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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 시 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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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건망증이 심했다. 연필로 그림을 그리다 지우개로 수정을 하고 싶을 때마다 지우개를 어디다 뒀는지 늘 잊어버렸고, 지우개를 찾느라 수선을 떠는 데에 많은 시간을 낭비했다. 그러다 연필 뒤에 지우개를 묶어버리는 요령을부렸고, 이아이디어로특허를냈다.‘ 지우개달린연필’을 처음 발명한 하이만 리프만의 이야기다.
나는 리프만 씨가 무언가를 발명했다는 사실보다는 건망증에 시달렸다는 사실이 즐겁다. 건망증이 있었으므로, 내가 이토록 오랜 세월 애용하는 지우개 달린 연필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니까. 건망증이든 무엇이든, 자기 한계에 갇힌 자가 스스로를 돕고자 적극적이어지는 특별한 순간은 위대하다. 발명 혹은 창조의 순간은 언제나 그 순간에서 탄생된다.
그녀는 조각 작품으로 개인전을 준비해야 했다. 청동처럼 너무 무겁고 비싼 소재는 그녀에겐 부담스러운 것이었다. 속이 꽉 차지 않고 비어있는, 그래서 가벼운, 그러면서도 거대한 부피감을 표현할 수 있는 소재에 대해 고민하던 그녀는 고심하며 인도의 바닷가를 산책했고, 그물을 짜고 있는 어부들을 목격했다. 어부들과 협업하여 커다란 그물을 공중에다 연처럼 띄워 작품을 완성했다. 그녀의 작품이 된 그물은 공중에 설치되자, 바람을 받아들여 스스로 움직였다. 스스로 움직이는 대형 설치물이 첨단의 과학기술을 통해서나 가능하다는 고정관념을 깼다. 바람에 순응하는 이 움직임은 테크놀로지에 의한 움직임보다 유려했다. 무엇보다 이 움직임 때문에 그녀의 작품은 친자연적이면서 동시에 첨단인 미술작품이 됐다. 그녀는 이후 바람과 염분으로부터 오랜 세월을 견뎌낼 지속가능한 신소재를 개발했다. 그물코의 원리와 전통레이스의 원리를 접합해서 디테일의 아름다움까지 업그레이드했다. 물처럼 부드럽게 형태를 바꾸어 살아있는 물체가 된 그녀의 그물 작품은, 그렇게 해서 마드리드를 비롯한 도심 곳곳에 설치된다.
1,000평이 넘는 규모의 대형구조물들이 교차로와 광장과 공원에서 신비롭게 날고 있다. 그녀는 서로 모순되는 개념을 추구했다. 거대하면서도 가벼운, 변화무쌍하면서도 질긴. 이 모순이 그녀로 하여금 전혀 새로운 조형물을 발명하게 만든 셈이다. 정규 미술교육을 받지 못했고 제작비용이라는 한계가 있었지만, 어떻게든 자신의 예술철학을 담아보려 노력했던 가난한 예술가 자넷 에힐만의 이야기다.
자넷은 자기한계와 자기의 상상력을 함께 감당해줄 재료를 찾아가는 작업 과정을‘시야가 넓어졌다’는 감회로 표현했다. 전혀 새로운 창조는 언제고 그 배경에 주어진 한계를 자넷처럼 적극적으로 껴안고 활용한 흔적이 있으며, 그때 예술가는 시야가 넓어진다는 걸 그녀를 통해서 나는 알게 됐다.
누구에게나 자기한계는 주어져 있다. 이것에 주목하여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을‘시선(attention)’이라고 한다면, 자기한계를 기회로 받아들여 입장을 갖추기 시작하는 지점을‘시점(viewpoint)’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시야(vision)라는 것은 시선과 시점이 새로운 작용을 낳는‘능력’이다. 시선은 관심으로, 시점은 입장으로, 시야는 실천으로 이어진다. 새로운 시선을 통해서는 나를 다시 보고, 새로운 시점을 통해서는 당신을 다시 보고, 새로운 시야를 통해서는 세상을 다시 본다.
내가 누구인지, 당신이 누구인지는 너무 자주 새롭게 들려주어 도리어 혼란스러울 지경인데, 이 세상이 어떤 곳인지에 대해 새롭게 들려주는 예술작품은 너무 희귀해졌다. 우린 새로운 시선과 새로운 시점을 가진 작품이 무수히 쏟아지는, 예술가와 예술작품의 홍수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면서도 우리의 갈증이 여전한 것은, 요즘의 예술이 새로운 시선과 새로운 시점에 대해서만 관심이 크고 새로운 시야에 대한 관심은 너무 작기 때문은 아닐까.
새로운 시야는 그 장르가 지닌 형식의 한계를 껴안을 때에만 시작된다. 그 형식을 무시하거나 탈피하는 것은 변칙이다. 나는 시를 쓰는 사람이라서, 이런 고민을 다시 해볼 수 있겠다. 음악처럼 휴지(休止)를 기호적으로 가질 수도 없고 영화처럼 음악을 배경에 깔면서 운치를 보탤 수도 없는, 모든 걸 언어로만 해결해야 하는 참 가난한 시의 형식에 대한 고민. 이 가난한 형식을 육체로 알아 거북이처럼 등에 업고 어떻게 비약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 이 가난하다는 한계를 처음부터 사랑했고 그래서 시인이 됐다는 걸 다시 기억하는 의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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