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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권주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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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자리에 노래 없으면 재미없다. 술 마시며 부르는 노래도 좋지만, 술 마시자고 부르는 노래도 좋다. 술 권하는 나라의 술 권하는 노래다. 여러 노래가 있을 것이다. 그 중에 송강이 지은, 우리나라 최초의 사설시조 「장진주사(將進酒辭)」야말로 글의 내용만 본다면 권주가로 손색이 없다.
한잔 먹새그려 또 한잔 먹새그려.
곶 것거 산 노코 무진무진 먹새그려.
이 몸 주근 후면 지게 우희 거적 더퍼 주리혀 매여 가나 유소보장의 만인이 우러네나,
어욱새 속새 덥가나무 백양 수페 가기곳 가면,
누른 해, 흰 달, 굴근 눈, 쇼쇼리 바람 불 제, 뉘 한잔 먹쟈할고.
하믈며 무덤 우희 잔나비 휘파람 불제, 뉘우친달 엇더리.
읊으면 이백, 이하, 두보의 「장진주」와 시상이 비슷하다.
술에 대한 풍류 또한 그만이다. 그러나 나는 글 쓰는 일을 벗어나 한 시대의 정치인으로 이 사람,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잠시 짧게 살펴보면 그의 일생은 이렇다.
1580년 강원도 관찰사로 등용, 3년 동안 강원·전라·함경도 관찰사를 지내면서 시작품을 많이 남겼다. 이 때 「관동별곡」을 지었고, 또 시조 「훈민가」 16수를 지어 널리 낭송하게 함으로써 백성들의 교화에 힘쓰기도 하였다. 1585년 관직을 떠나 고향에 돌아가 4년 동안 작품 생활을 하였다. 이 때 「사미인곡」 「속미인곡」 등 수많은 가사와 단가를 지었다.
1589년 우의정으로 발탁되어 정여립의 모반사건을 다스리게 되자 서인의 영수로서 철저하게 동인 세력을 추방했고, 다음해 좌의정에 올랐으나 1591년 동인인 영의정 이산해와 함께 광해군의 책봉을 건의하기로 했다가 이산해의 계략에 빠져 혼자 광해군의 책봉을 건의했다. 이 때 신성군을 책봉하려던 왕의 노여움을 사 파직, 진주로 유배, 이어 강계로 이배되었다가 임진왜란 때 부름을 받아 왕을 의주까지 호종, 다음 해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얼마 후 동인들의 모함으로 사직하고 강화의 송정촌에 우거하면서 만년을 보냈다.
우리나라 가사문학의 최고봉이라 일컬어지는 송강에 대해 인물백과사전은 이 정도로만 말한다. 일생을 설명하는 말도 꼭 이런 식이다. ‘뇌물사건으로 동인의 공격받고’, ‘백성들의 교화에 힘쓰고’, ‘정여립의 모반사건을 다스리게 되자 서인의 영수로 철저하게 동인세력을 추방했고’, ‘동인인 이산해의 계략에 빠져 혼자 광해군의 책봉을 건의하고’, ‘왕의 노여움을 사 파직되고’, ‘동인의 모함으로 사직하고’…….
마치 어질고 곧은 선비 하나가 임금님을 향한 충절 때문에 온갖 고초를 다 당한 듯 보인다. 이게 바로 우리나라 백과사전 내용의 실상이다. 정철의 반대쪽에 있는 '정여립 사건'에 대해서도 이것 역시 정철이 사건을 날조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정여립이 모반하고, 정철이 치국하여 악의 세력을 추방한 듯이 보이게 쓰는 기술, 이게 우리나라 백과사전의 인물기술 방식이다. 역사적 인물에 대해 역사적 해석을 하는 게 아니라 후손들의 기술을 그대로 옮겨놓는 것이다.
거기에 우리가 초등학교 때 ‘시조’라는 걸 처음 배우며 ‘저기 가는 저 늙은이 짐 벗어 나를 주소’하는 정철의 시조를 배우게 되고, 고등학교 때 「사미인곡」 「속미인곡」 뭐 이런 걸 배우면서, 또 월탄 박종화의 ‘자고 가는 저 구름아’ 같은 걸 보면서 정철을 마치 충절의 대명사처럼 배우게 된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정철이 주도한 기축옥사를 짧게 한번 정리해보자.
기축옥사로 불리는 ‘정여립 모반사건’은 당쟁의 와중에 발생한 조선사 최악의 정치 모략극이다. 그 희생의 규모와 피해도 조선 4대 사화의 희생을 합친 숫자보다 적지 않다. 처음엔 영의정 유전, 좌의정 이산해, 우의정 정언신 등이 위관(재판관)이 되어 죄인들을 심문했다. 고향에 있던 정철은 차자(箚子)를 올려 정언신이 정여립의 일가이니 재판관으로 적당하지 않으므로 교체해야 한다고 주장해 결국 정철이 위관이 되어 심문을 담당하며 동인 타도를 진두지휘한다.
정여립과 공모했다는 죄로 이기ㆍ황언윤ㆍ방의신ㆍ신여성 등이 처형되었다. 정여립의 조카 이진길은 "지금 임금의 어두움이 날로 심하다"라고 쓴 편지가 발견되어 매를 맞아 죽었다. 이발ㆍ이길ㆍ이급ㆍ백유양ㆍ이진길ㆍ유덕수 등은 귀양을 갔다가 다시 잡혀와 곤장을 맞고 죽었다.
정철은 겉으로는 이발 등을 구하는 척했으나, 뒤로는 갖은 수법으로 이들을 옭아 넣으려 했다. 그는 평소 미워하던 사람들을 모두 역당으로 몰아 처단했다. 정개청은 정여립의 집터를 봐 준 적이 있고, 또 그의 저술 중에 절의를 배척한 내용이 있다 하여 경원으로 귀양 가 죽었다. 남명 조식의 제자 최영경은 정여립의 편지 한 장을 받은 죄로 길삼봉으로 지목되어 죽었다. 길삼봉은 진주에 사는 사람으로 나이는 60이고, 낯은 쇠빛이며 수척하고, 수염은 길어서 배까지 내려가고, 키가 크다고 했다. 어이없게도 최영경의 외모가 비슷하다 하여 길삼봉으로 오인 받고 죽어야 했던 것이다.
이발의 82세 된 어머니는 주리를 틀어 죽였다. 그의 11살 된 아들과 5살 된 아들도 죽였다. 좌랑 김빙은 바람병이 있어 날이 차면 눈물이 줄줄 흐르곤 했는데 여립의 죽음을 슬퍼해 울었다며 역모로 몰아 죽였다. 정인과의 이별이 안타까워 울었던 어떤 기생 하나도 이때 이별의 눈물 때문에 죽었다.
3년 동안 죽은 자만도 1천여 명이 넘었다. 이때가 1590년(선조 23) 2월이었다. 이러고 이태 후 임진왜란이 터졌다. 대체 이 광풍을 떠느라고, 또 이 광풍으로부터 자기 목숨을 보호하느라고 무슨 전쟁방비를 할 수 있었겠는가.
이후의 일 역시 그렇다. 당파의 힘은 모두 서인에게 가 있고, 서인 중에서도 노론에게 가 있었다. 그런 노론(서인)의 나라에서 정철의 「사미인곡」을 ‘이훈’과 ‘열명’에 견주고, 제갈량의 ‘출사표’와 견주며 이것을 읽고 눈물을 흘리지 않으면 그의 가슴엔 역심이 있다고 말하던 세상인데 누가 감히 '역모'의 위험을 무릅쓰고 정철의 지난날을 말할 수가 있겠는가.
그럼에도 조선중기부터 조선이라는 나라가 없어질 때까지 '임을 향한 충절의 표상'으로 정철과 그의 「사미인곡」이 이데올로기화되었다. 그 이데올로기는 1)반대파에 대해서도 그렇고 2)백성들에 대해서도 그렇고 3)또 왕에 대해서도 왕이 함부로 할 수 없는 노론의 힘으로(우리가 이렇게 당신의 자리를 지켜왔잖느냐 하는 식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하여 또 하나의 권주가를 뒤져본다. 고향에 내려가 어린 시절 벗들과 어울려 송이주 한잔 아니 할 수 없다. 국화든 쑥부쟁이든, 구절초든 달 아래 핀 가을꽃으로 담은 술도 좋다. 그렇게 하여 찾은 권주가가 바로 이정보의 「곳 피면 달 생각하고」이다.
곳 피면 달 생각하고
달 밝으면 술 생각하고
곳 피자 달 밝아
술 얻으면 벗 생각하네
언제면
곳 아래 벗 데리고
완월장취하려(달을 즐기며 오래 취하겠는가).
「장진주사」도 그렇고, 「곳피면 달 생각하고」도 누가 곡을 붙여 노래로 만들면 이런저런 술자리에서 엄청 불리지 않을까. 어쨌거나 이 글을 쓰며 내가 내린 결론은 술도, 사람도, 섞어서, 또 섞여서 마셔야 맛있다는 것. 그게 술과 사람의 탕평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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