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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이런 희곡들을 쓰게 됐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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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은 간다』에 얽힌 사연들을 돌아보며

작가로 데뷔한 지 십 년 만에 첫 창작집을 묶었다. 십 년이면 강산이 한 번 바뀐다는 세월이지만 그동안 무대에 올린 작품은 네다섯 편 정도이고 그 몇 편 안 되는 희곡 중에서 또 선별과정을 거쳐 책을 출간하려다보니 변변히 내놓을만한 작품이 없었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돌이켜보면 단 한 번도 독한 마음을 먹고 희곡 창작에 매달린 적이 없었던 것 같기도 해서 슬며시 낯이 붉어진다.

이제 겨우 세상에 갓 얼굴을 내밀고 걸음마를 하게 된 따끈따끈한 희곡집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나 자신에게 물어본다. 난 어쩌다가 이런 글들을 쓰게 됐을까.

그와 관련된 재밌는 일화 한 토막.

▲최창근

최근에서야 알게 된 일이지만 외가댁은 내가 살던 고향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세도가 당당했던 선주(船主) 집안이라고 했다. 캐비닛을 열면 돈다발이 와르르 쏟아질 정도였다고 하니 그 위세가 얼마나 대단했었나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다. 외할아버지에게 신세를 진 고향 사람들은 외할머니를‘마님’으로 떠받들었고 어머니 역시 어렸을 때부터 아주 자연스럽게‘아씨’소리를 들으며 귀하게 컸었나 보다. 그러다가 외할아버지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가세가 기울기 시작한 것은 어머니가 막 결혼할 무렵이라고 했다.

유년 시절 내 주위엔 온통 여자들밖에 없었다. 외할머니, 어머니, 이모 같은 이름들 사이에‘아버지’는 없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그는 유명한 의사였고 불의의 사고로 일찍 세상을 떠났다고 했지만 남은 것이라고는 달랑 사진 몇 장 밖에 없었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남아있는 사진 몇 장으로 내 출생의 비밀(?)을 어림잡아 가늠하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어렸을 때부터 가까운 사람들의 어이없는 죽음을 여러 번 겪어서였는지 난 일찍부터 조숙한 허무주의자가 되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일 년이 가도록 얼굴 몇 번 제대로 볼 기회가 없었던 어머니를 대신해서 한 마리 가여운 짐승 같았던 어린 손자를 먹이고 입히고 길러주셨던 외할머니는 어느 머나 먼 별에서 온 손님이었을까, 지금 생각해보면 아득하기만 하다. 고등학교 때 세상의 전부였던 외할머니가 돌아가시자 사춘기 소년의 때 늦은 방황은 시작됐다. 하나뿐인 아들에 대한 기대가 컸던 어머니는 그 아들이 세속적인 출세와는 너무나 거리가 먼 길로 들어서려 하자 분통을 터뜨렸다. 그때부터 전쟁 같은 싸움은 시작됐다. 날카로운 송곳으로 서로의 가슴을 인정사정없이 후벼 파는 그 무시무시한 싸움 때문에 난 어머니를 만나기가 두려워졌고 자연스럽게 고향에도 잘 내려가지 않게 됐다.

대학시절 학교를 휴학하고 연락을 끊은 채 일 년 동안 거리를 떠돌고 난 후 다시 집으로 돌아왔을때 어머니는내손을잡고눈물을흘리며이렇게말씀하셨다.“ 내가너한테잘못한게많다. 미안하다.”정신이 번쩍 드는 순간이었다. 지금도 그 말 한 마디가 두고두고 잊혀지지 않는다. 그후로 내게도 어머니의 입장에서 그녀를 이해하려는 마음이 조금은 생긴 것 같다. 삼십대 중반쯤이었을까. 어느 날 문득 어머니와 전화통화를 하다가 내가 나이를 먹는 만큼 그녀도 늙어가고 있구나 하는 깨달음이 죽비처럼 머리를 내리쳤다. 서로가 서로의 존재를 갉아먹던 지독한 싸움이 자연스럽게 잦아들기 시작한 것은 그러한 깨달음이 온 다음부터였다. 어머니도, 나도 시간의 흐름을 거역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느덧 내 나이 마흔 초반, 어머니도 어느새 칠순을 넘기셨다. 그녀는 지금도 틈만 나면 이제 돈도 안 되는 글 그만 쓰고 어디 번듯한 직장에라도 취직을 하는 게 어떠냐고 그러신다. 여전히 자신의 아들이 경제적으로 조금은 편안하게 잘 살기를 바라시는 것이다. 예전처럼 의사다, 판사다, 대학교수다 하셨던 당신 자신의 바람이 투영된 직접적인 기대는 접으셨지만 그래도 아직까지 글 쓴다는 핑계로 결혼도 안 하고 혼자 궁싯거리며 사는 아들의 모습이 영 못 미더우신가 보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이번에 나온 첫 희곡집『봄날에 간다』에 실려 있는 세 편의 희곡은 모두‘집’과 관계가 있다.
그 모습은 다르지만 어쩌면 그간의 어머니와 나 사이에 있었던 애증의 세월과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건 아닐까. 그런 말이 있지 않은가, 이러니저러니 해도 가족은 마지막에 가면 결국 완전히 등 돌릴 수 없는 존재라는. 그런데 정말 난 어쩌다가 이런 글들을 쓰게 됐을까.

※ 희곡집『봄날은 간다』는 대산창작기금을 받아 출판사 이매진에서 출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