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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태사 홍양호와 청편수관 기원의 짧은 만남, 긴 우정

▲ 홍양호 초상 © 운영자

▲ 두남신교첩 © 운영자

얼마 전 운전 중 무심결에 라디오를 듣는데, 칸트에 대한 소개말이 흘러나왔다. 또한 심상하게 흘려보내는데‘1724년’이란 말이 귀에 잡혔다. 칸트의 출생년도였다.
나는부지중에,“ 1724년이면홍양호와기윤(紀)이태어난 해인데……”하고 중얼거렸다. 이 해에 출생한 사람이 무수히 많지만, 내가 기억하는 이는 조선의 홍양호와 청의 기윤, 그리고 새로 알게 된 칸트 세 사람이다. 셋은 각각 1802년, 1805년, 1804년까지 살았으니, 거의 같은 시기를 지구 위에서 보낸 셈이다. 이중 홍양호와 기윤은 한 차례 만났지만, 칸트와는 서로의 존재조차도 알지 못했다. 문득 사람의 인연이란 것이 기묘하게 느껴졌다.
홍양호는 1724년 서울의 진고개(지금의 충무로 2가)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잇달아 여의고 외가에서 성장했다. 29세에 벼슬길에 나아갔는데, 당쟁에 대한 혐오 때문에 외직을 선호했다. 35세에 평안도 강동현에 부임하여 만류제(萬柳堤)를 쌓은 일, 정조 초 함경도 경흥 지방으로 쫓겨나서도「북새기략(北塞記略)」등의 북방 지리지를 편찬한 일, 1770년 황해도 관찰사 재임시 불법 조업을 일삼던 청인들을 몰아내고 방지책을 마련한 일, 1790년대 경제적 종속을 우려하며 중국화폐 수용론을 적극 저지한 일 등은 스스로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평생의 벗으로는 신경준(申景濬, 1712~1781), 이종휘(李種徽, 1731~1797), 이광려(李匡呂, 1720~1783)가 있다. 신경준과 이종휘는 각각 자주적이고 독창적인 학설을 펼친 지리학자와 역사학자였고, 이광려는 고구마 재배를 처음으로 시도했을 만큼 실험성과 실용성을 중시한 지식인이었다.
이들과 홍양호는 서로를 비춰주는 거울이었다. 홍양호는 이들과 영향을 주고받으며, 역사지리학·군사학·경제학·금석학 등의 분야에서 두드러진 성과를 남겼다. 실무 경륜과 이론을 구비하고, 경제와 예술의 여러 방면에 두루 통달 하였으며, 조선인인 자주성과 세계인의 문화의식을 겸전한 것으로 홍양호만한 인물은 찾기 힘들다.
한편 그는 조선 사람으로서의 자의식이 무척이나 강했다.
그는 많은 글에서 자신을 삼한인(三韓人), 조선인, 고려인, 동해인으로 내세웠다. 설렁설렁 중국 중심의 문화의식에 편승하려 하지 않았으니, 역사지리적 자기 인식이 분명했던 까닭이다. 실천적 지식인으로서의 자부심도 산악처럼 크고 높았다. 그가 자기 문집에 붙인 서문「태사씨자서(太史氏自序)」는“조선 태사(太史) 홍양호는”으로 시작한다. 옛날 사마천은『사기열전』을 짓고 여기에「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를 붙였으니, 홍양호는 자신과 자신의 글을 사마천과『사기열전』에 견준 것이다. 홍양호의 존재 근거는 이 자부심에 있었다.
1782년(59세)과 1794년(71세)에 각각 동지사의 부사와 정사로 북경에 다녀왔다. 비교적 고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씩씩하게 걸었고 실컷 보았으며 마음을 비워 관찰하고 지기(知己)를 사귀었다. 그가 남긴 기록 어디에서도 객고나 향수의 흔적을 찾기 어렵다. 어떤 경우에도 얼굴을 찌푸리거나 투덜대지 않으며, 눈을 똑바로 뜨고 보되 눈빛에 겸허함과 따스함을 감추고, 허리를 굽히되 비굴한 태를 보이지 않는 것, 자부심 높은 사람의 덕목이다. 1782년 10월 압록강을 건너 구련성(九連城)에서 노숙하는, 추위가 갖옷 속으로 스며 하루가 1년 같은 밤, 그는 이렇게 내뱉었다.

홍양호는 거친 들판의 체험을 달게 받아들였으니, 이를 통해 삶과 세상을 더 깊이 알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소무는 흉노에 사신 갔다가 붙잡혔는데, 굶주려 장막의 털을 뜯어 먹으면서도 절의를 굽히지 않았던 한나라 때의 인물이다. 만리장성의 동쪽 끝 산해관 바닷가에서 발해를 보고는「망해대기(望海臺記)」를 남겼는데, 아래는 그 일부이다.

옛날 중국의 관점에서 발해와 황해는 모두 동해였고, 그 바다 건너 있는 나라를 즉 한반도를 해동(海東)이라 했다. 일찍이 진시황과 한무제는 태산에 올라 봉선(封禪) 의식을 거행했는데, 거기서 멀리 보이는 바다는 매우 신비로운 것이었다. 여기에 바다와 관련된 환상적인 이야기에 홀린 이들은, 그 너머 어딘가에 신선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고, 급기야 장생불사약을 구하러 사람을 보내기까지 했다. 하지만 홍양호가 보기에 발해와 황해는 우리의 동해에 비하면 작은 도랑에 지나지 않으니, 중국에서는 예로부터 제대로 된 바다를 본 이가 없기 때문에 이 도랑 같은 바다에 사람들이 홀렸다는 것이다.
홍양호의 이런 발언은 결코 치기나 오기의 소산이 아니었다. 그는 세상의 모든 존재들은 그 기준에 따라 주/객이 나뉘는 것이니, 세상 만물은 모두 주체이면서 객체라고 갈파한 바 있다. 또 일찍이 서양의 과학적 성과를 터득하여, 중국도 천하에서는 작은 손금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도 인지하고 있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실상이었다. 실상을 알고 있다면 쓸데없이 흥분할 필요가 없고, 담담하게 말하거나 겸허히 머리 숙이지 못할 까닭도 없다. 자부심이 강한 사람은 자신을 낮춰 남을 존중할 줄 안다. 지자(知者)는 세상은 넓고 지식은 미미하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다. 자부심은 아직 실현되지 않은 가능성과 잠재력에 대한 믿음에서 비롯하는 것이다. 그러니 어찌 처사접물(處事接物)에 겸허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 산해관 발해가의 징해루, 망해대는 이 건물 앞에 있었다. © 운영자

1794,5년 사행에서 특별한 사건은 기윤(紀)을 만난 것이다. 홍양호는 1785년 신년하례연에 참석하고 나오다가, 자금성 정문 오문(午門)에서 참석자들에게 상을 나눠주던 기윤을 만나, 공경의 마음으로 간단한 인사를 나누었다.
순간의 만남이 예사롭지 않아, 기윤은 사람을 사관에 보내 홍양호의 시문을 구했고, 보내온 시문에 두 편의 서문을 지어 잘 장정하여 보냈다. 홍양호는 기윤의 집을 찾아가 차를 마시며 필담을 나누었다. 한 사람은 조선의 태사였고, 또 한 사람은 청나라 사고전서 편수관이었다. 복색이 다르고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마음은 흐르고 뜻이 맞았다. 이로부터 둘의 짧고도 긴 우정이 시작되었다.
홍양호는 편지를 보내 소동파 부자가 구양수의 한마디로 세상에 크게 드러난 일을 들어, 기윤을 자신의 구양수라고 하였다. 기윤은 글씨를 잘 쓰지 못해 평소 사람을 부르지만, 이제 언제 볼지 모르니 자기 흔적을 벗의 집에 남기고 싶어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붓을 잡았다고 했다. 기윤은 또 벼루와 여의(如意)를 선물했다. 홍양호가 베이징을 떠나던 날 기윤은 조양문(朝陽門) 밖까지 나와 전송했다. 일흔 넘어 겨우 만났으나 이승에서 다시 못 볼 벗이었다. 보내는 사람이나, 떠나는 사람이나 비감했다. 서울에 돌아온 홍양호는 선물에 대한 시를 지어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기윤은 여기에 답신을 보냈는데 거기 이런 구절이 있다.

▲ 기윤 초상 © 운영자

기윤은 홍양호의 편지를 잘 두루마리로 만들어 손자에게 주어 뒷날 두 노인의 신교(神交)를 알게 하겠다고 했다. 수와연(水蛙硯), 소배(搔背, 효자손), 다주(茶注) 등을 선물로 보냈는데, 각 선물마다 붙인 짧은 시에서는 이 물건들을 궤안 옆에 두고 가끔 어루만지면서 (자기에 대한) 그리움을 달랠 것을 말하였다. 노년에잠깐만나고헤어진이역의벗에대한정은다함이없어또별도의시를지어서는,“ 등불아래 읊조리며 긴 밤을 보내노니, 바다 동쪽 그리운 이 꿈속에서 만난다오. 건승하여 다시금 사신으로 오신다면, 자하배(紫霞杯)에 술을 따라 그대와 취하리라.”라고 애틋한 마음을 드러냈다. 이에 홍양호는“보배로운 시구로 뒷날을 기약하나, 늙은 몸이 어느 날 다시 그댈 만나리오. 헤어진 지 세 해 동안 산과 바다 막혔으니, 꿈에서나 둘이 함께 술잔을 기울이오.”라고 화답했다.
1801년 홍양호는 주고받은 시문을 손자 홍경모에게 묶게 하고는 이름을‘두남신교집(斗南神交集)’이라 붙였다.

이듬해 홍양호가 죽고, 세 해 뒤에 기윤도 세상을 떠났다.
그로부터 30년 뒤 홍경모는 두 차례 북경에 가서, 할아버지와 기윤이 만났던 그 집을 찾아가 기윤의 손자 기수유(紀樹)를 만난다. 두 사람은 30년 전 할아버지들의 사연을 떠올리며 마음을 주고받았다. 뒤에 홍경모는 고운 시전지에 할아버지들이 주고받은 시문을 정성들여 쓰고, 여기에 자기와 기수유가 주고받은 시문을 쓴 뒤『두남신교첩』을 만들었다. 홍양호와 기윤은 72세에 한 번 만나 겨우 몇 해 사귀었을 뿐이다. 하지만 서로 지기(知己)를 얻었으니 마음에 족하고, 오늘날까지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니 또한 영원하다 하겠다.

기윤은 하북성 하간(河間, 天津옆 滄州市) 출신이다. 총명이 남달라 21세에 과거 급제하였다. 천성이 장난과 해학을 좋아하여, 수많은 이야기에서 악동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박학다식한 데다 건륭제의 총애를 받아, 뒷날 예부상 서로 사고전서 편찬의 총 책임자가 된다. 이항복이나 박문수처럼, 건륭제와 어전에서 대담한 농담을 벌이는 이야기가 전한다. 이는 그가 격식을 넘나드는 인물이었음을 의미한다. 근래 중국에서 그에 대한 이야기들이「철치동아기효람(鐵齒銅牙紀曉嵐)」이라는 드라마로 만들어져 인기를 끌었다. 1800년『열미초당필기(閱微草堂筆記)』를 간행했다. 중국 역대 10대 필기(筆記)의 하나이자, 『요재지이(聊齋志異)』,『홍루몽』와 더불어 청나라 3대 유행 소설의 하나로 꼽힌다.
열미초당은 기윤이 죽을 때까지 살았던 곳이다. 그의「경저잡제(京邸雜題)」6수 중 열미초당을 읊은 시에“사립문에 빗장을 걸어둔 것은, 은미한 말종일 보기 위해서라오. 所以閉柴荊, 微言終日閱.”이란 구절이 있다. 북경의 유리창 남쪽 주시고(珠市口) 서대가(西大街) 241호에 옛 집의 일부가 보존되어 있고, 그 안에 급고각다원(汲古閣茶苑)이 운영되고 있다. 여기서 차를 마시며 귀를 기울이면, 200년 전 홍양호와 기윤이 필담을 나눌 때 나던 붓질 소리를 들을 수 있다. 홍양호의 두 차례 사행 흔적은『이계집』의「연운잡영(燕雲雜詠)」과「연운속영(燕雲續詠)」그리고 여러 편의 산문에 흩어져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