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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수길 장편소설 『통로』의 번역을 마치고

안수길의 장편소설 『통로』(정음사, 1985년)을 대산문화재단의 한국문학 번역․출판지원 제도의 지원을 받아 2007년 8월부터 일 년 반 동안 작업하여 번역을 완료했다. 그리고 공동 번역자인 독일 작가 알리사 발저가 윤색한 것을 이메일로 보내와서 내용과 형식 그리고 필요 이상으로 독일어에 충실하려고 집착하지 않았는가를 살피면서 부분적으로 수정했다. 독일 튀빙엔 소재 콘쿠르스부흐 페라그 클라우디아 게르케 출판사가 현재 제작 중으로 곧 시판된다. 이 책보다 앞서 2003년 말 상재한 안수길의 단편소설 10편을 모은 『어떤 연애 Eine Unmoegliche Liebe』(안인길․알리사 발저 공역)가 좋은 평가를 받았다. 표제작 이외에 「제삼인간형」「취국」「이런 춘향」「이라크에서 온 불온 편지」「효수」「꿰메 입은 바지」「나자 모자니크」「삼인행」「망명시인」 등을 수록한 단편소설집이다. 이 작품들에 대해 독일의 유력 일간지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네도 대단히 긍정적인 내용의 긴 서평을 실었다(2004년 7월 9일자). ‘그의 작품들은 현대한국문학의 전환점을 이루었다. 그의 파란만장한 삶은 한국의 역사를 명료하게 끌어안고 있으면서 다층적이다. 그리고 자세히 읽어보면 분단된 민족의 정신을 들여다볼 수 있다’라고 중앙일보 베를린 특파원 유권하 기자가 짧게 정리했다.

문필가인 게르케 사장도 안수길의 작품이 아주 훌륭하다고 감동했다. 그리고 이 작가의 장편소설이라면 출판하겠다는 뜻을 밝혀 번역 및 출판계약을 맺고 오늘에 이르렀다. 공동번역자가 그새 장편소설 『처음엔 밤과 음악이 있었다』을 출간하여 크게 성공을 거둬 외국체류는 물론 50군데에서 사인회를 갖는 등 대단히 바빠 『통로』의 상재가 늦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11월 3일 백세를 맞는 안수길의 생일 달에 이 책이 독일어권 서점에 꽂히는 게 시의적절하다는 느낌이 든다. 안수길은 그토록 많은 작품을 썼지만 생전에 전집의 발간을 보지 못했다. 그의 탄생 100주년 기념으로 16권짜리 전집이 선보이는 걸 크게 축하하고 싶다. 『통로』의 독일어 번역본도 이에 한 몫하게 되어 여간 뿌듯한 게 아니다. 고인도 흐뭇할 것이다.

▲ © 운영자

『통로』는 주인공 윤원구 노인이 70세에 쓴 퍽 주관적이고 비약이 많은 문장으로 쓴 회고록을 자료로 그의 3, 4 살 때의 함흥만세교 다리밟이에 대한 회상에서 시작하여 아버지가 객사한 후 15살에 할아버지가 건재한 부산으로 도주하는 시기까지를 다룬 소설이다. 때와 장소를 참을 수 없어 도주하는 모티브다.

작가 안수길도 15살까지 고향인 함흥과 흥남에서 보냈다. 번역자 역시 흥남에서 나서 15살까지 자라다가 월남하여 부산에서부터 남한에서의 인생을 시작했다. 『통로』는 작가가 1948년에 서울로 이사온 후 더 이상 찾아갈 수 없었던 고향에 문학의 기념비를 세운 작품이다. 정치 경제 문화 풍광 인간관계를 총망라한 함흥 흥남 지역의 일대 파노라마다. 번역하는 동안 재미있었고 가계의 사실관계도 확인할 수 있어서 개인적으로도 고맙고 의미 있는 작업이었다.

작품 속에 묘사한 한복 정장의 각 부분과 각종 민속놀이 등 독일어 독자들에게 생소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고유한 문화를 적절하게 알릴 수 있는 독일어 어휘를 찾아내고 만들어내는 데 불안한 모험을 피할 수 없었다. 그러나 공동번역자를 이해시키는 데 성공하여 마음이 가볍다. 이 소설의 대화에는 함흥방언이 들어있다. ‘지방은 세계문학의 장소다. 지방에서 언어가 풍성해지고 이야기가 나온다(하인리히 뵐).’ 한국문학이 세계문학이라는 뜻이다. 함흥방언은 분명히 한국문학을 살찌우는 데 이바지한다. 그러나 번역은 다른 문화와 언어를 가진 독자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번역은 되도록 원문에 충실해야 한다. 번역자가 임의로 해석해도 안 되고 필요 이상으로 번역어에 맞춰도 안 된다. 그래도 말의 구조나 개념, 어감의 차이 때문에 약간의 변형은 불가피하다. 따라서 원문의 언어와 번역어 그리고 그 나라의 역사와 문화 등에 대단한 소양과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통로』를 번역하면서 주로 독일어판 러시아 작품을 읽었다. 톨스토이의 『안네 카레니나』와 『단편소설집』, 도스도예프스키의 『죄와 벌』, 푸쉬킨의 『중단편 소설집』, 고골의 『죽은 영혼』 등이다. 좋은 독일어로 쉽게 읽을 수 있는 것들이어서 이 작품들의 문체에 내 번역이 영향을 받았으리라 믿는다. 이 소설들에서 독일어 방언을 찾아볼 수 없었다. 번역할 때 원문의 방언을 번역어의 방언으로 반드시 옮겨야 한다고 생각지 않는다. 『통로』에서 이웃동네 아이들끼리 싸우는 장면이 나온다. 윤색 문이 아이들의 독일어로 곱게 바뀌었다. 독일어판 푸쉬킨의 운문소설 『오이겐 오네긴』의 번역자 후문은 몇 군데만 원문의 운을 맞췄다고 했다.

독일에서는 마르케의 작품이 번역으로 나오면 언제나 베스트셀러 대열에 오른다. 뵐도 그를 대단히 놀라와했다. 독일작가는 그런 작품을 쓸 수 없다고 부러워했다. 알리사 발저도 독일독자들이 남미문학을 선호하는데 한국문학이 이와 닮았다면서 자신들을 위해서도 한국문학을 많이 번역해 달라고 부탁한바 있다. 한국문학은 분명히 경쟁력이 있다. 모든 걸 한국 사정 중심으로 작품을 써야 한다. 외국무대나 외국사정을 소재로 삼으면 성공하기 힘들다고 본다. 사실관계의 내용이 틀릴 수도 궈 사번역할 때에도 확인하는 조사과정에 품이 많이 들어 짜증난다.

안수길의 작품 중에 ‘그는 술을 사랑할 정도로 마신다’는 문장이 있다. 술을 조금 마시면서 즐긴다고 옮겼다. 상큼한 옷차림, 상큼한 맛, 상큼한 내음 등은 멋진 옷차림 schick, 녹아나는 입맛 lecker, 향기로운 내음 duftend 등으로 조금씩 번역어에 맞춰 바뀐다. 바뀌면 우리말의 맛이 떨어진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우리말의 어감에 너무 민감하면 번역하지 못한다. 하인리히 뵐은 문학을 <tun-행하다> <machen-만들다> 이 두 동사라고 했다. 한 동사가 가진 뜻이 수십 가지다. 두 단어가 문학의 모든 것을 뜻한다. 다른 어휘도 마찬가지 경우가 많다. 번역어 표현이 단순해 보여도 그쪽 독자들은 그 단어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대로 느낀다. 이렇듯 번역은 번역자의 경험이 묻어나게 마련이다. 그리하여 중역은 금물이다. 영어독자를 겨냥한 독일문학을 우리말로 옮겼을 경우 올바른 독일문학을 만나지 못한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한국문학을 영어에서 스웨덴어로 번역하면 안 된다는 뜻이다.

게르케 사장은 이번 훌륭한 한국문학을 내놓는다고 이미 광고를 시작했다. 다음 작품은 이번처럼 오래 걸리지 말라고 했다. 내가 하인리히 뵐, 막스 프리쉬, 마틴 발저의 작품을 우리말로 많이 번역했던 것처럼 한국문학을 독일어로 옮기는 독일작가들이 나오리라 믿는다. 그들을 통해 한국문학을 해외로 진출시키는 게 한국문학 소개의 올바른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