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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배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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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기는 다시금 나의 20대, 1960년대 후반으로 돌아간다. 1964년 열아홉 나이로 초등학교 교사가 되어 2년 반 동안 교직생활을 하다 육군에 입대하여 월남사병으로까지 가 거칠게 근무하다가 제대하고 교직에 복귀한 것은 1969년 9월 1일. 경기도 북쪽 연천. 발령장을 들고 찾아간 학교에서 한 여교사를 만났다. 불그레한 얼굴이 동글고 코가 발름한 여자 선생님. 인천이 집이라 했고 나이는 나보다 한 살 아래. 예뻤다. 그냥 나에게만 세상에 없이 예뻤다.
저 여자다, 싶어서 대책 없이 빠져들고 말았다. 어렵게 접근을 시도했지만 번번이 잘 되지 않았다. 이편이 모자랐던지 저편이 고집스러웠던지 그 둘 중의 하나였던 모양. 어렵게 나를 이해하고 내편으로 넘어오는가 싶었는데 겨울방학을 맞아 인천의 자기 집으로 가 있으면서 마음이 확 바뀌어 버렸다. 겨우 여섯 달 사귄 믿음성 없는 나보다는 평생을 키워주고 가르쳐준 부모님 편으로 그녀가 돌아버린 것이다.
방학이 끝나자 일방적으로 나에게 결별을 선언한 그녀는 나를 교무실 옆자리에 앉혀두고 딴 남자와 맞선이란 것을 보고 약혼식을 올리고 또 결혼식을 하고 끝내는 분홍색 투피스 차림으로 의기양양하게 나타났다. 피가 거꾸로 흐르는 것 같았다. 정말로 죽고만 싶었다. 순간순간 살아서 숨 쉬는 것이 힘겹고 또 원망스럽고 그랬다. 온갖 악몽으로 시달리는 밤이 지나고 나면 왜
내가 죽지 않고 살아있나 그것만 원망스러웠다.
더럭 병에 걸리고 말았다. 저대로 놔두면 객지에서 죽을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에서 아버지가 손을 써서 고향의 학교로 불러 내렸다. 새로 발령받아 찾아간 고향의 학교도 서름서름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근무지 학교가 고향집하고도 멀어 통근이 불가능했으므로 하는 수없이 학교 부근에 방 하나를 얻어 자취하기로 했다. 다시 외할머니가 오시어 밥을 해주시기로 했다.
외할머니. 나의 외할머니는 나의 생애 가운데 어려운 고비 때마다 오시어 나의 밥을 해주시고 함께 살아주신 분이다. 초등학교 시절 줄곧 그랬고, 사범학교 학생시절 그랬고, 군대 가기 전 교사시절 또 그랬다. 외할머니와 함께 살다보니 조금씩 마음이 안정되기 시작했다. 사람의 마음이란 묘한 것. 당시에는 죽을 것만 같이 힘들어도 시간이 지나고 나면 조금씩 바뀌기 마련. 숨결이 고요해지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눈길이 조금씩 부드러워지기 시작했다. 새로운 눈이 열리고 있었다. 이전에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고 들리지 않던 소리가 들렸다. 신선한 느낌의 회복, 생의 감각이라 그럴까. 이전에 보던 주변 풍경이 아니었다. 모든 게 새로웠다. 아, 내가 아직도 살아있구나! 그런 느낌이 돌아왔다. 정말로 나도 사람답게 한번 살아보고 싶었다.
그러고 보면 시 쓰는 사람에게 인생에서의 실패는 그냥 실패가 아니고 시련 또한 그냥 시련이 아니다. 그 다음 무언가 좋은 것, 새로운 것으로 되돌아오게 되어 있다. 살고 있던 마을은 대숲이 많은 마을이었다. 동네가 온통 대숲이었다. 뒤울안에만 대숲이 있는 게 아니라 울타리까지 대숲이었다. 바람이 불거나 비가 오면 온통 대숲 소리로 하늘을 가리고 땅을 가렸다. 처음엔 심란하던 소리가 점점 정다운 소리로 들리기 시작했다.
새로운 시가 쓰여지기 시작했다. 긴 것도 아니었다. 네 줄짜리 시. 그것들을 여러 편 모아 옴니버스 형식으로 구성해서 신춘문예에 낸 것이 바로「대숲 아래서」이다. 네 줄짜리 한편 한편으로는 승산이 없겠다 싶어서 깜냥은 꾀를 부린 셈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시인이 되어 명성을 얻고 교사 입장에서 교장으로 승진하면 꼭 한번은 그녀를 찾아가 만나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은 치졸한 복수심에서 나온 헛된 소망일 따름. 살아가면서 그것을 천천히 깨닫게 되었다.
지금 와선 어떤가? 오히려 그녀가 매우 고맙다. 그녀가 준 시련에 감사한다. 그 때 그녀가 나를 불쌍히 여겨 순순히 받아들여주었다면 나는 어떤 사람으로 살았을까? 필경은 평범하고 평범한 생활인으로 일생을 보내고 말았으리라. 때로는 배반(?)이 감사하다. 버림받음이 축복이다. 그렇다면 그녀의 배반은 나에게 아름다운 배반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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