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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기 해양문학의 장을 연 최초의 남극탐험 소설『서해풍파』

“내가 항해학을 배운 목적은 태평양에 배 한 번 띄워 보자는 것이었소. 우리 형제가 쌓은 다년간의 경험도 적지 않지 않소. 지금은 구미 각국 신문지상에 연일 북극탐험을 하느니, 태평양 한 가운데 작은 섬을 발견했다느니 하며 탐험가의 명예가 세계를 뒤흔들고 있네. 이참에 우리도 모험적 사상으로 일을 한 번 해보세. 이 기회를 잡지않고 다시 어떤 때를 기다리겠나?”

이상춘의 신소설『서해풍파(西海風波)』(1914년) 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1914년 유일서관에서 펴낸 113쪽 분량의 이 장편소설은 한국문학사상 처음으로 뱃사람들의 생생한 삶과 원양항해, 조선술과 항해학, 남극대륙의 발견 등을 다루고 있다. 남극에 세종과학기지가 세워진 것은 1988년이다. 하지만 남극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그보다 훨씬 앞섰고, 그 시작은 과학이 아닌 문학이었다. 노르웨이 탐험가 아문젠의 남극점 정복이 있고난 3년 뒤였다. 당시 우리는 일제강점기 아래 짓눌려 구조적인 경제수탈과 민족동화 정책을 강도 높게 강요받던 때였다. 이런 암울한 시기에 이상춘은 진취적인 해양소설을 발표한 것이다. 나라를 빼앗겨 우리말의 사용조차 엄격히 통제되고 제국주의의 본질인 경제수탈이 본격화되던 1910년대의 일제강점기 아래서 식민지 조선의 평범한 두 형제가 과감히 남극탐험을 도전해서 성공한다는 이야기가 담긴 소설이었다. 우리 문학의 또 하나의 탄생이었다.

늘봄(또 다른 호는 백야) 이상춘은 1882년 개성에서 태어났다. 유년시절 한영서원에서 신교육을 받은 후 주시경 선생의 문하생으로 입문하여 우리말 가르침을 받았다. 그 후 송도고등보통학교 교편생활을 거쳐 개성고등여학교 교장을 지냈고, 생전엔 조선어학회 한글맞춤법 초안 작성위원,『 조선어사전』편찬위원회준비위원으로활동하며우리말을지키고가꾸었다. 저서로는『조선어문법』을 비롯해『국어문법』『주해용비어천가』『조선옛말사전』등을 남겼다. 특히, 1925년에는 당시로선 제대로 사용할 수조차 없던 우리말 9만여 어휘를 혼자서 수집·정리한 후 조선어사전편찬을 위해 아무런 대가없이 기증했다. 지금의『우리말 큰 사전』의 주춧돌을 놓은 셈이다.

이상춘의 언어관은‘대중의 공유’에 주안점을 두었다. 언어는 그 시대‘대중과 함께 힘쓰고, 함께 바로잡을 의무와 책임’속에서만 살아 있을 수 있다고 믿었다. 더욱이 이런 일은 학자들에게만 맡겨두기보다 당대인 모두가 나서서‘힘써 배우고 힘써 익히며’자기 몫을 찾고 기려야 한다는 신념으로 우리말을 연구·보전했다.

언어의 공동체적 정신을 중시하고 시대와 더불어 생물처럼 변하는 우리말을 힘써 연구하는 동안 문학작품도 여럿 남겼다. 대부분 1910년대에 집중 발표되었다. 소설의 내용은 어두운 현실보다 새로운 세계와 희망의 메시지를 중시했고, 문체는 밝고 힘찼다. 신채호와 함께 발표한 단편「기로」「백운」「두 벗」「정(情)」과 같은 작품들은 신문명을 동경하는 신세대 젊은이들의 진취적인 기상을 다룬 반면, 장편『박연폭포』는 종교와 일상적인 삶이 어우러진 포용과 역설적인 삶을 그렸다. 주된 내용은 도적이 개과천선한 후 기독교 신학을 연구하고, 목숨을 노리는 원수를 오히려 사랑으로 대하는, 기독교의 박애정신이었다.

비록 일제에 맞선 직접적인 투쟁의 삶을 그린 것은 아니었지만, 이상춘의 문학관은 우리말 연구에 깃든 공동체적 언어관과 맥을 같이 했다. 현실은 절망스러워도 우리에겐 적어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용기가 있다는 강조였고, 크든 작든 처음 품은 자신의 꿈을 절대로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자존감에 대한 환기였다.

『서해풍파』도 그 중 하나다. 무엇보다 이 소설은 우리 근대문학사의 지형도를 고쳐 놓았다. 1910년대에 나온 대부분의 신소설은 남녀 간의 애정행각을 다룬 통속물이 지배적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과감히 남극으로의 진출을 작품화했다는 것은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상춘,『 서해풍파』(원본) ,최영호,『 서해풍파』(번역본)

『서해풍파』의 의의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신분의 귀천을 떠난 투철한 직업관과 철저한 과학정신을 강조했다. 연안의 삶을 혁파하고 먼 바다로의 진출을 시도하는 도전정신, 베게너의 대륙이동설에 입각한 철저한 탐구정신, 조선술과 항해학의 근간인 물리, 화학, 산술, 대수, 기하, 삼각학 등 기초 학문의 가치를 중시했다. 시대를 앞질러 사유하는 작가의 남다른 세계관과 문학적 상상력의 결합물이었다.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본 사람들이면 절감한다. 바다에서의 위치를 정확히 측정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과학기술이 미비하던 시절, 바닷사람들은 땅을 보던 눈을 접고 오히려 하늘을 봐야 했다. 하늘의 별자리가 자신들의 위치를 가르쳐 주었기 때문이다. 이 간단한 사실은 육지 중심의 사고가 바다를 통해 어떻게 우주적 사고로 전환되는지를 각성시켰다. 철학사에는 일대 변혁이 일어났고, 천문학과 항해술의 발달이 궤를 같이 했다.

바다에 대한 우리의 도전은 언제부터였을까? 선사인들이 남긴 비밀스런 유적에서 일부 찾을 수 있다. 6천 년 전에 제작되었다고 추정되는 울산 반구대 암각화가 그 증거다. 미술사에서도 매우 중요하게 거론되는 이 암각화는 가로 5미터, 세로 3미터 크기의 암벽그림이다. 여기엔 선사인들이 새겨 놓은 190여종의 그림들로 채워져 있다. 지금도 생태학적 비밀이 풀리지 않는 수십 종의 고래들, 육지동물, 배, 사람 형상, 포획도구, 심지어 잡은 동물들의 분배방식과 선사인의 미의식까지 새겨진 그림이다. 이 가운데는 어미 고래가 새끼 고래와 함께 유영하고 다른 바다동물들과 떼를 지어 이동하는 등 갖가지 바다동물들의 군집생활도 만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선사인들이 바다를 두려워하고 먼 바다로의 진출을 꾀하지 못했어도 이런 암각화가 그려질 수 있을까?

▲ 남극 세종과학기지 전재규 대원에게 번역본『서해풍파』를 헌정하는 필자. 부조에 새긴 헌정의 글은 공지영 작가가 썼다.

육지에서 바다를 보는 것만으로도 어미 고래와 새끼 고래가 함께 유영하는 광경을 새길 수 있었을까? 세심한 관찰 없이 포획한 고래만 봐서는 다른 바다동물들과 군집생활을 하는 고래 떼의 비밀은 풀 수 없고, 실제 광경을 바다에서‘직접’목격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적어도 먼 바다로의 진출을 돕는 조선술과 항해술 같은 과학기술이 부재했다면 거의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었으리라. 바다에서의 정확한 위치 추적과 과학기술의 발달은 바다에 대한 우리의 사고를 전환시키고 바다와 우리와의 관계를 다시 생각해 보게 한다.

『서해풍파』는 일제 강점기의 암울한 식민지 현실에서 하층민의 투철한 직업관과 확고한 신념을 대비시켜 보여주었고, 동시에 먼 바다로 나가려는 우리의 도전 의식과 조선술과 항해학에 대한 과학적 인식, 남극대륙을 탐험하는 개척정신을 집약해서 보여준다는 점에서 한국 해양문학사 연구에 한 획을 긋는다.

깜빡하면 잊어버릴 뻔한 우리 문학의 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 필자는 지난 2006년『서해풍파』(한국국학진흥원)를 번역했다. 그런 후 2003년 남극 세종과학기지에서 조난당한 동료 과학
자를 구하러 나섰다가 숨진 전재규 대원의 영전에 헌정했다. 적어도 이렇게 하는 것이 일제 강점기에 혼자서 연구한 우리말 9만여 어휘를 조선어사전편찬회에 바친 한 작가의 고귀한 뜻을 잇고 남극을 품에 안고 살았던 두 분의 넋을 기리는 일이라 여겼다. 그리고 이듬해 봄 독립기념관 이상춘 선생의 영전에도 헌정했다. 이상춘의『서해풍파』는 우리 해양문학의 의미 있는 출발인 동시에 일제 강점기 아래서 도전과 패배를 두려워하지 않는 우리 민족의 자긍심의 한 표상이었으며, 우리의 독립의지를 드높이는 자극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