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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희귀한 필체로도 그녀의 이승에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 줄 수 없다”

필기술(筆記術)의 혹한

여기 손목에 퍼진 희미한 선들에 응답하는 하나의 이야기가 마련되어 있다.

어느 날‘산골 소년’이 여인을 만나러 그녀의 방으로 찾아간다. 그녀의 문은 잠겨있다. 산골 소년은 문 앞에서 그녀를 기다린다. 며칠이 지나도록 그녀는 소식이 없다. 소년은 마침내 문에 귀를 기울여 본다. 혹시나 방에서 나오는 소리가 없는지 확인해 본다. 방 안은 아무 기척도 나지 않는다. 소년은 종일 방문에 귀를 갖다 댄 채 서 있다가 저도 모르게 잠이 들어버린다. 마치 이렇게 닫힌 방문에 귀를 대고 있는 것을 지속하는 일이 자신이 믿는 열정의 중요한 견고함이라는 듯이 그는 문 안의 세계에 대해 주의력을 잃지 않으려고 하면서도 문 밖의 어떤 한기에 젖어가며 잠이 들기 시작한다. 잠결에 언뜻 눈이 가득 쌓인 방안이 보였다. 눈이 어떻게 방안에 쌓이기 시작했는지 그의 내부로 그는 그것을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밤이 진행되는 동안 한 눈이 다른 눈에 물들어 가듯이 그의 내부는 고유한 필기술로 자신의 지구를 돌리고 있는 듯 했다. 눈이 쌓인 방바닥에 발자국 몇이 어슴푸레 보인다. 소년은 눈 위에 찍힌 발자국에 가까이 다가가 두 볼을 대어본다. 발자국에서 바다냄새가 난다. 소년은 꿈속의 꿈을 떠올린다. 방금 전까지 꿈에서 보았던 것 — 발자국들이 바다 속으로 가라앉는 꿈 — 을 보고 있는 것이다. 소년은 자신의 모습이 눈사람이라는 것을 그때서야 알아차린다. 눈사람인 몸은 존재하지만 발자국을 가질 수 없다. 소년이 흐느끼는 이유는 꿈에 본 바다 속으로 가라앉고 있는 그 발자국을 따라갈 수 없기 때문이다. 눈사람은 발이 생길 때까지 자신의 손으로 바닥의 눈을 뭉쳐 두 발을 만들기 시작한다. 햇볕
이 그의 눈동자를 녹일 듯이 뜨겁다. 마침내 소년이 잠이 깨고 방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방에는 유리병이 쏟아져 있고 그 옆에 몇 알의 리도카인*이 흩어져 있었다. 그녀는 차갑게 식은 채 그 옆에 누워 있었다. 해안의 모서리에 걸린 듯한 그녀의 손목에선 해안선(海岸線)이 풀려나와 있었다. 소년은 바다로 흘러가려는 그 해안선을 막아보기 위해 그녀를 등에 업고 뛰기 시작했다. 손목이 세상 밖으로 나와 거칠게 출렁거리기 시작했다.

이것은 손목에 관한 하나의 작문이다. 이 작문은 자신이 보았던 한 손목에 관해 망각을 굽기 시작하는 한 소년의 기진한 산문이다. 연인의 손목에서 흘러나오는 핏줄기를 자신이 따라갈 수 없는 해안선이라고 부르기로 한 사내의 흉중구학(胸中舊學)이다. 의식을 다 치르고 난 후 숨죽인 부름에 응답하기 위해 빈한하고 쇠잔한 소년의 필기술에는 잔설이 남는다. 해안선을 따라 흩어져 있는 잔설(殘雪).

폭설이 내리는 어느 겨울, 어느 민박집 방에 누워 소년이 며칠 째 물 한 모금 마시지 않으며 귀에서 물비린내가 나도록 파도소리를 듣고 있을 때, 그 병의 백열에 관해 궁금해 하지도 않은 채 그녀는 방안에 더운 물을 놓고 가곤 했다. 그토록 사람을 기진하게 만드는 생리가 무엇인지 궁금해 하지도 않은 채, 보이나 들어가 볼 수 없고 만질 수 없는 연인의 목젖처럼 그 목젖을 꺼지지 않도록 하는 상대의 호흡에 귀를 기울이는 일에 일생이 달려있다는 듯이, 불가해한 침묵에 어떤 생명을 물들이는 것이 하나의 단순함에 달려있다는 듯이 — 마치 그것을 어떤 정보로도 조작할 수 없으며 어떤 착오로도 닿을 수 있는 시적 상태라고 믿듯이 — 그녀는 자신이 걸어가고 있는 해안선이 어디로 닿아있는지 무엇인지도 궁금해 할 법도 한데, 그녀는 잠든 소년의 발을 더운 물에 씻어 주고 방문을 닫고 나가곤 했다. 소년은 잠결에 얼핏 자신의 발에 어떤 뜨거운 해안이 밀려왔다 가는 것을 느끼곤 했다. 지금 소년의 필기술은 백열상태를 거듭하며 어둠 속에 침묵하며 서있는 에우리디케와 이지스와 헬레네의 돌기둥을 깨우고 있다. 그 돌연한 신의 침묵들에 다가가서 입을 벌린 채 울고 싶듯이. 사내의 필기술은 과오를 범하고 있는 것일까? 소년은 그 방에서 자신의 손목을 긋던 날 자신을 가득 채우고 있는 피가 어떤 혼령이듯 빠져나가
는 것을 바라보았다. 너무나 단단한 세계의 견고함이 그의 핏방울 하나하나에까지 가득 찬 감옥을 만들고 있음에 환멸을 가진 채 그 감방을 모두 열어주는 세계가 지금 자신의 용기에서 시작되고 있음을 야릇하게 느끼며 그는 자신의 피와 눈부신 공모를 시작하는 듯 했다. 그는 혼미한 미소를 던지며 밖으로 빠져나와 바닥에 흘러내리는 자신의 혈액들을 바라보며 그 피에 드디어 올라타 항해하는 기분으로, 고장난 돛배처럼 그러나 처음으로 내부에서 터져 나온 자신의 피에 올라탄 눈부신 공모자의 항해를 시작하는 듯 했다. 누구나 꿈속에서 한번은 자신이 뛰어든 해안이 자신의 핏속이라는 것을 느끼며 경련을 일으키듯이.

손목에서는 해안(海岸)이 흘러내렸다. 그러나 한 입술이 그 해안선을 막아섰다. 그때 그의 필기술은 혈액이 넘쳤다. 후에 그녀의 손목에서 똑같은 해안선을 발견했을 때 그의 필기술은 기척을 내지도 못한 채 숨을 죽여야 했다. 그는 그동안 가꾼 필체로 한때 자신의 손목에 숨어 살던 백열(白熱)을 숨길 줄 아는 재주를 만들었지만 그는 멀지 않아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알았다. 그는 다시 한 번 정신을 섬기는 힘이 아무짝에도 소용없으며 이 세계에는 자신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공모가 숨겨져 있지도 않으며 일상의 기진한 나락에 길들여져 괴발개발한 자신의 필기가 무용지물에 가깝다는 것을 깨달았다. 저물 무렵 눈속의 연약한 빛보다 못한, 태양의 작렬한 사심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일생동안 단 한 번도 태양을 올려다보지도 않은 자존으로 묵묵히 고개를 숙이고 걸을 수 있는 낙타의 단조로운 항일보(抗日步)보다 못한, 낙타가사막에떨어뜨리는속눈썹한줄기보다촉촉하지못한,‘ 필기술의혹한’이온다는것을.

그녀가 잠들어 있는 병실에 있다가 조용히 집으로 돌아와 소년은 자신의 필기술을 꺼내놓고 자신의 지구에 무엇인가를 물들이려고 해보았다. —천구는 신의 손가락에 의해서 돌아간다고 할지라도— 자신의 필기술로 움직일 수 있는 세계가 있을지, 링거액처럼 그녀의 몸에 뭉클한 생명을 회복시킬 수 있는 푸른산도가 가능한 것인지, 고개를 숙이고 사내는 눈물을 떨구었다.‘ 나는어떤희귀한 필체로도 그녀의 이승에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 줄 수 없다’링거액이 뚝뚝 그녀의 혈액으로 떨어져 퍼지는 동안 소년은 그녀의 손목으로 흘러나온 해안선이 다시 안으로 밀려들어간 것을 바라보았다. 실은 안으로 잘 박혀들어간듯 했다. 소년은 물굽이를 끼고 도는 그 겨울의 해변을 떠올렸다. 그 장소를 다시 찾아 갔을 때 사내는 팔을 걷어 자신의 손목에 움직이고 있는 실밥들을 바라보았다. 마치 낙타의 무리들처럼 이어진 행렬(行列)들을. 아직도 사막을 건너가는 중인 손목의 그 행렬들에게서 숨소리가 나는 것이었다. 소년은 낙타의 곱고 더운 입김들을 느꼈다.

손목에 대한 하나의 작문(作文)은 당신이 다시 시작해야 한다. 당신은 어떤 필기술로 그 밀려 나오는 해안선을 막을 수 있는가로 시작되는.

낙타의 행렬

소년은 그동안 물 한 모금, 아무것도 마시지 못했는데 자신의 노트의 한 구석을 차지하던 그 해변의 침묵과 불꽃에 대해 느껴지는 무연한 고요를 느꼈다. 그녀가 병실에서 손가락을 다시 까닥이며 이쪽으로 기척을 보내왔을 때, 소년은 자신의 필기술에 더 이상 공포를 느끼지 않았다.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는 것들에게서 질투를 느낀 나머지 삶을 지속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고독하고 비밀에 가득찬 조건을 극복할 수 없는 그 무연한 행렬(行列)들에 입을 맞추며 사내는 새로운 필기(筆記)를 느꼈다. 노트들을 가득 들고가 불에 태우던 그 해변의 불꽃에 대해, 생각하며 그녀의 손목에 곧 새겨질 낙타들의 행렬을 떠올렸다. 낙타들의 입술에 자신의 입김을 한번 불어넣어준 후 그는 필기를 마친다. 그밖의 것들에 대해서는 눈을 감아버리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