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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비평의 자리를 묻다 ❸ 조서調書가 된 편지, 혹은 조서早逝에의 미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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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작품은 미래의 세대를 겨냥하지 않는다.
그것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죽은 자들에게 바쳐지며,
작품을 인정하거나 거부하는 것은 그들이다.
그러나 이 죽은 자들은 한 번도 살아있었던 적이 없다.
- 장 주네,『 자코메티의 아틀리에』
비평가 동지들께.
연일 많은 비가 퍼붓는 여름입니다. 빗소리에 섞여 부디 모든 말이 한철 얼룩으로 뿌옇게 번지다가 흔적 없이 사라지길 염원 또는 경원敬遠하며 몇 줄 올립니다.
비록 저는 시를 쓰는 사람이지만, 한 편의 시가 사람이 추구할 수 있는 모든 가치를 초월해 존재할 수 있다고는 믿지 않습니다. 하지만 어릴 적 한 때나마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너무 솔직한 고백을 하게 된다면 말하는 저나 듣는 여러분이나 공히 부담스럽겠지만, 이 자리에서 저는 마음의 빗장을 조금이나마 느슨하게 풀어놓은 채 조용히 주절거리고 싶습니다.
무슨 영문인지 모르지만 문득, 스스로의 결백을 확신하면서도 억울하게 조서를 쓸 수밖에 없게 된 자가 떠오릅니다. 그는 분명 죄가 없습니다. 그를 취조실에 앉힌 건 어떤 오해나 착오, 또는 자신이 알지 못하는 어떤 음모 탓일 수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 아무리 결백을 주장하면서 목소리 높여본들 무슨 이득이 있겠습니까. 그는 자기 자신의 순연한 침묵에만 귀 기울여야 할 겁니다. 오해 받는 자의 가장 큰 무기가 침묵이니까요. 그렇다고 제가 어떤 오해에 휘말려 이런 글을 쓰고 있는 건 아닙니다. 무슨 궁극의 이해를 바라는 것도 아닙니다. 미리 말했듯 글을 쓰려고 책상에 앉는 순간, 엉뚱하게도 ‘억울한 피의자’의 모습이 떠올랐을 뿐입니다. 영문을 알 수는 없지만, 괜히 비장해져서는 별로 알고 싶지도 않은 정황들을 추적해 볼 마음 따윈 없습니다. 그냥 우중충한 날씨 탓이라고만 해두죠.
어릴 적 이야기를 하려던 참이었죠.
그때가 정확히 언제인지는 저도 잘 알 수가 없습니다. 대략 처음 시를 끼적이기 시작하던 무렵, 그러니까 열일곱이나 열여덟 살 무렵 정도일 겁니다. 그 당시 저는 참 음울하고 게으르고 삐딱하기까지 한 소년이었습니다(말해놓고 보니 정말 조서 쓰는 기분이네요). 한참 활달하게 기운생동 해야 할 시기에 왜 그렇게 혼자 어두운 굴을 파고 살았는지 스스로 생각해봐도 잘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아무튼 스스로 조장한 안개더미를 눈 그늘에 매달고 다니던 그 무렵 제 눈빛을 총총하게 만들었던 몇 안되는 기제 중 하나가 문학이었습니다. 그것도 오래전에 죽은 사람들의 작품일수록 더 강한 밀도로 제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반면, 살아있는 작가, 그것도 한반도 안에서 여전히 활동하고 있는 작가나 시인의 작품엔 잘 손이 가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모르겠습니다. 갓 문학에 눈뜬 신출내기 주제에 모종의 경쟁의식이 있었다고는 차마 말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제가 상상할 수 있는 삶의 가장 멀고도 깊은 지점에서 홀로 불꽃을 태우고 있는 듯한 신비감을 현존하는 시인들에게선 느낄 수 없었다고만 말하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게 시는 미지에의 동경이나 마찬가지였지요.
제가 처음 목격한 시의 입김은 삶과 죽음의 모든 질곡과 억압들을 한 몸으로 통과해나간, 머나먼 곳의 바람소리와도 같았습니다. 그러니 자연, 그것은 삶을 거부하지도, 죽음을 두려워하지도 않는 무소 불위의 에너지를 품고 있었습니다. 이미 죽었으되, 눈빛만은 여전히 형형한 모종의 친족과 해후하는 기분이었다면 과장일까요. 어쨌거나 저는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삶 이전과 죽음 이후에만 골몰했을뿐, 삶의 실질적 내용을 채우는 일에는 무지하고 무감했습니다. 제게 세계는 이 세계 바깥의 그림자에 불과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런고로, 그 당시 제가 문학적으로 체감하는 시간은 당대 이전이거나 당대 너머였지요. 그래서, 일찍 죽고 싶었습니다. 극렬 사춘기다운 포즈일 수도 치기일 수도 있지만, 어서 죽어 내 마음을 흔들어놓은 문장의 주인들과 맨몸으로 얘기 나누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이십 여 년이 훌쩍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죽지 못하고 살아있습니다. 이게 행복인지 운인지, 불행인지 불운인지 아직도 잘 분간이 안 갑니다. 게다가 여전히 옛 애인을 그리워하는 맹추처럼 응대가 없는 문장들을 허공에 써 날리고 있습니다. 천형일수도 천분일 수도 있을 텐데, 살아있는 동안엔 해답이 나올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끝끝내 승부가 나지 않는 지리한 싸움의 연속이라는 느낌도 지울 수가 없군요
너무 암울한 방향으로 이야기가 흘러가는 것 같군요. 그렇지만.
죽음이니 천형이니 하는 단어들의 무게가 스스로도 버겁지만, 그렇게 과도하게 말의 밀도를 끌어 올리지 않으면 단 한 마디도 온전하게 풀어내지 못하는 습성 또한 그 시절부터 길러진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다가 하나의 글이 끝나고 나면 모종의 해방감과 일탈한 심정이 몰려들면서 전에 없던 의욕이 되살아나곤 하지요. 그렇게 탈각했다가 다시 고꾸라지고 고꾸라진 그대로 또 다른 링을 찾아 꾸역꾸역 기어가는 살신殺身과 변신의 지난한 반복. 그러니 죽음은 제가 스스로의 기운을 북돋기 위해 줄곧 바꿔 쓰는 축제의 가면과도 같습니다. 최대한 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삶의 모든 임계지점을 일순간 포괄하여 스스로는 물론 세계의 모든 규범들로부터 이탈했을 때, 삶은 돌연 유쾌하고 견딜만한 놀이터가 되기도 합니다. 어쩌면 저의 사춘기는 목숨 건 싸움을 놀이로 승화시키고 싶은 호전적인 열기로 가득했던 것 같기도 합니다. 그만큼 추락에의 예감과 직결된 두려움 또한 강렬했고요, 물론, 지금은 생각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기운이 달리는 탓도 있지만, 그만큼 많이 성숙했다고 뻐기고 싶은 마음도 있습니다. 졸렬해 보인다면 콧방귀나 한번 날려 주십시오.
자칫 지루하게 읽힌다면 사과드립니다. 저의 어린 시절 생각들이 일종의 강박관념으로 여겨진다면 그 자체로 인정하겠습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더 들을 바 없다 판단하신다면 모두冒頭에 걸어놓은 장 주네의 문구만 새삼 음미하시고 페이지를 넘기셔도 상관없습니다. 저보다 나은 싸움꾼은 이전에 도 많았고, 지금도 많을 것이며, 앞으로도 많을 겁니다. 속 보이는 겸양이나 자만은 아닙니다. 문학을 논하며 섣불리 일등을 골라 뽑지는 말아주셨으면 하는 바람만 밝힐 뿐입니다. 시대와 언어, 국가를 총괄해 문학의 질서는 마구 맞물리고 역전되고 뒤섞이면서 변전하기 마련입니다. 따라서 당대의 어떤 편협한 시점에서 문학의 등위를 매기는 건 세계의 폭(시공을 모두 포함합니다)을 스스로 한정하면서 자위에 빠지는 좀팽이들의 잔치에 불과합니다. 마차가 다니던 시절이나 최첨단 스마트폰이 언어의 형질을 변형시키는 지금이나 문학은 당대의 한 지점에서 계측된 한시적 명부‘( 名簿’도 맞지만 ‘明部’에 더 가깝습니다)만으로 판단 불가한 인간정신을 반영합니다. 문학은 때로 산자의 영혼에 깃든 죽은 자들의 음성일 수 있습니다. 또는, 산 채로 스스로의 어둠을 키우는 누군가의 유일무이한 젖과 꿀, 그리고 술과 독일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잘 닦여진 햇볕 아래에선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을 수 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자신만의 말을 내뱉으며 현세의 빛과 어둠을 견뎌내는 힘을 스스로 고양하기 위해 고독이라는 감옥소로 자진해서 걸어 들어가기도 합니다. 정말 귀 밝고 눈 맑은 이라면 그 소리와 소리의 메아리, 그 형체와 형체의 그림자 또한 통시적으로 밝혀내 화답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제 어릴 적 생각이 틀리지 않다면, 문학은 산 자와 죽은 자, 한 세계와 또 다른 세계가 교호 내지 길항하면서 흘려 놓은 정신 고고학의 사료들일 뿐, 그 자체 완전한 정식으로 고착된 개념을 정면으로 지시하지 못합니다. 그 안에서 끊임없이 의미를 변환시키며 저들 나름(모든 언어는 인간의 의도에서 출발해 스스로를 배리하는 반의도의 흔적들에 불과합니다)의 컨텍스트를 재구성할 뿐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시대의 가치와 법도를 한정적으로 웅변하거나 울궈내는 작품은 오로지 먹고 자기 위해서만 지어놓은 집처럼 갑갑하고 심심합니다. 거기엔 창문도 정원도, 심지어 변소도 없습니다. 당대만 보는 자는 당대조차 제대로 보지 못한다고 역설한 사람이 누구였는지 새삼 기억나지 않습니다만(혹시 기업가였는지도 모르겠네요), 좀 더 깊은 우물에서 우러나오는 웃음 또는 울음을 길어내는 게 제가 아는 문학의 궁극입니다. 무슨 변변찮은 문학적 연대기를 구술하고자하는 의도는 애초부터 없습니다. 제가 겪었고 판단하는 문학적 노정이 문학이 지향할 수 있는 최선의 목표라는 말을 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어느 특수한 문학적 경우가 본질적인 지향지점인 양호도되는 건 저 스스로 늘 경계하는 바입니다. 스스로에게조차 보상 받지 못할 문학적 울분을 허울 좋은 공분公憤인 양 침 튀기며 하소연하고 싶은 생각 또한 없습니다. 저는 다만, 쓰면 쓸수록 욕망이 고갈되고, 욕망이 마르면 마를수록 더 극심해지는 어떤 갈증의 실체를 에둘러 전할 수 있을까 나름 고심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인정認定과 인정人情에의 목마름이 문학의 한 출발요인이 될 수는 있겠으나, 그것들이 문학의 최선이나 최후가 되어서는 안 될 노릇이라 아직도 생각합니다. 무슨 얄궂은 도덕률도 편벽된 망집도 아닙니다. 그저 문학에의 기나긴 열망이 한때의 욕망충족이나 섣부른 위안으로 변질될까 저어하는 만년사춘기의 순박한 신념으로만 읽힐 수 있길 바랄 뿐입니다. 명색 시인인데, 언제 죽더라도 때갈 좋게 죽어야지 않겠습니까. 다시, 콧방귀뀔 타임입니다.
빗줄기가 여전히 굵습니다. 빗줄기가 자판을 드세게 두들겨대는 건 아닌가싶은 착각이 들 정도로요. 때문에 글이 장황하다면 제 생각이 문제가 아니라 빗줄기의 소동 탓입니다(콧방귀 한 번 더 받겠습니다). 아무튼 여러모로 신산하고 부질없는 생각과 싸우다 기운이 메마르던 차에 말할 기회가 주어졌을 뿐입니다. 그리하여 제가 할 수 있는 말을, 저 자신부터 되새기라고 늘어놓았을뿐입니다. 오해도 이해도 여러분의 몫이고, 자괴도 자긍도 저의 몫일 뿐입니다. 내내 평안하시고, 그 평안함과 잘들 싸우시길.
2011年雨中盛夏
不肖詩人過客姜正拜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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