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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판에 새긴 사실과 선화공주의 진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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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 미륵사 터에서
금판에 새겨진 글씨는 붉은 색이 칠해져 있었다. 또 한 번 역사의 사실을 되돌아보게 하는 엄청난 발견이었다. 2009년 1월, 미륵사지에서 나온 서탑 사리봉안기를 말한다.
사리봉안기는부처의사리를함안에넣고그전말을기록한것이다.“ 가만히생각 하건대 법왕(法王)께서 세상에 출현하시어……”라고 시작하는 정중한 문장이었다. 법왕은 석가모니 부처를 이를 것이다. 8곡(斛)의 사리를 남기고, 그것이 신통한 조화를 부리며 세계를 돈다. 그 중의 일부를 여기 모신다는 뜻이었다.
누가 이 일을 하였다는 말일까. 사리봉안기는 거기서 놀라운 소식을 전해준다.
“우리 백제의 왕후는 좌평 사택적덕(沙宅積德)의 딸로 오랜 세월에 선인(善因)을 심으셨기에현생에뛰어난과보를받아태어나셨다”는데,“ 정재(淨財)를 희사하여 가람을 세우시고 기해년(己亥年) 정월 29일에 사리를 받들어 맞이하셨다”고 하였다. 기해년이라면 서기 639년이다.
이 해는 백제 무왕(武王) 40년이고 신라 선덕여왕(善德女王) 8년에 해당한다. 아뿔싸, 그렇다면 사택 씨가 다름 아닌 무왕의 왕비라는 말 아닌가. 우리가 지금까지 선덕여왕의 동생이요 무왕의 왕비로 알고 있는 선화공주는 어디로 가고?
사리기가 발견되자 익산 미륵사를 창건한 이야기가 나오는『삼국유사』의 무왕(武王) 조는 당장 위기에 처했다. 그렇잖아도 설화적인 내용으로 사실을 의심받던 터였다. 믿지 않을 수 없는 1차 사료가 나왔으니 이제 더 이상의 논쟁은 쓸모없어 보였다.639년 1월 29일, 사택 왕비는 미륵사 창건의 주인공임을 써서 땅 속 깊이 묻었다. 꼭 1370년 만에 후세 사람의 눈에 띄리라고 생각이나 했을까.
금판에 쓰인 붉은 글씨 200여 자는 아주 냉정히 역사의 사실 속에서 선화공주를 추방하고 있었다.
| ▲ 서탑의 해체 복원을 위해 가건물을 설치하고 작업하고 있다. | |
무왕의 때 백제의 속사정
기왕 미륵사지에서 발굴된 기와에는 을사(乙巳, 645)나 경술(庚戌, 650) 같은 연대가 새겨져 있었다. 이 같은 연대를 통해 완공 또는 개축 등이 이 어름에서 이루어졌음을 짐작하였었다. 그리고 동탑지에서는 기축(己丑, 629)이 새겨진 기와가 나온 적도 있다. 미륵사는 본당과 본탑 그리고 동사(東寺)와 동탑, 서사(西寺)와 서탑의 3원형으로 이루어진 절이다.
7세기 중엽, 백제 무왕은 상당한 기간에 걸쳐 미륵사의 거대한 역사(役事)를 이룩해 냈다.
무왕은 누구였던가.
몇 가지 사료를 종합해 보면 무왕은 법왕의 서자로 보는 설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삼국유사』에서는 남쪽 연못가에 사는 과부가 지룡(池龍)과 통하여 아들을 낳았다고 했다. 지룡은 등극 전의 법왕을 가리키는 말인 것 같다.
서자로 보는 다른 근거도 있다. 『삼국사기』에서는 이 무렵 백제 왕의 즉위를 밝히면서, 위덕왕은 성왕의 원자(元子), 혜왕은 성왕의 이자(二子), 법왕은 혜왕의 장자, 의자왕은 무왕의 원자로 표기하였다. 장남인지 차남인지 매우 분명히 한 것이다. 그런데 무왕만은 법 왕지자(法王之子) 곧 법왕의 아들이라고만 적었다. 법왕은 나이가 많아 등극하였고, 그러기 전, 오랜 잠저(潛邸)의 시기를 보냈다. 그러나 현재 왕의 큰아들로 장차 보위에 오를 가능성이 가장 높은 이였다.
| ▲ 궁남지에 한가로이 떠 있는 배. 궁의 남쪽 연못가에 살던 여인이 연못의 용과 교통하여 서동을 낳는다. 서동은 나중에 무왕이 된다. 삼국유사가 전하는 무왕의 탄생설화이다. | |
정실부인 외에 여러 여자와의 만남이 잦았을 터, 무왕은 그런 만남 가운데 한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왕의 여자는 그저 미미한 신분은 아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대체로 익산 출신의 지방 세력가 집안 딸이라 본다. 이 때 익산은 신라와의 쟁패에서 중요시되는 지역이었다. 이런 어머니를 둔 아들은 왕이 되는 데에 외가의 도움을 받았을 것 같다. 즉위한 다음 무왕은 아예 이곳으로 천도할 생각까지 하였다.
이런 추정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미륵사 옆 왕궁리의 유적이다. 지금은 절터로 발굴되고 있으나 처음부터 그렇지 않았다. 지금으로 치면 행정수도가 건설되던 흔적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사택 씨가 등장한다. 무왕을 둘러싼 유력한 중앙 귀족 가운데 하나가 사택 씨이다. 사택씨는 정국 운영의 중심을 잡으면서 무왕의 익산 천도에 반대하였다. 천도는 곧 세력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 유력 귀족과의 전면적인 대립에 부담을 느끼기로는 무왕도 마찬가지였다. 무왕은 사택 씨와 손잡고 일정 부분 타협한다. 정국의 안정이 필요했던 것이다.
새 수도의 건물로 예정했던 왕궁리는 절로 변하였다. 건립 시기는 639년 전후, 사리기에 적힌 미륵사사리 봉안의 시기와 맞물린다.
미륵사를 둘러싼 정치적인 암투
사리기 가운데 한 구절이다. 왕의 장수와 치세의 평안을 비는 것이 당연해 보이지만, 때가 때인지라 조금은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왕궁리의 건물을 절로 바꾼
데에 맞장구치는 느낌이다.
여기서 한 가지 미묘한 사건—.
무왕은 재위 33년에 아들 의자(義慈)를 태자에 올렸다. 미묘하기로는 그가 사택 왕비의 아들이 아니라는 점이다. 사택 왕비가 전면에 등장하는 대신 그의 소생이 아닌 의자를 태자로 삼은 듯하다. 이것은 매우 치밀한 정치적 고려사항이었다.
사택 씨 측에서 익산 천도에 동의하지 않았던 것 또한 여기서 가닥이 잡힌다. 왕비를 사택 씨 쪽에서 받아들이는 대신 태자 자리를 내주고, 태자 자리를 내주는 대신 사택 씨 측은 천도에 반대하였다. 왕이 천도하지 않겠다는 징표로 왕궁리를 절로 바꾸자, 사택 씨는 미륵사 공사에 돈을 내놓는다. 주고받기 식의 치밀한 계산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사실 사택 왕비가 의자의 친모가 아니라는 점 때문에 태자 임명은 무척 어렵게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초조해지기로는 역시 사택씨 측이었다. 무왕이 나이 들어갈수록 의자의 즉위는 가까워지지 않는가. 사택 왕비는 태자인 의자에게로 정권이 넘어가는 것을 미덥지 않게 생각했다. 그저 바라기란 무왕이 오래 사는 것뿐, 그러므로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일 또한 때가 때인지라 조금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수도를 옮기지 않은 데 대한 감사의 표시였으나, 무왕이 오래 살아야, 그래서 의자의 즉위가 늦어져야 사택 씨의 권력도 안전하다는 계산이 깔려 있다는 것이다.
의자왕을 평가하는 유명한 구절이 있다.
“어버이를 효성스럽게 섬기고 형제들과 우애가 있어서 당시 해동 증자(曾子)라 불렸다.”
증자는 공자의 제자 가운데서 특히 효성스럽기로 소문난 이이다. 의자가 바로 그 증자에 비견되고 있다. 효성과 우애를 다했다는 것인데, 여기에는 사택 왕비와 배 다른 형제가 포함된다고 보인다. 의자는 실제 효자였을 것이다. 그러나 계모인 사택 왕비를 비롯, 자신을 견제하는 세력들을 안심시키기 위한 의자의 보신책으로 보이기도 한다. 처음에 의자도 사택 씨 세력에 부담을 가지기는 마찬가지였다.
| ▲부여 궁남지의 연꽃. 무왕의 어머니는 이 연꽃과 같은 여인이었을까? | | 이런 와중에 선화공주의 그림자는 어디서도 찾을 수 없다. 우리의 선화는 어디로 갔을까? 사리기의 등장으로 정말 추방되고 마는 것일까?
이를 두고 역사학자 신종원 교수는 말한다.
“다만「사리기」는 현재진행형 서술이고, 「무왕조」는 과거의 기억과 현존 경관(景觀)이 설화형식을 빌려 ‘구술(口述: 이후 문자로 정착된)’된 차이가 있다. 따라서 두 사료는 시대 차이는 있지만 나름대로의 사실이 여실히 반영되었다 하겠다.”
그렇다. 역사는 사실이 먼저다. 사실에는 나름대로의 사실이 있다. 그것을 진실이라 한다면, 선화공주는 진실 편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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