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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 상상 불가능한 것의 절정

사람 이외의 것에서 사람을 느끼고 상상할 수 있었던 것은 책이 전부였다. 동화책과 만화가 그랬다. 만화와 동화로 보이지 않는 사람을 상상하고 그 삶을 느끼기 위해 밤이 되면 호롱불에 기대야 했다. 엄마는 늘 기름 없앤다고 좋아하지 않았고 나는 밤잠을 설치며 호롱불 밑에서 책을 읽었다. 요샛말로 초등학교 때의 일이었다.

중학교 들어갔을 때, 아마 1학년쯤 전기가 들어왔을 것이다. 기억이 정확하지는 않다. 어쩌면 그보다 한 두 해 늦었을지도 모르겠다. 책을 보다가 그만 졸아서 앉은뱅이책상 위에 얹어둔 호롱불을 머리로 쳐 아침이면 머리가 온통 석유로 범벅이 되었던 것, 어머니에게 야단맞았던 것들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그런데 읍내에 전기가 들어오면서 조금 변했다. 책이 아니어도 보이지 않는 사람들을 느끼고 상상할 수 있는 신기한 덩어리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그건 새카만 벽돌 크기의 기계였다. 아버지는 그것을 사오고 그것의 등짝에 그것과 크기가 비슷한 약을 매달아 안방 벽에 걸어놓으셨다. 나는 아버지 몰래 그것의 작동을 익혀 아버지가 계시지 않으면 그것을 독차지 했다. 거기엔 아주 작아, 아마 좁쌀보다 더 작을 것 같은 사람들이 말하고 노래했다.

그 까만 덩어리 안에서는 여러 가지를 했는데 나는 특히 연속극을 좋아했다. 책을 읽고 그 내용에 사로잡혀 울고 웃던 것과는 좀 달랐다. 비가 오면 빗소리가 들리고 바람이 불면 바람 소리가 났으며 파도치면 파도 소리가 들렸다. 나중에 그런 것이 효과라는 걸 알았고 그런 효과를 만들어주는 사람의 이름이‘김벌레’라는 것도 알았다.

특히 노래들은 학교에서 배우는 것들과는 그 가락이며 정조가 달랐다. 깊고 다양해서 학교의 음악이 시시해질 지경이었다. 나는 내 고장 읍내와 학교를 우습게 여기기 시작했다. 나는 연속극의 다음 줄거리가 미칠 듯이 궁금했다. 그리고 얼마나 더 지났을까. 중학교 상급반이던가, 고등학교 1학년쯤이었던가. 고등학교라면 학년 전체가 모두 서른 두 명이어서 거짓말 보태면 아침에 무슨 색깔의 똥을 누고 왔는지 다 알판이었다.

그 중 이런 아이가 있었다. 그 애의 친척이 국회의원이라고 했다. 방학 때 서울의 그 집에 다녀왔다고 했다. 한 달 사이에 얼굴이 말개져서 돌아왔다. 우리로 말하면 서양 사람들이 코리아의 하늘을 칭송하던 시절이라 여름이면 뙤약볕에 타서 얼굴이 검었다. 코리아 중에서도 설악산 바로 아랫동네인 양양 읍내의 햇볕은 맑고 밝아서 청정함을 비할 데가 없었다.

여름 방학 한 달 사이에 우리와 달라진 그 애. 한동안 그 애가 우리 교실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 애는 서울에서 본 것, 먹은 것, 가본 곳들을 이것저것 마구 이야기했다. 우리는 그 애를 둘러싸고 입만 벌리고 있었다. 감히 부러워 할 수도 없었다. 그 애가 말하는 것들은 상상이 가지 않는 게 대부분이었다. 예를 들어 감자떡이 양양에서 먹어 본 것보다 맛있더라, 하면 우리가 금방 이해했을 것이다. 그런데 오렌지라거나 카스텔라로 나가면 우린 그저 입만 휑하니 벌리고 그애를 우러러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런데 그 애가 우리를 상상 불가능한 것의 절정으로 몰아간것 중에 이름도 가물가물한‘무엇’이 있었다. 아마 그 애는 그것의 이름을 정확히 말했겠지만 그게 영어 이름이라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 애는 집안에서 그걸 보는데 가수도 나오고 영화배우도 나오고 대통령도 나오고……

“어떻게 생겼는데?”

그 애는 아마 두 팔을 벌려 네모 상자를 그려보였을 것이다.

“극장 같너?” 이랬을지 몰랐다.

그 애는 열심히 설명했겠지만 우리들 대부분은 그 신기한 물건을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건 마치 이랬다. 우리가 중학교에 들어가서 가사 시간에 여성의 생리에 대해 배웠는데 아무리 가사 선생님이 설명을 해도 감을 잡지 못했다. 피가 나온다는 것도 무섭고 그것이 무슨 신호도 없이 흘러내린다는 것도 무서웠다. 오줌 마렵듯이 그래유? 하고 물으면 선생님은 그렇지는 않다고 대답하고 나중에 다 안다고 그랬을 것 같다.

그 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오게 되었다. 서울에 살아도 되게 해 준 건 서라벌 예술대학이었다. 그 대학은 지금 없어졌지만 미아리고개 너머에 있었다. 그 학교를 찾는 동안 나는 수도 없이‘한 많은 미아리고개’를 속으로 읊조렸었다. 철사줄에 꽁꽁 묶인 채로 돌아보고 또 돌아보고 맨발로 절며 절며 울고 넘던 그 고개, 한 많은 미아리고개……를 찾아내고 시험 보고 입학했다. 내 생활 반경은 미아리고개 안팎이 되었다.

이즈음 어느 날 구멍가게에 몰려든 사람들을 보았다. 사람들은 네모진 상자에서 번쩍거리며 지나가는 장면들을 보고 웃거나 고함지르거나 침묵하곤 하였다. 모든 사람들이 다 관심을 기울이는 것들, 그러니까 무슨 이름난 경기라거나 연속극 같은 것이었으리라.

내가 그걸 처음 본 순간 예전의 양양여자중·고등학교 교실에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물건을 갸우뚱거리며 듣던 바로 그 물건이라곤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의 이름이 텔레비전이라는 것도.

내가 그 기계를 자발적으로 들여다 본 건 사람이 지구별에 살기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달이라는 별에 가서 발을 딛는 사건이 생긴 날 밤이었다. 물론 구멍가게 앞에 진을 친 사람들 틈서리에 끼어서였다. 결국 나도 어느 땐가 흑백 TV를 샀고 그 후 천연색 TV를 샀으며 그런 것으로 바꿀 때 마다 맘 속 깊은 데서 으스댐이 끓곤 하였다. 그러나 아직도 라디오에 기울였던 순정 이상으로 TV를 좋아하지 못한다. 하지만 혼자 있을 땐 아무 생각 없이 TV를 켠다. 거기서 살아있는 것들의 소리를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내가 그 기계를 멸시해도 나는 이미 그것 없이는 감당하기 어려운 외로움을 키워 놓았으니까. 그렇게 길들여졌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