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진 대산문화
 
열리지 않은 시화전
 
 
참으로 싱겁고 시시하게 들리겠지만, 내가 처음 글을 쓰고 싶다고 생각하게 된 것은 어린시절의 동화책들 때문이었다. 그것들을 통해 이야기라는 것이 얼마나 힘이 센지 얼마나 매혹적인지 깨닫게 되었으니까. 나아가 내 수준에 맞지도 않는 소설책들로 독서의 범위를 넓힌 후에는 책을 읽다가 어려운 단어가 나오면 사전을 찾아 뜻을 정리해두곤 했는데, 지금도 책장 한쪽에 새치름히 꽂혀 있는 그 수첩에는 초등학생 특유의 고지식한 서체로 본제입납, 시쳇말, 참척, 슈미즈, 막새 등의 단어들이 적혀 있어서, 그 시절의 내가 얼마나 작가가 되고 싶어 했는지를 상기시켜준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그 꿈은 문자 그대로‘꿈’이었다. 마법사가 되고 싶다거나 우주여행을 하고 싶다는 것처럼, 필히 이루겠다는 각오 없이 그저 바라는 것만으로 좋은 것이었다. 내가 어찌 작가가 될 수 있겠는가. 그것은 단지 어린 날의 치기 어린 꿈일 뿐이라고 나는 자라면서 점점 더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다.
 
십여 년 전 어느 여름, 학교 담에 붙어 있던 한 장의 전단이 아니었다면 아마 나는 작가의 꿈을 끝내 꿈으로만 간직하고 말았으리라. 그리하여 어쩌면 지금과 조금 다른 삶을 살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열일곱 살, 단발머리, 교복과 명찰, 수능모의고사 성적표. 그런 것들이 존재를 규정하는 모든 것이던 시절. 한여름이었음에도 곧 다가올 기말고사의 환영이 저승사자처럼 교실 안을 맴돌고 있어 분위기가 냉랭하기까지 하던 그 어느 날, 나는 충동적으로 야간자율학습을‘땡땡이’쳤다.
운동장을 가로지르는 동안 예보에도 없던 비가 내리기 시작했으나 개의치 않았다. 교문에 다다랐을 때였다. 아뿔싸. 선생들 두엇이 교문 밖에 서 있는 것이 아닌가. 황급히 교문 옆의 수위실 뒤로 숨었다. 빗줄기가 갑자기 굵어졌다. 쏟아지는 빗속에서 나는 문득 수위실과 교문 사이 담장에 웬 전단이 나붙은 것을 발견했다. 싯누런 16절 갱지. 수성 사인펜으로 휘갈겨 쓴 문장들. 잃어버린 지우개를 찾는다는 전단도 그처럼 볼품없지는 않을 터였다.

그러나 그 초라함이 오히려 더 마음을 사로잡았다. 자칫하면 교문 밖 선생들에게 들킬 수 있음에도 나는 기어이 전단으로 팔을 뻗었다. 제가 X 시들로 X촐한 시화전X 열고X X니다. 관X 있X 분들의 성원X X탁드XX다.

빗속으로 사라진 문자들을 퍼즐 맞추듯 상상해서 끼워놓으니 뜻밖에도 그것은 시화전 안내문이었다. 어느 가난한 시인이 썼을까. 시인 지망생이 썼을까. 얼마나 빈하고 궁하면 달랑 한 장짜리 안내문을 인쇄하지도 못하고 손으로 직접 썼단 말인가.

조X공원 이X주 토XX. 시간과 장소도 빗물에 번져 있었으나 나는 읽어냈다. 조각 공원, 이번주 토요일. 전단을 뒤집어보았다. 의외로 뒷면에도 손으로 쓴 글줄들이 빼곡했다. 요행 번진 부분이 거의 없었다. 첫 번째 줄을 읽었다. 나는 작가가 되고 싶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한때 품은 바 있으나 어느 순간부터 잊고 지낸 나의 꿈도 작가였음이 떠올랐던 것이다. 두 번째 줄을 읽었다.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흡사 암호와도 같던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당시의 나
는 알지 못했다. 어리둥절해하며, 한편으로는 강렬한 호기심에 사로잡혀, 나머지 부분을 읽었다. 매혹된 영혼, 동시에, 슬픈 카페의 노래, 에밀리를 위한 장미, 부서진 사월, 목신의 오후……

이게 다 무엇인가. 막막하고 답답했다. 수위실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교문 밖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저만치 꿈속의 세상인 듯 환하게 불이 켜진 교실들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그대로 학교를 빠져나왔다. 교문 앞 단골 서점의 주인아저씨가 마침 점포 밖에서 담배를 피우다가 내게 아는 체를 했다. 왜였을까. 나는 불현듯, 당장, 아무에게라도, 이 전단의 비밀을 털어놓고 싶었다. 그래서 무턱대고 물었다.

“아저씨, 혹시‘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아세요?”

대꾸 없이 서점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나온 그의 손에는 책이 들려 있었다.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세상에. 마술에 홀린 것 같았다. 그렇다면 그것들이 모두 책 제목이라는 말인가? 당장은 확인할 수가 없었다. 그 서점에서 찾을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조세희의 책 한 권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날 밤 나는 그 책을 읽었다. 아니, 그 책이 나를 읽었나. 내 육신과 지각과 영혼을 뼛속 깊숙이 정독하고 지나갔다. 마지막 장을 덮자 누군가에게 호되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맞은 자리가 욱신거려 밤이 깊어도 눈을 감을 수가 없었다. 잠보다 먼저 새벽이 찾아왔다. 토요일이었다. 나는 아침 일찍 조각공원으로 갔다. 그를 만나고 싶었다. 여자일까, 남자일까. 성인일까, 청소년일까.

아무래도 좋았다. 그가 쓴 시들과 그가 그린 그림들을 보고 싶었다. 그와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었다. 어제 시화전 안내 전단을 보았어요. 뒷장에 적힌 책도 읽었지요. 작가가 되는 것이 꿈이시라고요?

오후가 되어도 시화전은 열리지 않았다. 시인 비슷한 사람도 찾아볼 수 없었다. 매점 아주머니에게 공원 행사 일정을 물어보았으나 그녀는 시화전 따윈 듣도 보도 못했다고 했다. 그럼에도 나는 한여름 긴긴 해가 이울 때까지 그곳을 서성였다. 옆구리에는 간밤에 읽은 책을 끼고, 주머니에는 빗물에 젖었다 마른 전단을 넣고서.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무도 만나지 못했다. 주위는 이미 어두웠다. 그만 돌아가야 했다. 발길을 돌리던 찰나, 나는 공원 입구에서 바람에 팔랑거리는 시뻘건 종잇조각을 한 장 발견했다. 오라, 평양으로! 그것은 삐라였다. 난생처음 주워보는 것이었다. 남조선 동지들을 렬렬히 환영합니다! 몹시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그 문구를 들여다보며 나는 생각했다. 이것은 또 무슨 뜻일까. 어쩌다 내게로 왔을까. 순간 이유 없이 눈물이 났다. 그리고 더더욱 이유 없이, 무엇인가를‘쓰고 싶다’는 욕망이 천천히 솟아올랐다. 나는 결심했다. 작가가 되고 싶다, 되어야지, 될거야. 이틀 사이 내게 일어난 이 기이하고 낯선 일들을, 그 속의 물음표와 느낌표들을, 글로 쓸 거야. 집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세상을 다 가지기라도 한 듯 따뜻하고도 충일한 기운이 온몸 가득 차올랐던 것을 나는 기억한다.

그리고 바로 그 기운이 결국 나를 다시 작가의 꿈을 꾸도록 이끌었다고 믿는다.
그런데 말이다. 그 비 오던 저녁, 담벼락의 전단은 대체 누가 붙여놓은 것이었을까. 작가가 되고 싶었으나 될 수 없다 여겼던 어느 소심하고 무기력한 사춘기 소녀에게, 꿈이 있다면 꼭 이루라는 메시지를 누군가 전해주려 했던 것일까. 전단의 주인은 짐작이나 할까. 내가 그 다음 토요일 또 그 다음 토요일에도 시화전을 보러 갔었다는 것을. 그로부터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도 조각공원을 지날 때면 공연히 사방을 두리번거렸다는 것을. 그리고 운 좋게 꿈을 이루어 작가가 된 지금도 글을 쓰다가 문득 암담해지면 그 비에 젖은 전단을 떠올리며 혼자 웃곤 한다는 것을. 그는 알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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