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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과 기억의 충실한 재현으로서의 글쓰기

- 유종호 선생과의 만남

유종호 선생은 1957년 등단하여 최근까지도 왕성하고도 정치한 집필 활동을 보이고 있는 현역 비평가이다. 많은 이들이 30, 40대에 비평적 언어를 소진한 채 동어반복에 머무르면서 일종의 조로 현상을 보이고 있는 경우에 비추어볼 때, 선생의 필력은 우리 평단에서 한편 예외적이고 한편 그만큼 값진 것이 아닐 수 없다. 이번 대산초대석 코너에서도 최근 우리 문학에 대한 선생만의 날카롭고도 대안적인 비평적 진단과 처방을 들을 수 있었다. 시종 선생께서는 자신의 경험과 기억의 충실성에 기초하여, 방대한 양의 책과 미세한 시구(詩句) 하나까지 섬세하게 전거로 들어가면서, 우리 문학에 대한 고언을 아끼지 않으셨다. 최근 한국연구재단이 개최한‘석학과 함께하는 인문강좌’를 하고 계신 와중이어서 강연을 이어가시는 소회를 먼저 여쭈었다.

“많은 청중들 특히 연만한 분들이 장시간 경청하는 모습이 고마운 한편으로 긴장도 되었습니다.그래서 그런지 레비스트로스니 헤럴드 블룸 같은 낯익은 이름도 순간적으로 생각이 안 나 동석한분들께 물어보기도 했지요. 소란한 우리 사회의 또 다른 일면을 보는 것 같아 흐뭇한 느낌이었습니다. 자신의 역부족을 절감했고 그래서 앞으로 노력할 방향도 잡혀서 개인적으로 소득이 많았습니다. 이 점 한국연구재단과 인문강좌 운영위원회 여러분께 사의를 표합니다. 한 주에 120장씩 써내는 것이 사실 버거웠어요. 이제 방학 맞은 기분입니다. 미비한 점은 앞으로 책으로 낼 때 크게 보완할 작정입니다. 내가 우연히 참여하게 되었대서가 아니라 책 읽고 생각하는 풍토 조성을 위해서 비슷한 형태의 다양한 강좌나 토론 모임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나는 이번 대담을 맞아, 선생의 비평 이력 전체에 대한 통시적 접근보다는 가장 최근 저서인『과거라는 이름의 외국』(현대문학, 2011)을 매개로 하여 선생께서 경험해온 근접 과거에 대한 소상한 기억과 함께 우리 문학을 에누리 없이 바라보고 판단하신 귀중한 제언을 듣는 방향을 취하기로 하였다. 먼저 책 제1부에 소개된 선생의 기억들을 지금 세대들이 어떻게 받아들이고 또 귀중한 삶의 지혜로 받아들여야 할까를 여쭈었다.

“근자에 우리의 과거에 대한 언급을 얼마간 한 셈입니다. 온전한 과거 이해 없이 온전한 현재 이해가 있을 수 없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젊은 학생들과 대화하면서 가끔 절벽을 느낄 때가 있어요. 젊은세대의과거이해가너무나피상적일면적이고실상과동떨어져있기때문입니다.“ 우리가말하는 르네상스는 16세기의 한 국면에 지나지 않으며 그 개념에 맞지 않는 많은 것이 진행되고 있었다”고 호이징하는 말했습니다. 우리의 과거 이해란 이렇게 단일하고 단색적인 것이기 쉽습니다. 그러니 그 점을 의식해서 복합적인 과거의 적정한 이해를 위해 우리 모두가 노력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1부의 소제목이자 책제가 된『과거라는 이름의 외국』도 그런 뜻에서 마련한 것이지요. 우리는 외국을 잘 모르고 외국을 알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공부가 필요합니다. 과거도 그런‘외국’이란 것이지요.

나는 또 일체의 과거 미화에 대해서는 반대입니다. 우리 사회가 전국 규모의 빈민굴 수준에서 벗어난 것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책에서 1938년의 화전민 수가 인구의 15분의 1이라든가 평균수명이 남자 32세 내지 34세, 여자 35세 내지 37세라는 수치를 인용하고 서울 누상동, 누하동의 게딱지같은 초가집을 말한 것도 그런 취지에서입니다. 19세기 말에 우리나라를 방문한 몇몇 외국인의 인상기를 젖혀놓고 당대 지배층의 업적만을 거론하는 것도 문제라고 봅니다. 물론 아시아의 모든 나라가 당시 거대한 빈민굴이었습니다. 우리만이 그랬던 것은 아니겠지요. 그러나 그렇다고 사실을 제대로 알리지 않아서야 되겠어요?

불과 반세기 전만 하더라도 오장환의「붉은 산」이 우리의 현실이었어요. 경부선을 타고 가면“가도 가도 붉은 산”뿐이었습니다. 그걸 실감하면 우리가 어디에서 낙관론의 근거를 찾을 것인지는 분명해집니다. 문제는 한국사를 필수과목으로 하느냐 않느냐가 아니에요. 역사적 상상력의 계발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런 맥락에서 우리의 근대소설은 사회사의 중요 자료가 되고 그런 관점에서 음미해보는 것은 역사적 상상력의 계발에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소설로서도 괜찮은 이태준의『사상의 월야』도 그래서‘다시 읽기’를 시도해본 것입니다. 1950년대 학원가의 얘기를 적은 것은 과거가 외국임을 함께 실감해보자는 취지였지요. 젊은이들이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는 모르겠어요. 다 아는 얘기라고 할지도 모르지요. 가령 톨스토이를 한 권도 읽어보지 않고도 다 아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요? 전면적인 공감을 느꼈다는 감회를 얘기해주는 이들은 거의 연만한 분들입니다. 즉 공유(共有) 경험의 소유자들이지요.”

선생은 근접 과거에 대한 사회적 기억은 복수로 존재한다는 것을, 비록 그 가감 없는 실재에 대한 공평하고도 정확한 이해가 어렵기는 하지만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역사 이해에서 사회사로 무장한 역사적 상상력이 요청된다는 것을 시종 강조하셨다. 그 실천을 그동안 선생은『나의 해방전후』(2004),『 그겨울그리고가을』(2009)로이어오셨는데, 이번책은그세번째결실인셈이다.

나는 이번 책을 읽으면서 그 진경이 2부에 있다고 느꼈다. 특별히 정지용「향수」에 대한 모작 시비를 조목조목 반박하면서 이 시편이 왜 당대 한국 시의 한 기적인가를 설명한 부분에서는, 표면상의 상동성을 곧바로‘모작’이나‘표절’로 등치시켜버리는 천박한 풍토에 대한 경종이 강하게 느껴졌다. 선생께서는 다른 자리에서 자신의 비평 생애에 가장 중요한 한 편의 아티클을 들라면 이 글을 들겠노라고 하신 적이 있는데, 글을 쓰신 동기랄까 이런 것과 함께 글 배면에 있는 이야기도 들 을 수 있었다.

“「텍스트의 현장」이란 소제목을 단 2부의 글들은 문학 텍스트만을 다룬 글들입니다. 크게 보아 상호텍스트성의 문제를 다룬 글들이 있고 또 요즘 우리 주변에서 흔치 않게 떠도는 모작이나 표절 시비 등을 다룬 글이 있습니다. 거기에「기이한 상봉」이란 글이 있습니다. 제임스 조이스와 네오리얼리즘 감독 로세리니와의 만남, 소설의 서정시인이랄 수 있는 일본의 가와바타(川端)와 라틴 아메리카의 허풍선이 리얼리스트 마르케스의 만남을 텍스트에서 검토한 글입니다. 우리 풍토 같으면 표절이다, 모작이다 해서 한바탕 소동이 일어날 만한 만남이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면서 상호텍스트성이란 맥락에서 거론한 것입니다. 그런데「기이한 상봉」이란 제목 자체가 윌프레드 오웬이란 영국 시인 작품의 표제이지요. 내용상으로 직접적인 관련은 없지만 일종의 인유(引喩)이지요. 이 글 속의소제목에「젊은그들- 사랑을위해죽다」란것이있어요.「 젊은그들」은 이제는 잊혀진 김동인의 소설 제목입니다. 또「늙은저들- 황혼이울고있다」란소제목이 있습니다.“ 황혼이 울고있다”는 이산 김광섭의 만년의 시 제목입니다. 그것은 알아도 되고 몰라도 되지만 알면 조금쯤은 더 재미있을 것입니다. 사실 영미소설의 제목은 거의 모두 인유입니다. 헤밍웨이의『누구를 위해 종은 울리나』는 존 단의 시에서 따온 것이고 포크너의『음향과 분노』는 셰익스피어의『맥베스』에서 따온 식으로 말이지요. 발자크의『인간극The Human Comedy』도 단테의『신곡The Divine Comedy』을 딛고 있어요. 하기와라 사쿠타로(萩原朔太郞)의 유명 시편에 이시카와 다쿠보쿠(石川琢木)의 인유가 있다는 것을 이번에 알고 놀랐다고 말하는 선배 교수가 계십니다. 이렇게 문학의 세계란 상호 텍스트성의 세계요 상호 울림의 세계입니다. 비슷한 어사가 있다고 해서 곧 모작과 표절을 얘기하는 것은 문학 경험이 얕은 탓입니다. 그렇다고 이런 사실이 명명백백한 표절이나 모작을 정당화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안별로 그것은 세세하게 검토해야 할 문제입니다

말씀하신 정지용「향수」건은 이번 기회에 작품의 모든 면을 철저히 검토하고 해명해야겠다고 작심을 했습니다. 시 한 편을 놓고 120장을 쓴 글은 아마 달리 없을 겁니다. 80년대에「카페 프란스」가 엘리엇의「J. A. 프루프록의 연가」의 모작이라는 터무니없는 얘기가 있었어요. 그 무렵에도「향수」모작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잊고 있었는데 이번 기회에 살펴보니 1989년에 나온 졸저『문학이란 무엇인가』의「영향·모작·수용」이란 부분에도 그런 얘기가 나오는데 간단히 부정하고 있지요. 학생들한테 인터넷에 모작설이 오래 전부터 돌고 있다는 말을 들은 터인데 염무웅 교수가『유심』지에 모작설을 동조적으로 인용하며 거론한 것을 보고 그 출처가 되는 논문을 구해 읽어보았지요. 중학 시절부터 익숙했던「향수」에 대해서는 한국어 최상시편의 하나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는 터라 어째서 그런 낭설이 나오게 되었는가가 궁금했지요. 스티크니의「므네모시네」의 우리말 번역이「향수」의 어휘를 많이 채용한 데서 오는 착시 현상이라는 것을 알고 맥이 풀렸습니다. 원시를 검토하지 않고 번역시만 가지고 속단한 데서 오는 착오입니다. 문학 경험이 좁고요.

그 밖에도「향수」모작설을 주장한 논문이 많다는 것을 알고 놀랐습니다. 모작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취약점은 우리말을 잘 모른다는 것이지요. 사전적인 뜻이 아니라 어사의 함의나 용법을 잘들 몰라요. 우리말 시나 소설을 많이 읽어보지 않은 것 같고 시와 산문의 차이에 대한 감각이 희박해요. 또 뛰어난 시편에 대한 경의가 전혀 없는데 감식력이 없어서 그래요. 문학비평에서 출발해서 문화비평으로 관심을 확대해온 영국의 테리 이글튼은“문학비평은 이 매체—즉 우리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언어란 매체—의 두께와 복잡성에 날카롭게 반응하는 작업이 되는 셈이다”라고 2006년 말에 나온「시 읽기의 방법How to Read a Poem』에 적고 있어요. 이어서 그는 니체를 거론하며 니체에게 있어 정독(精讀)이 근대성에 대한 비판이라면서 말 그 자체의 감촉이나 형태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말을 단순 도구로 취급하는 것을 거절하는 것이며 나가서 상업과 관료주의 탓으로 언어가 얄팍한 종이처럼 마멸된 시대를 거부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어요. 올해 와서도『마르크스가 옳았던 이유』를 낸 마르크스주의자의 말입니다. 우리 사이에선 언어에 관심을 기울이는 시인 작가를‘말초적 기교파’라 폄훼하고 언어 분석을 시도하면 곧 현실 외면의 미시적 행태라고 폄훼하는 카프 이래의 편협하고 둔탁한 관행이 남아 있어요. 그것이「향수」모작설이 횡행하는 지적 배경이요 기반이라고 봐요.

여담이지만《현대문학》7월호에 한 인터넷 블로거의 내 책 독후감이 실려 있어요. 대체로 호의적인 반응이어서 고맙다는 생각이지만「향수」옹호가 정교한 분석과 설득력에도 불구하고 개운치 않은 뒷맛을 남기는데 그것은 완강한 보수주의 탓이란 취지의 말이 있어요. 20세기 후반기의 우리 시인들, 가령 근래의 김춘수, 김수영, 신동엽, 신경림, 황동규, 정현종, 김지하 시인들의 시적 업적에 대해서 나는 응분의 경의를 가지고 있고 또 그것을 글로 쓰기도 했어요. 정지용이나 박목월을 이번 책에서 거론한 것은 모작 표절 시비라는 맥락에서의 일이고 또 그들은 현대시의 고전이에요. 젊은이들이 거론하지 않는 고전을 지키자는 것이 완강한 보수주의로 비쳤다는 게 내게는 뜻밖의 일이었습니다.

1920년대 식민지 상황에서 우리 토박이말을 찾아서 갈고 다듬는 일은 어느 정치실천 못지않게 소중한 문화 실천이었다고 믿고 있습니다.「 향수」에 보이는 고향생각은 동시에 조국생각이기도합니다. 정지용을 시속에서 야유하고 평문에서 혹평해 마지않던 임화가“지용 씨의 작품 가운데서「향수」와 같이 슬픈 노래를나는버리는자가아니다”라고말하고있는것은그때문이라생각해요.“ 언어미술이 존속하는 한 그 민족은 열렬하리라”는 정지용의 말은 모국어와 민족에 대한 신앙고백입니다. 그런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그의 시가 살아남은 것이지요.”

그러고 보니 선생은 최근, 백석 초기 시편과 일본 시인 다나카 후유지와의 관계를 통해, 후대 시인의 작품이 선행 시인에게 보내는 답장이라고 설명하신 바 있다. 상호텍스트성이라는 것이 소소한 영향 관계마저 모작으로 몰아가는 것이 아니라 문학 창조의 비밀에 대한 너그럽고도 사실성 있는 이해 방법이라는 것을 거듭 실감하였다. 이번 책의 제3부는 다양하고도 자유로운 양식으로 선생만의 기억을 풀어간 글들이 대종을 이루고 있는데, 그 점에서‘비평에세이’라는 명칭이 붙은 것 같다고 한번 여쭈어보았다.

“애초에《현대문학》에 비평에세이란 이름으로 1년간 연재를 한 글이 대종을 이루고 있어요. 그냥 에세이라 하면 수필을 연상하는 것이 보통이어서 비평에세이라 했지요. 원래 우리가 말하는 평론은 영어로는 critical essay라 하지요. 비평이란 장르는 criticism이라 하고요. 가벼운 회상적인 글도 있어서 비평집이라 하기도 뭣하고 해서 비평에세이라 한 것이지요. 연재할 때 분량이나 소재에 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쓰라는 주문이었어요. 그래서 편안한 마음으로 그때그때 떠오른 생각을 적어본 것이 제3부가 된 것이지요. 요즘의 전자기술혁명은 정말 대단합니다. 요전 대산문화재단 서울국제문학포럼 때도 발표문의 표제를「놀라운 신세계에서」라 했어요. 유튜브를 통해 해외 학자의 강연이나 인터뷰도 들을 수 있잖아요? 그런 요즘 세상에 대한 소회를 적어본 것이 있고 근자에 읽은 책에 대한 얘기도 적었지요.”

결국 이번 책은 선생의 비평 생애에서 매우 중요한 책임을 감지할 수 있었다. 그것은‘문학의 위기’라는 검증되지 않은 과장된 풍문 속에서 위축되어가는 문학의 고전적 매혹과 품격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한 원로 비평가가 파수꾼으로서 견지한 사유와 실천을 기록한 결실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유종호 선생의 비평적 진단과 처방은 우리 문학의 종요로운 지남(指南)이 되고 있다. 그렇다면 앞으로 선생의 글은 어떤 물줄기를 이어갈까.

“여태까지의 비평 활동이란 것이 주제나 분량을 지정 받고 주문에 응해서 글을 써온 것이 태반입니다. 좀 전에 얘기했듯이 그런 것 없이 그때그때의 관심사를 자유롭게 적어본 것들이 이번 책의 대종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자유롭고 즐거운 글쓰기였습니다.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선 이렇다 하게 작정한 것은 없고 또 미리 얘기할 성질의 것이 못되지요. 여태껏 계획 없이 살아왔어요. 평생 월급쟁이 노릇을 하다 보니 겨우 한 달 단위로 앞을 내다보며 살아온 셈이지요. 살아온 세월 자체가 불안하고 불투명한 세월이었고. 다만 이번 책 2부의 연장선상에서 상호텍스트성에 관한 본격적인 책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은 합니다. 그러나 헤픈 글을 써서 스스로 뒷맛이 개운치 않은 일은 말아야 한다는 생각도 굴뚝같습니다. 얼마 전 고려대 이남호 교수의 말을 듣고 아마존의 킨들을 구해서『그리고 쇼는 계속되었다』라는 나치 점령하의 파리 문화계를 다룬 책을 다운 받아 보았어요. 이른바 레지스탕스의 실체도 새로 알게 되었지요. 출간된 지 한 달도 채 안 된 책을 읽을 수 있는‘놀라운 신세계’에 다시 한 번 탄복했어요. 또 구하기 힘든 체코 작가 차베크의 책도 다운 받아 보았어요. 매혹적인 책들이 너무나 많아요. 당분간 책이나 보며 소일할까 합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들었듯이, 유종호 비평의 한 축이 문학의 고전적 엄격성에 대한 옹호에 있다면,다른 한 축은 문학에 대한 기초를 결여하거나 언어 자질에 대해 무지하거나 하는 현상에 대한 적극적 경계와 비판에 있다고 할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기지와 순발력으로 문학을 하는 것이 아니라, 고전적 품격을 하나하나 축적해가는 과정을 통해 해야 한다는 귀중한 명제와 만나게 된다.

폭우가 내리던 날, 책 마지막 글의 제목이기도 한‘광화문 언저리에서’, 경험과 기억의 충실한 재
현으로써 보여준 선생의 글쓰기 역정과 기율에 대해 나는 오래도록 그 매혹과 품격을 음미할 수 있었다. 순간 우리 문학의 양도할 수 없는 한 우람한 광맥이, 쏟아지는 빗줄기를 뚫고 강한 힘으로 다가오고 있음을 또한 알아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