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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르트헤이트의 기억, ‘현재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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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키아 음파렐레의 『마라바스타드 2번가』
관습이 아니라 엄연한 법과 공권력으로 자국민의 대다수를 차별하고 탄압하고 학살한 나라가 있었다. 작년 월드컵 개최국인 남아프리카공화국이다. 네덜란드계 백인의 언어인 아프리칸스어로 ‘분리’라는 뜻의 인종차별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는 공식적으로는 1948년부터 1994년까지 실시됐다. 그러나 남아프리카에 유럽인의 정착이 시작된 17세기부터 인종차별이 있었기 때문에 그 역사는 350년이 넘는다고 할 수 있다.
이 정책 아래에서 비백인은 공공시설을 백인과 분리해 사용해야 하고 흑인은 부족별로 지정된 지역에서만 거주해야 했다. 또 흑인에게는 기술이나 단순한 셈 같은 교육만 시키고 통행증 지참과 통행금지를 실시하는 등 아파르트헤이트 관련법만 수십 가지였다. 흑백 간 혼인금지는 물론이고 인종 간 수혈도 금지했다고 한다.
에스키아 음파렐레(1919~2008)의 『마라바스타드 2번가』(Down Second Avenue, 1957)는 아파르트헤이트가 극심했던 시절에 태어나 성장하고 제 나라에서 추방됐던 한 인간의 자서전 또는 자전소설이다. 에스키(작품 속 이름)는 어릴 때 시골 친할머니 댁에서 자라면서 마을어른들을 통해 부족문화를 익혔다. 남아프리카 원주민 특유의 관념과 사고방식이 영어로 표현됨으로써 신선한 활력을 얻는 것이 이 작품의 큰 매력이다.
부모와 합류한 뒤에는 프리토리아 마라바스타드의 집단빈민촌 2번가에서 살면서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의 잔학함을 눈으로 보고 겪는다. 어디서나 백인에게 하대 당하고 거지나 도둑 취급을 받고, 아무리 공부를 잘 하고 교사자격증을 따도 교사직은커녕 사무실 사환자리 구하기도 힘들다. 버스 승차를 거부당해 수십 킬로미터를 걸어야 하고 자존감을 지키려면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 경찰만 보면 겁에 질려 말조차 못하는 친구 아버지, 먹고 살기 위해 그악스레 아귀다툼하는 이웃들, 백인 경찰의 무자비한 단속 등 이 책을 읽는 것은 한 인간의 성장기를 읽는 데 그치지 않고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의 잔혹함을 목격하는 것과 같다.
아파르트헤이트를 고발한 책은 많지만 이 작품은 인종차별정책의 희생자가 쓴 본격적인 문학작품이라는 점에서 매우 가치가 크다. 다음은 책의 한 대목이다.
나는 불안정했다. 나의 감수성이 이번에는 내 적이 되었다. 어떤 백인의 사소한 말도 조금이라도 나를 향한 것이다 싶으면 나는 공격에 나섰다. 나는 만성적으로 정서가 불안해져서 생각을 제대로 하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더 급하게 분통이 터지곤 했다. (중략) 아프리칸스어로 ‘○○씨, 여기 서류를 들고 온 카피르 말예요’라고 하던 그 백인 여자. 비실비실 걸어와서 ‘짐, 종합우체국이 어디야?’라고 묻던 그 노인네. 우체국 직원은 계산대 너머에서 이렇게 소리를 질렀었다. ‘당신들 카피르 말야, 줄 똑바로 안 서면 처리 안 해준다!’ 낮에 당한 이런 저런 모욕들이 계속 새록새록 불쾌하기 짝이 없게 되살아나 괴로워 잠을 이루지 못했다.
카피르는 남아프리카 백인이 흑인을 천대해 부른 말로 ‘이교도’라는 뜻이지만, 영어의 ‘검둥이’(nigger)처럼 쓰인다. 인종차별은 당하는 사람이나 차별하는 사람이나 똑같이 비인간으로 만드는 행위라는 것이 작품 전반에서 드러난다. 음파렐레는 이렇게 말했다.
“평생 구덩이 속에서 폭군에게 사다리를 내려달라고 매달리는 것은 희생자가 품어야 할 화두가 아니다. 피 흘리는 희생자의 처지에서 자신이 진정 바라는 변화를 잘 아는 진취적인 선구자의 위치로 나아가기 위해 우리는 아직도 정신을 바로 잡아야 한다.”
음파렐레는 『마라바스타드 2번가』 외에도 여러 소설과 에세이로 아파르트헤이트를 고발하고 신음하는 비백인들의 처지를 알려 서구세계에 큰 충격을 주었고, 1960년대에는 노벨문학상 후보로도 여러 차례 이름이 거론됐다. 추방된 후 해외를 떠돌다 21년 만에 영구귀국한 뒤에는 남아프리카의 토속문화 발굴과 보존에 평생을 바쳤다. 이를 기리기 위해 1999년 넬슨 만델라 대통령은 음파렐레에게 서던크로스 훈장을 수여했다.
* 『마라바스타드 2번가』는 재단의 외국문학 번역지원을 받아 대산세계문학총서로 발간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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