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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번째, 재수없는 삼국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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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인에게 가장 많이 읽힌 책은『성경』일지 모르지만, 한국인에게 가장 많이 읽힌 책은『삼국지』가 아닐까. 아무리 책을 안 읽었다고 자부하는 분들도『삼국지』라면 한두 번쯤 읽어봤을 테다. 설령 책으로 안 읽었다 하더라도, 텔레비전이나 영화를 통해 대강은 음미했을 테다. 정말이지 단 한 번도 『삼국지』를 읽거나 본 적이 없다고 말하는 분도, 유비 관우 장비 3형제, 조조 여포 손권 등이 어떤 인물들인지는 질리도록 들었을 테다.
나 역시『삼국지』덕분에, 살면서 자지리 지루했던 시간들을 적절히 소모할 수 있었다. 여러 대작가 선생님들의 유별한 저작을 두루 섭렵했고 80편짜리 중국드라마를 보기도 했다. 하지만 나 같은 정도도『삼국지』를 아는 척 할 수 없을 만큼, 숱한 버전의 『삼국지』를 수십 번 수백 번씩 되풀이 감상하여 통달 수준에 이른 마니아들이 허다하다. 이제 10살인 내 아들도 마니아가 될 조짐이 보인다. 올 봄부터 101권짜리 만화『삼국지』를틈만나면보더니,『 삼국지』에 나오는인물이름대기게임에서 아빠를 갖고노는 수준에 이르렀다. 내가 한 백 명 댄다면, 녀석은 백오십 명 대는 것이다.
예찬론자들은『삼국지』가 엄청난 교훈과 재미를 준다고 한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사람마다 생각하는 교훈과 재미가 다를 테다.
나는『삼국지』의최대교훈이,“ 좋은권력—정의는절대로불가능하니대중들은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아야 된다”라고 생각한다. 『삼국지』의 인물들은 개나 소나 대의와 충의를 부르짖지만 어처구니없는 소리들이다. 그나마 가장 정의로운 자들이 있다면 권력의 무자비한 통치에 어쩔 수 없이 항거할 수밖에 없었던 농민들의 무리, 황건적이 유일하다. 『삼국지』의 주인공급 영웅호걸들은 중앙권력을 도와 농민들을 토벌하는 과정에서 등장한 싸움꾼들일 뿐이다. 이후『삼국지』는 이러저러한 싸움꾼들끼리 최고로 싸움 잘하는 놈 하나가 남을 때까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싸워대는 얘기뿐이다. 하극상이 난무하고 온갖 비겁한 술수와 계책이 난무한다. 국회의원들이『삼국지』의 영웅호걸을 닮은 것은 다 이유가 있다.
그래서『삼국지』의 가장 웃기는 장면은, 싸움쟁이들이 싸우다말고 문득 대의니 충의니 정의로운 소리를 나불거릴 때다. 죽어라고 싸우던 조직폭력배들이 한일전 축구 시청하면서 어깨동무하고‘애국’을 부르짖는 꼬락서니다.
우리는 스포츠를 전쟁에 비유하기를 일삼으며 즐긴다. 대중은 실제로 전쟁을 하면『삼국지』 꼴 난다는 것을 잘 안다. 실제로 전쟁을 하면 어느 나라가 이기고 지고는 별문제다. 이긴 쪽이든진 쪽이든 권력 상층부와 많이 가진 자들은 별 탈이 없지만, 일반 대중은 다행히 목숨을 건졌다 해도무너진삶의토대에서비참하게살수밖에없다.
『 삼국지』에서보라. 한세력의권력상층부와 부자들은 죽어라고 싸우다가도 불리하면 항복한다. 승자들은 항복한 자들을 그대로 받아주고 다시 그 권력과 재산을 유지하게 한다. 일반 대중만 생고생하고 죽어난 것이다. 대중들의 스포츠에 대한 사랑은 높이 평가 되어야 한다. 스포츠를 사랑함으로써, 권력자들의 전쟁 욕망, “누가 더 센 놈인지 가려보자!”는 조폭적 열망을 통제하고 있는 것이다. 어쨌든 거대부자들의 대리전(거의 모든 스포츠구단은 대기업의 것이다)이든 국가대항전이든 싸움 구경인 것이다. 싸움 구경만큼 재미난 게 없다. 그러니 싸움이 주구장창 이어지는『삼국지』야 말로 엄청 재미있을 수밖에 없다.
사실나는『삼국지』가참재수없다.『 삼국지』가없었다면,『 삼국지』따위에 소모된 훌륭한 작가들의 역량이 한국의 역사와 한국인의 삶을 기록한 이야기를 창출하는 데 기여했을지도 모른다. 결정적으로『삼국지』보다 더 많은 재미와 교훈을 갖고 있지만, 사장될 수밖에 없던 좋은 책들이 한권이라도 더 읽혀졌을테다.『 삼국지』의 진정 무서운 매력은 이처럼 재수없다고 여기면서도 눈에 띄면 또 보게 만드는 불가해한 중독성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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