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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에 의해 불리는 노래가 된 시

▲ 정철훈 © 운영자

생각해보니 누가 내 얼굴을 핥고 있다. 광주 무등산 아래 서석동의 한 누옥. 포대기 같은 걸 깔고 툇마루에 누워 졸린 듯 하품을 하고 있는 내 얼굴을 핥은 건 얼룩무늬 사냥개 포인터다. 녀석도 나도 두세 살 안짝. 아니, 그것은 나와 한 날 한 시에 함께 태어난 또 다른 존재였는지도 모른다.
뜨락 한 켠의 텃밭에는 오이넌출과 상추, 호박이 주렁주렁 열리곤 했다. 아버지는 동물과 식물을 마냥 좋아해 양계도 하고 토끼도 키우는가 하면 선인장에 일가견이 있어서 아예 비닐하우스를 만들어놓고 접붙이기를 통해 품종 개
량을 하기도 했다.
친구분이 놀러왔을 때 아버지는 커피와 함께 깡통에 든 밀크를 내놓으며 나에게도 한 스푼을 떠먹였는데 그 부드럽고 달콤한 맛이 아직도 혀끝에 남아 있다. 아버지가 애지중지하는 것은 또 있었다.
창고에는 대패와 수은 한 방울이 흰 눈동자처럼 움직이던 수평이며, 크기와 날이 각기 다른 여러 종류의 톱과 끌, 그리고 나무를 고정시키는 조임쇠까지 웬만한 목공소 하나쯤은 거뜬히 차릴 만큼의 공구가 가지런히 매달려 있었다.
지금도 나는 아버지가 만든 다섯 칸짜리 대나무 낚싯대 하나를 가지고 있다. 굵은 대나무의 속을 파내고 작은 대나무를 끼워 넣은 뒤 각각의 양 끝에 페인트로 무늬를 그려 넣은 정교하기 이를 데 없는 낚싯대다. 아버지는 의자며 선반이며 화분대며 뭐든 뚝딱 만들어내는 마술사의 손을 가졌다.
집안에 널려 있는 이런 저런 소도구와 닭이며 토끼며 선인장들은 아버지의 꿈을 보여주었다. 꿈과 현실. 그 괴리감을 알게 된 건 내가 아버지를 따라 유치원에 갔을 때다. 아버지는 유치원 교사였다.

▲ 2010년 11월 전남 곡성군 오산면 봉동리 고향마을 어귀에서 열린 정근 시비 제막식에서 © 운영자

4남1녀 가운데 막내로 태어난 아버지는 해방 직후 월북한 세 명의 형님들 때문에 연좌제의 감시망이라는 가혹한 현실에 그을려야 했고 그 반대급부로 선택한 것이 인간의 순수성을 간직하고 있는 아동교육에로의 투신이었던 것이다. 난 아버지가 재직 중인 광주교대부속 영생유치원에 다녔다. 아버지가 자전거 뒷좌석에 나를 태우고 유치원으로 가던 기억이며 도시락을 세 개씩 싸들고 가서 하나는 아버지가, 하나는 내가, 또 하나는 집이 가난해 점심을 굶던 아이에게 건네주던 기억이 엊그제 같다.
때로는 유치원까지 걸어가기도 했는데, 가슴에 품었던 도시락의 온기가 지금도 느껴진다. 친구들이 새로운 노래를 배울 때면 아버지는 내게 선창을 시켰다. 그때 일을 떠올리면 얼굴이 화끈거린다.
숫기 없던 내가 아버지의 호명을 받고 하는 수 없이 일어나“어린 복동이가 부뚜막에 앉아 울고 있어요. 엄마아, 엄마아, 엉덩이가 뜨거워”라고 선창을 하던 일이라니. 그때는 철이 없어 나는 아버지가 유치원 교사라는 것이 부끄러웠다. 요즘도 그렇지만 당시엔 남자 유치원 교사가 거의 없던 시절이다.
5년제 광주 서중을 졸업하고 전쟁 때문에 대구사범대학을 중퇴한 아버지는 젊은 시절부터 일찌감치 어린이 교육현장에 몸을 담았다. 어릴 때 외가에서 어깨 너머로 배운 피아노가 아버지를 자연히 음악으로 이끌었고 그런 지향성은 전남 지역 동요보급운동의 효시라 할 수 있는 새로나소녀합창단 창단으로 결실을 보았다. 난 아버지가 왜 동요 작곡가가 되었는지 곰곰 생각해 본다.
아버지의 외가인 정낙교 댁은 광주천 근처 양림동에 아흔아홉 칸 저택을 소유한 광주의 부호였다.
광주 서중 시절, 외가의 너른 정원에서 키우던 말을 타고 놀던 아버지는 총각 때 전국체전 마장마술 종목에 전남대표로 참가했을 만큼 승마 기술도 남달랐다고 한다.
양림동은 1904년 미국선교사들이 목포에서 배를 타고 들어와 선교 중심지로 터를 잡은 근대문화유산의 발원지이기도 하다. 지금도 남아 있는 양림교회는 그때 지어진 유적인데 어렸을 때 아버지는 교회당에서 울려나오던 풍금 소리를 듣고 빨려 들어가듯 교회 문을 열었다고 언젠가 내게 들려주었다.
외할아버지인 정낙교 어른의 둘째 아들 석호는 일제 당시 독일로 건너가 베를린대학에서 성악을 전공한 분으로 감미로운 미성을 가진 테너였다. 그러니까 외삼촌이 독일에서 귀국할 때 가져온 그랜드 피아노가 외가의 거실에 있었다는 것도 어린 시절, 늘상 외가를 찾았던 아버지의 음악적 기질에 일조를 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아저씨, 아저씨, 우체부 아저씨, 큰 가방 메고서 어디 가세요”로 시작되는「우체부 아저씨」를 아버지가 작곡한 것은 내가 태어나기 전인 1956년쯤이다. 그 가사에 나오는“시집 간 누나가 내일 온데요”는 목포로 시집 간 누나를 생각하며 쓴 노랫말이라는 것을 나 역시 나이 들면서 알게 되었다. 광주와 목포 어간은 아버지의 꿈이 영글던 원체험의 공간이었던 것이다. 광주를 떠나 서울로 이주한 것은 내가 광주교대 부속 초등학교 2학년 봄방학 때였다. 아버지는 이사로 인해 내가 학교를 결석할까봐 일부러 봄방학을 택한 것이다.
이사 가기 며칠 전, 나는 아름드리 히말라야 시다가 팔을 벌리고 서 있는 교정을 몇 바퀴나 돌았다.

멀리 무등산이 바라보이던 교정, 울창한 숲속으로 내뻗친 오솔길을 따라 걸으면 넓은 잔디밭도 나오고 냇가도 나왔다. 고향을 떠나야한다는 게 어린 나이에도 숙명처럼 느껴졌다.
서울 은평구 녹번동에서 새 살림을 시작한 아버지는 광주 시절이 그리워서인지, 좁은 마당 한쪽에 양계장을 짓고 노랑 병아리를 사다 풀어놓았다. 나는 무등산 대신에 북한산이 바라다 보이는 집에서 성장했다. 아버지는 남산의 리라유치원, 숭의여대 부속 유치원을 거쳐 KBS방송국에 들어간다. 아버지가 KBS어린이합창단 지휘자가 된 것은 방송국이 여의도로 옮겨 온 다음의 일이다.
이건 이력서에 나오는 것이다. 이력서에는 삶의 애환이 기록되지 않는다. 정식으로 방송작가가 되기까지 아버지는 무보수 방송대본을 거의 1년 동안 써야 했다. 집에서 남산까지 걸어서 왕래해야 하는 실직의 시간 속엔 시멘트 벽돌공장 잡부도 들어있다. 시내에 나갔다가 귀가하는 시내버스 안에서 아버지의 봉급을 소매치기 당한 일도 있었다. 아버지와 나는 그날 시내에서 함께 저녁을 먹고 귀가 중이었다. 아버지는 버스를 가까운 파출소 앞에 대라며 운전수를 다그쳤다. 승객들은 웅성거렸으나 아버지의 고함소리에 버스는 파출소 앞에 정차했고 경찰이 올라와 승객들을 한 사람씩 검문했다. 그러나 소매치기는 이미 버스에서 달아난 다음이었다. 누군가 창문을 열고 뛰어내리는 것을 보았다는 사람이 나타나면서 상황은 종료되었다. 아버지의 겉저고리 호주머니는 날카로운 면도칼에 찢겨져 있었다.
아버지는 나를 앞장 세워 집으로 걸어가면서“엄마한테는 말하지 마라”라고 당부했다. 난 소매치기의 면도날이 무서웠지만 그보다 무서운 게 생존이라는 양날의 칼날이라는 것을 절감했다. 아버지의 생존 방식과 소매치기의 그것은 전혀 다른 칼날이다. 책상도 없이 안방에 베개를 놓고 엎드린 채 밤샘을 하며 쓴 방송 대본료를 받아오던 날이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머리맡에 구겨진 원고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원고가 나를 먹이고 나를 키웠다. 인쇄된 방송 대본을 쌓아놓으면 아마도 천장에 닿을 것이다. 그러나 한때 나를 먹여 살린 원고들은 지금 사라지고 없다. 사라지고 없는 것들, 기록할 수 없는 것들이 우리 존재의 시원일 것이다.
두세 살 때, 개 한 마리가 얼굴을 핥아주던 느낌은 사실인지 아닌지 알 수 없다. 그것은 느낌의 혀였으며 그 혀와 툇마루와 졸음과 텃밭의 푸성귀가 지금도 내 안에서 살고 있다. 내가 어느 날 불쑥 시인이 되었을 때, 아버지는 분명 나보다 기뻐했음에 틀림없다.
시인의 피. 어쩌면 내 첫 기억이라고 할 어떤 혀가 시의 피를 묻혀 나를 핥았을지도 모른다. 그 피 때문일까. 나의 시는 노래가 되지 못하지만 아버지의 시는 노래가 되어 많은 사람들에 의해 불리고 있다. 노래가 되지 못하고, 불리지 않는 시를 계속 써야만 한다는 것이 나 자신에게는 가혹한 일이다.
하지만 나는 아버지의 노래를 듣는 것으로도 족하다. 물론 아버지의 노래를 들으면 내가 어릴 때 학급 친구들 앞에서 선창을 하던 것처럼 얼굴이 화끈거리지만, 그 화끈거림은 설렘의 다른 말일 것이다.
지난해 11월 아버지의 팔순을 맞아 고향인 전남 곡성군 오산면 봉동리, 일명 부들마을 선산 입구에 서시비제막식을가졌다. 시비엔동시「구름」이새겨졌다.“ 저멀리하늘에구름이간다/ 외양간송아지 음메음메 울 적에 / 어머니 얼굴을 그리며 간다 / 고향을 부르면서 구름은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