이었으며 아내였던 서영은의 사랑이 「먼 그대」를 낳게 했을 거라 생각하는 것 역시 자연스럽다. 그 많은 풍문, 질긴 호기심과 질시들이 출판사 동료, 이웃, 한수 아내, 한수에 의해 거듭 가해지는 시련으로 변형되었을 것이므로.

1983년, 오랜 독재자가 죽은 직후 온갖 숫자를 단 사태들이 줄을 잇던 시절이었다. 광주의 일이 소문으로만 돌던, 문자를 좇아, 문자를 닮아 애써 고통을 찾아 헤매지 않더라도 충분히 어지럽고 힘겹던 세월이었다. 지독한 사랑, 가혹한 시련의 이야기, 「먼 그대」는 그 시절의 우울한 묵시록이다. 많은 것이 달라지고 풍요로워진 2011년에도 문자의 내면의 저항, 고통을 통한 길 찾기가 옛이야기로 읽히지 않는 것은…… 우리들이 아직, 언제까지나 사막의 길을 가고 있는 까닭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