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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한 시간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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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숨을 한 번 몰아쉬고 나서 남자는 저 편, 깊은 침묵의 세계로 건너갔다.
이번에야말로 확실했다. 마침내, 라고 해도 좋을 만큼 충분히 고통을 겪었고, 충분히 시간을 끈 뒤였다. 남자를 내려다보고 있던 가족들이 저마다 조금씩 다르게 그의 마지막을 인증했다. 그러니까 남자의 어머니와 누이와 아우인 사람……들이. 그들 모두 겉으로 드러낼 수 없다 뿐이지, 내심으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을 게 분명했다. 다들 엉겁결에 불려와 남자의 임종에 입회하게 되었으니까. 이제 한시름 던 심정으로 각자의 자리로 돌아갈 수 있을 터였다. 몇 가지 의례적인 절차와, 차마 생략할 수 없는 인간사 법식이 남아 있긴 하지만. 그들 몇몇이나마 한자리에 불러 모은 건 여자였다. 남자가 그들을 보고 싶어 한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여자로선 사태를 고지할 책임과 이유가 있었다. 그러나 어렵사리 전화로 접촉 하면서, 또 막상 대면하고 보니 그들 역시도 남자를 별로 떠올리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남자란 이미 지워져가고 있는 희미한 얼룩이나 마찬가지인 존재였다. 두 번 다시 안 볼 듯이 험악하게 끝장난 갑과 을의 관계 같은. 그런 마당에 알지도 못하는 여자가 뜬금없이 전하는 남자의 근황이란, 불편하고 불쾌한 긴장감을 유발시키는 돌발상황이었다.
저기요, 상태가 많이 안 좋아요. 짐작하시는 것 이상으로요.
남자의 처지가 딱해서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어떻게든 그들의 냉혹한 처사를 철회시키고 싶었다. 그들은 남자가 그들의 인생에 새로운 걱정거리로 부상하게 될까봐 지레 겁부터 집어 먹었다. 미지근하게, 혹은 떨떠름하게 남자의 용태를 되묻는 그들에게 여자는 최후통첩을 날렸다.
담당의사의 말로는 오늘밤을 넘기기 힘들다고 하네요.
그 말이 그들의 마음을 조금쯤 돌려놓았다.
그들은 자기네들끼리 입과 발을 맞춘 듯 한꺼번에 들이닥쳤다. 전날 밤 아홉 시를 갓 넘어선 시각이었다. 남자는 이틀 전부터 일반병실에서 처치실로 넘어와 있었다. 종합병원 처치실이란 환자에겐 카운트다운이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열, 아홉, 여덟…… 하는 식으로. 남자의 카운트는 둘을 지나고 하나마저 넘겨 최후의 일각을 겨우 남겨놓고 있었다. 그들이 본 건 그러므로 모든 것을 잃고, 모든 것을 체념한 남자에게 가해지는 무자비한 통증이었다. 모르핀을 최대치로 투여했지만 통증을 완화하는 데에도, 심리적인 안정감을 주는 데에도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다. 남자의 소원은, 제발 빨리 끝나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급류에 휩쓸리면서도 본능적으로 나무뿌리를 꽉 그러쥐는 것 같은, 깊숙이 숨겨진 잠재의식과는 별개로.
남자는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와중에도 용케 어머니와 누이와 아우의 얼굴을 알아보았다. 눈물이 그의 귓속으로 흘러들었다. 그가 바짝 타들어간 입술을 움직거렸다.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입모양으로 남자의 말을 알아들었다.
미, 안, 하, 고…… 고, 마, 워……
그제야 그들도 당황해서 남자의 손을 차례로 잡고 비통한 표정을 지었다.
당직의가 차트에다 사망시각을 적어 넣으며 나직하고도 단단한 음조로 남자의 절명을 선언했다. 여자는 자신도 모르게 왈칵 설움이 복받쳤다. 맹세코, 남자의 죽음 때문이 아니었다. 의사의 선언이 얼기설기 쌓아올린 기억의 한 모서리를 톡 건드린 탓이었다. 순식간에 여자는 자신의 생에 찾아온 첫 번째 죽음, 첫 번째 이별의 현장으로 되돌아갔다.
첫 번째 죽음과 첫 번째 이별이 일어났을 때 여자는 아주 어렸다.
햇볕이 쨍쨍 빛났다고, 놀이공원에 가고 싶었는데 어디 먼 친척집으로 가게 돼서 부아가 좀 나 있었다고…… 어린 여자가 더듬더듬 말했다.
그러자 어른들이“그래서?”라고 물어왔다. 아빠가 운전을 하고 있었다고, 자신은 뒷좌석에 엄마와 나란히 앉아 새로 배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고…… 어린 여자가 더듬더듬 말했다. 어른들이“그래서?”라고 또 물어왔다. 비틀거리던 덤프트럭이 중앙선을 넘어 육식공룡처럼 포니 승용차로 돌진해왔을 때 엄마가 나를 확 잡아당겼다고, 귀를 찢는 무서운 소리가 났다고, 몹시 숨이 막혔다고…… 어린 여자가 퍼즐조각을 꿰맞추듯 장면 장면들을 더듬더듬 복원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어린 여자는 혼자 살아남았다. 그랬으므로 어린 여자의 증언이 불가피했다.
어른들이“그래서? 그래서?”라고 물어올 때마다 어린 여자의 증언에 조금씩 살이 붙기 시작했다.
아슴아슴한 부분과 자신 없는 부분은 부주의한 어른들로부터 기억의 재생을 강요당할 때마다 다듬어지고 추가로 메워져서 나중에는 스스로도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한 편의 동영상물처럼 재구성해 낼 수 있게 되었다.
어린 여자는 죽음을 이해하지 못했으나 다시는 엄마아빠를 볼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만큼은 또렷하게 이해했다. 일곱 살짜리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일이었다. 너무 두려운 나머지 울음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울지 못하는 대신 주먹을 어찌나 세게 옴켜쥐고 있었던지 친척할머니가 달라붙어 아무리 애를 써도 손가락이 펴지지 않았다. 어린 여자는 주먹을 옴켜쥔 채 빈소 한구석에 쓰러져 잠을 잤다. 누군가 우유나 주스 팩에 빨대를 꽂아 주면 그것으로 허기와 갈증을 달랬다.
옴킨 주먹은 화장장으로 가기 전 낯선 어른이 안기는 엄마아빠의 영정사진을 받으려고 팔을 뻗을 때에야 저절로 펴졌다. 그러자 그때를 기다렸던 듯이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그래서?”라고 묻던 어른들이 이번에는 돌아가며 혀를 찼다. 어린 여자는 장의버스 안에서 영정사진을 품에 안고 자신의 손바닥을 들여다보았다. 물에 불린 것처럼 쭈글쭈글해진 손바닥에 살을 파고 들어간 손톱자국이 선명했다. 손톱자국은 자줏빛 피멍으로 남아 있다가 삼우제를 지낸 며칠 뒤 외갓집으로 옮겨갈 때쯤 사라졌다.
“마지막 인사들 나누십시오.”
당직의가 숙연하게 권고했다. 여자는 기억의 두루마리를 도르르 접었다. 남자의 죽음도 그렇듯 어느 날엔가 기억의 두루마리에서 돌돌돌 풀려나올 때가 있겠지.
“은호야! 은호야!”
비로소 남자의 어머니가 앞서간 자식의 이름을 부르더니 꺽꺽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죽음이 두려운 건지, 죽은 몸이 두려운 건지 선뜻 자식의 얼굴조차 어루만지지 못했다. 남동생의 시선은 고집스레 천장을 향하고 있었다. 그는 죽은 남자와는 아주 딴판으로 생긴 데다 여자와 한 번도 눈을 맞추지 않았다. 누이는 가슴팍에다 성호를 긋고 웅얼웅얼 기도문을 읊었다. 그러더니 깜빡했다는 듯이 여자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그만 발을 뺄 시점이라고, 속생각을 정리하던 여자가 한 발 앞으로 다가서서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마지막 순간까지 끔찍한 고통을 치러낸 사람의 얼굴이라고 하기에는 의외로 고요했다. 겨우 문턱을 하나 넘었을 뿐인데, 믿기 어려운 반전이었다.
간호사가 시트를 끌어당겨 마흔아홉 살로 생의 마침표를 찍은 남자의 얼굴을 덮었다. 하루, 이틀,
사흘…… 여자가 남자의 곁을 내리 붙어 지킨 지 사흘을 넘기고 다시 나흘째 되는 날 아침이었다.
남편에게서 말미로 얻은 일주일 가운데 아직 나흘이 온전히 더 남아 있었다.
큰오빠와는 어떤 사이냐고, 남자의 누이가 가족을 대표해서 물었다. 그런 질문을 받게 되리라 예상하고는 있었다. 여자로선 딱히 내놓을 만한 답이 있진 않았다.
글쎄, 어떤 사이인가. 예전에 잠시 알았던 사이인데 최근에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되었다고, 예전에나 근자에 와서나 특별한 사이는 아니었다고…… 그게 가장 정직한 답변일 테지만 납득 하기 쉽지는 않을 것이었다. 그들은 기왕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여자가 뒷수습을 맡아 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눈치였다. 아니, 그래야 하는 거 아니냐고 노골적으로 밀어붙이려는 기색이었다.
“알릴 건 알려야겠기에 LA에 연락했어요. 그런데 그러냐구, 알았다구, 그냥 그러구 마네요.
건질 게 남았다면 모를까, 부러 날아올 것 같진 않아요. 뭐, 법적으로두 남이구, 우리두 기대 안 했구요. 낼모레가 발인인데 날아온들 절차 다 끝난 다음일 거구요. 저어, 그래서 말인데요……”
여자는 누이의 입을 주시했다. 아니나 다를까, 가족의 의사를 취합했다며 꺼낸 본론은 여자더러 빈소를 지켜달라는 것이었다. 뻔뻔하고 황당한 청이었건만 남은 도리를 다해달라는 주문 처럼 천연스러웠다.
“부고 돌리구 문상객두 받게 될 텐데요, 큰오빠에게 직계 유족이 없다는 건 아무래두 입질에 오르내리기 십상이지 않겠어요?”
“어머니랑 동생분들이 계시잖아요?”
“울 엄마, 자식 앞세운 죄인이라 빈소에 낯 내밀 수 있겠냐 하시구…… 작은오빠나 저나, 올케랑 애아빠 눈치 안 볼 수 없거든요. ……모르세요? 큰오빠가 그런저런 사정, 말 안 하던가요?”
남자에게서 저간의 경과를 듣긴 들었다. 가족들도 알 건 알아야 되지 않겠느냐고 그를 설득하려 했을 때였다. 남자는 어림도 없다며 고개를 흔들었다.
어머니랑 동생들, 맺힌 게 많아. 사업 잘 나갈 때 애엄마한테 갖은 무시를 다 당했으니까. 애 엄마, 워낙에 말본새가 거칠기도 하고.
그만한 일로요?
나중에 사업이 몰리자 애엄마가 돈줄 틀어쥐고 한 푼도 못 내놓겠다는 거야. 부동산 같은 건 모두 애엄마 명의로 돌려져 있었거든. 결국 어머니랑 동생들이 막아줬지. 그러다 폭삭 주저앉는 바람에 본인들이 다 떠안게 됐고. 애엄마 말이, 어차피 다 털어먹고 끝장날 판이었는데 자기가 꽉 붙들고 있어서 그거라도 건졌다데. 그래 좋아, 거기까진. 문제는 그 다음이었어. 자식 공부라도 옳게 시키려면 갈라서자는 거였으니까. 남부끄러운 얘기지. 나 이 지경 된 거 알릴 엄두도 안 나지만, 알아도 진저리들 칠 거야.
“큰오빠도 우리보다 언니를 더 편하게 생각할 거예요. 저어…… 언니라고 불러도 되죠?”
남자의 누이가 여자의 손을 잡아끌었다. 여자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으면서도 그 손을 뿌리치지 못했다. 언제나 그래왔듯이 이번에도 단호하지 못해 미적거리는 새 일이 커지고 있었다. 여자에게 인생은 늘 갈림길이었고, 좋지 않은 것과 덜 나쁜 것 간의 양자택일이었다. 그때마다 엉거주춤 등 떼밀리거나 휩쓸려가거나, 누구에겐가 끌려갔다.
“이런 말, 지금 꺼내긴 뭣하지만…… 저나 어머니나…… 그리고 작은오빠두요…… 언니를 가족이나 다름없다구 생각하구 있어요.”
여자야말로 생각에 잠겼다.
우선 사리에 어긋나는 일이다. 여기까지도 엄청난 무리다. 병상을 지킨 것으로도 모자라 미망인 노릇까지 떠맡았다는 걸 나중에라도 남편이 알게 되면 기함을 하고 나자빠질 일이다. 설령 죽을 때 까지 알지 못한다 하더라도 스스로 죄밑이 되어 평생 가슴 졸일 배신행위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용단을 내려야 한다. 더 늦기 전에. 일이 걷잡을 수 없게 커지기 전에. (중략)
* 본 작품은 <대산문화> 2011년 가을호 지면을 통해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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