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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신하는 책 1982년의 화제작『백 년 동안의 고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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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설을처음만난건고등학교에다니던시절이었다.『 백년의고독』이라는간략한 제목을 달고 있었는데, 낯선 지명과 똑같은 이름의 등장인물들과 허무맹랑한 사건 전개에 질려 즐겁게 읽지는 못했다. 그게 우리의 시시한 첫 대면이었다.

두 번째 만남은 그로부터 삼 년 뒤, 대학 동아리에서의 발표를 준비하면서였다. 이번에는『백 년간의 고독』이라는 제목이었다. 아,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내가 전에 본 그 소설이 맞는지 혼란스러울 지경이었다. 일단은 낯선 지명이 전처럼 거북하지 않고 오히려 매력적이었다.

‘아르카디오’나‘아우렐리아노’따위의 인명이 중복해 등장하는 것도 삶의 무한반복을 상징하는 신선한 장치로 여겨졌다. 이른바‘마술적 사실주의’라 불리는 서사기법 역시 새롭고 놀라웠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아직은 독서가 가벼운 취미에 불과했던 탓일 것이다.

다시 몇 년이 지난 어느 가을이었다. 이제는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제목을 단, 안정효 번역의『백 년 동안의 고독』을 읽으며 나는 몇 번이고 독서를 중단해야 했다. 무섭고 숨이 막혔다. 그 즈음 작가가 되어보겠답시고 여기저기 원고를 보내던 나에게 있어『백 년 동안의 고독』은 어찌 깎아내릴 도리가 없는 서사의 원형이요 정본이었다.

신화를 연상시키는 첫 장면에서부터 예언이 입증되는 마지막 장면까지 쉴 새 없이 갈래를 치는 이야기의 격류들은 좁게는 부엔디아 가문의 흥망성쇠, 넓게는 라틴아메리카의 근대사, 더 넓게는 에덴에서 비롯된 인류사 전체와 맞물리면서 어지러울 정도의 웅장함과 폭발력으로 나를 뭉갰다. 거의 모든 문장이 주문과 같은 기법으로 쓰였고, 그러한 황홀은 소설을 읽을 때보다는 다 읽고 나서 전체를 되새김질할 때 더욱 크게 다가왔다. 소설의 첫 부분이나 마지막 부분, 혹은 손이 닿는 아무 부분을 펼쳐보아도 거기에는 거역할 수 없는 세이렌의 마성이 도사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 역시 이미 많은 사람들이 경쟁하듯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며칠 전 이 서평을 쓰기 위해 다시 펴들었을 때, 나는『백 년 동안의 고독』이 그새 또 한차례 변신했음을 발견했다.

이 소설은 서사를 풀어내는 것이 아니라 서사 자체를 언급하고 있다. 말하자면 제시된 서사가‘꾸며진 이야기’에 머물지 않고 서사 자신을 반영하는 쪽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숨겨진 화자인 집시 멜퀴아데스는 벌어질 모든 현상을 예언하고, 이후에 벌어지는 마콘도에서의 삶은 그 예언에 시간적 질서를 더하며 도열한다. 양피지의 문장이 끝나는 동시에 소설의 서사도 끝난다. 요컨대 기존의 진실이 서사로 허구화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허구가 새로운 진실로 현현하고 있다. 같은 관점에서 서사창작행위 자체에 대한 은유도 도처에서 포착된다. 이를테면 아마란타 우르슬라와 아우렐리아노가 자신들의 관계를 찾아가는 장면은 서사구조에‘개연성’을 부여하는 과정과 흡사하다. 기존에 발화된 내용을 바탕으로 앞으로의 행동이나 사고를 결정하는, 또는 현재의 행동이나 사고에 논리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작업인 것이다.

『백 년 동안의 고독』에서‘이야기’란 단어는 예언인 동시에 살아있는 모든 존재에게 부여된 쾌락의 원천, 다시 말해 행동을 촉발시키는 동기다. 우르슬라도, 페르난다와 그 아들도, 레메도 모두 자기 자신을 위해 이야기를 지어낸다. 이야기의 흐름을 바꾸는 능동적인 인물들은 모두 이야기를 지어내고, 주어진 운명에 순응하는 인물들은 모두 이야기를 경청한다. 소설의 결말을 주도하는 인물인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는 양피지에 적힌 역사를 통괄적으로 해독한다. 텍스트의 최종 마침표를 기점 삼아, 그간 제시된 모든 의미들의 연쇄가 바야흐로 정리되기 때문이다. 참혹하게 죽어간 가문의 마지막 후손은 갓난아이로서, 서사행위의 양방향을 통틀어 가장 무기력한 존재다. 발언의 시간도 경청의 시간도 이제는 끝이 났기 때문이다.

더불어 이 소설에는 지어낸 이야기로 인해 왜곡되는 현실과, 그에 대한 꾸며낸 이야기의 저항으로 해석될 법한 메타포가 수차례 반복되어 등장한다. 예를 들어 학살당한 삼천명의 시위 군중에 관한 역사적 사실은 지배계층이 지어낸 가짜역사가 은폐한다. 그리고 그 순간에 왜곡된 역사는 진짜 역사를 대체하는 무정한 현실이 된다. 이 경우 진실이 아닌 현실과 진실인 현실 사이에 우리가 가늠할 수 있는 어떤 표식이라도 있는가? 소설이 내리는 답에 의하면,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가 진실이라 믿고 있는 대상에게 어느 정도의 신뢰와 확신을 보내야 할 것인가? 혹은 어느 정도의 회의와 의혹을 보내야 할 것인가? 궁극의 진실은 엄격한 단수일 수밖에 없기에, 조금이라도 회의와 의혹이 깃든다면 그 진실의 순수성은 밑바닥까지 훼손된다. 그런 기준 하에서는 황당무계한 허구가 오히려 정직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왜냐하면 그러한 이야기들은 의심의 여지없이 허구이기 때문이며, 적어도‘허구성’하나만큼은 올곧게 신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서사문학의 핵을 아우르는 절대기준, 작가들의 코기토가 발현되는 시점이다.

이것은 우리 세계를 모사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 세계를 품고 있는 이야기다. 기억에 없는 과거를 수렴하고, 아득한 미래를 예상표절한다. 우리 각각의 삶이 이 책의 매 페이지, 또는 매 문장인 것이다. 아니, 이렇게 말하는 편이 낫겠다 —『백 년 동안의 고독』은 세계 자체에 대한 이야기라고, 왜냐하면 세계가 실은 이야기로 이루어졌으며 이야기야말로 우주만물이 작동하는 기본원리기 때문이라고.

모든 좋은 글은 살아서 스스로 변신한다. 나는 이 책을 네 번 읽었으며 그때마다 각각 ‘이질감’과‘새로움’과‘폭발하는 서사’, 그리고‘이야기의 본질에 관한 자기 반영’을 읽었다. 훗날 이 위대한 소설을 다시 접할 때 과연 무엇을 발견하게 될지, 지금의 나로서는 감히 짐작조차 할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