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재단 - 21세기 문학의 창 -

웹진 대산문화

첫번째, 겁많은 내 인생

▲ © 운영자

지금 행주대교가 서 있는 주변, 그러니까 행주강이라 부르던 그곳에 강을 건너는 나룻배가 한 척 묶여있고 마을 사람들이 실뱀장어를 잡아 가용을 삼던 강나루가 내 어릴 적 멱을 감던 놀이터였다. 하늘에선 낙하산 훈련을 하는 공수부대원이 거미줄처럼 풀려나왔고 가끔은 낙하산 줄에 뒤엉킨 병사가 갯머리 땅콩밭에 거꾸로 처박혀 죽기도 하던 때였다.

분명 그때는 지금처럼 강폭이 저리 넓지가 않았다. 그러나 왜 그런지 요즘 강 건너 고향 땅을 두고 오가며 내려다보는 한강 하류는 난바다가 따로 없이 광활하다. 그때 열두 서너 살 무렵, 수영을 하며 나는 끝내 한 번도 강을 건너지 못했다. 또래들이 슬금슬금 개헤엄으로 강을 건너 오이밭에 노니는 동안 나는 쓸쓸히 집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강의 반까지 간 적은 있었다. 어느 날 작심하고 강의 반까지는 나갔으나 강의 한가운데서 갑자기 겁이 나기 시작했고, 그때 돌아올 힘으로 내처 강을 건너지 못한 것이 내 인생, 뼈아픈 후회의 시작이다. 삶은 지혜보다 용기의 문제였던 것이다. 그 이전 어린 나의 모습은 야무지고 겁 없는 아이였다고 한다.

얼마 전, 발표한 시의 마지막 한 줄은 겁 많은 내 인생이다.
잠 못 이루는 밤이 길어질수록 번뇌는 밑도 끝도 없이 옛일로만 치닫고 대부분 겁 많은 내 인생으로 새벽잠을 잔다. 문학도 마찬가지다. 어느덧 나는 모든 글에 자기검열을 하고 있다. 어느 선을 넘지 않으려는 약골은 영육이 다르지 않게 되어버렸다. 두려움이란 대부분 죄책감에서 온다는데 강을 건너지 못하는 동심에 무슨 죄책감이 있었을까. 나는 문학에 있어서도 내가 과연 무슨 잘못을 했을까 하고 되짚어보는 경우가 많다.

글이란 원고지를 떠나면 곧 남의 물건이 된다하지만 유난히 내 글은 자기 고백으로 읽히는 경우가 많다. 굳이 밝힐 필요가 없어 외면하고 살아가나 가끔은 그런 시선이 나를 위축시키고 거듭 자기검열에 빠지게 만든다. 내가 쓴 글은 팔 할이 픽션이다. 그러나 1차 독자인 글쟁이들조차 대부분을 논픽션으로 읽는다.

가끔은 재미있기도 하지만 오해와 편견에서 오는 불이익이 적지 않다. 내 성격은 원래 하수구가 차고 넘쳐도 노임이 없으면 수선을 맡기지 않는 성격이다. 설상가상 떼어먹는 배짱은 전혀 없다. 소시민의 초상을 넘어 오래 동안 보아온 분열과 대립, 그리고 고독을 얘기하고자 했으나 부족한 탓에 시선은 무책임한 한량의 자기고백으로 흘러 가버렸다. 어쭙잖게 소설집을 하나 냈었다. 거기 화자의 부모가 깍새와 도사라고 경시받는 이발사 부부가 나오는데 글을 읽은 이가 한 일 년쯤 뒤 조심스럽게 자신의 아버지도 넝마주이였노라고 위로의 말을 건네올 때 어찌 답할 수가 없었다.

이리 치고 저리 쳐도 내 시의 대부분은 사실로 받아들여진다. 그게 꼭 안타까워할 일은 아니로되 내 생활의 태도나 성실성으로 비약이 될 때 안타까운 점이 없지 않다.

자주 이런 구차한 변명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것은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으나 겁 많은 내 인생이 무단히 딴죽을 걸어오기 때문이다. 절경은 아니나 배산임수의 김포는 나름대로 정감이 있는 곳이다. 거기 시대의 아픔이 강물처럼 범람하여 마을을 적신 적은 있다. 내가 자란 김포공항 주변은 현대사의 그림자로 그려질 법한 곳이다. 주말이면 특전사와 해병대와 미군들이 몰려나오는 이 메콩델타에서 일찍이 이념이란 숙주가 자라고 있었다. 그 숙주는 실체가 가엽기 그지없는 나약한 존재였으나 신념이란 어리석은 마취제가 하나의 장대한 성벽을 만들어놓고 말았다. 아군끼리 치고받아 주말이면 거리에 늘 피가 흥건하던 이야기를 요즘 사람들은 잘 믿지 않는다. 지나가는 해병을 특전사 패거리가 불러 곤죽을 내면 다음 주엔 소대장 지휘 하에 트럭으로 몰려나와 닥치는 대로 특전사를 잡아치고 겁먹은 미군 엠피는 공포탄을 쏘아대던 마을의 활극을 나는 오래 전부터 한 번 그려보고 싶었다. 그리고 이념이란 괴물이 얼마나 사소하게 탄생하여 질기게 생명력을 과시하는지도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겁 많은 내 인생이, 내 가족과 마을 사람들이 받을 상처를 생각하여 영영 끈 떨어진 애드벌룬으로 날아가 버리려 하니 애달프다. 하지만 감불생심, 무릎이 아프나 조금 더 힘을 주어 호미질을 하고 조금 더 용기를 내 강을 한 번 건너야겠다. 기필코 강을 한 번 건너야겠다. 흐르면 물이요 건너야 강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