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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립문자를 찾아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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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레저아일랜드와 샌프란시스코가 보이는 마리나. 중국인들과 멕시칸들이 낙시를 많이 한다. | |
애드워드 경기장 출구 계단에 노숙인 한 사람이 앉아 책을 읽고 있다. 바로 옆에는 흰 수염 몇 개가 바늘처럼 튀어나온 래브라도 종에 정체모를 다른 종이 스쳐간 것 같은 늙은 검둥이가 엎드려 인기척에 눈동자만 돌리고 있다. 가까이 다가가보니 호흡이 제법 긴 책이었다.
책을 곁에 두는 일을 업으로 하는 사람도 작정을 하거나 마음이 안정되어 있지 않으면 보기 힘들 것 같다. 옆에서 그냥 지켜보기가 민망해져서 연구실 5층 화장실로 올라갔다. 창문을 통해 내려다보려고 하자 높아서 쉽지가 않았다. 내키지는 않지만(그간 몇 차례의 미국 방문에서 경험한 바로는 미국의 공공 시설물들은 한국의 것들에 비해 항상 부실하다고 여겨졌다. 화장실 또한 청결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변기통에 발을 디디고 창틀을 잡았다.
불안했지만 창틀을 꽉 움켜쥐고 창밖을 내려 본 순간 노숙인은 웃통을 벗고 옷에 붙은 뭔가를 털어내고 있었다. 참 멀쩡하게 생긴 노숙자였다. 늙은 개와 멀쩡하게 생긴 노숙자? 버클리에서 이틀째 되는 날의 일기다.
알바니 숙소에 짐을 풀어 놓은 지 5일째 되는 날은 주말이었다. 엘세리토 역까지 걸어가 바트라고 불리는 전철 비슷한 것을 타고 샌프란시스코 파월 역으로 갔다. 물위의 도시 불리는 샌프란시스코에 진출한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경찰차가 사이렌을 울리며 내가 있는 곳으로 들이닥쳤다. 어름 잡아 스무 대는 넘었다. 내 주변으로 몰려드는 경찰들, 공포였다.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기도 전에 들어가려던 버라이존 핸드폰 가게를 덮치더니 머리와 얼굴에서 피를 흘리는 흑인 남자를 팔 다리에 수갑을 채워 여섯 명이 들고 나왔다. 그 중에 한국계같이 보이는 여자 경찰관도 끼여있었다. 로밍 폰이 요금이 비싸서 현지 핸드폰을 구입할까하고 들렀던 샌프란시스코의 마켓 스트릿 버라이존 가게에서 벌어진 상황이었다.
상황이 종료될 즈음에 사람들이 내게로 다가왔다.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사실 나도 뭘 구체적으로 본 건 없었다. 그런데 상황 설명을 하라니 정말 난감했다. 이 멋쟁이들이 뭘 궁금해
하는지 알 것도 같았다. 미국 생활이라는 게 겉보기에도 심심해 보였다. 그 진지한 눈빛. 나는 그들의 요구대로 짧은 영어와 손발짓으로 벌어지지도 않은 총격전을 설명했다. 너무들 좋아했다.
나는 미국에 도착한 지 5일 만에, 그것도 샌프란시스코에서 제일 번화하다는 마켓 스트릿에서 언어 문제를 해결했다. 사람들은 내가 문장을 만들어 얘기하면 잘 못 알아들었고 핵심적인 단어를 몇 개 얘기했을 때 정확히 알아듣고 있었다. 언어 장애자에 대한 배려와 인내력이 돋보였다.
처음 버클리에 도착해서 눈에 띈 것은 노숙자들이었다. 홈리스라 불리는 그들에게는 숙소로 제공된 <피플파크>가 학교 땅(현재의 피플파크 부지에 학교 당국에서 학교 운동장을 지으려고 했을 때 학생과 지역 주민들이 반대하여 피플파크가 그대로 남게 되었다고 함) 안에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홈리스들이 많기도 했다. 그들은쇼핑카트에 옷가지며 이불이며 음식 등과 간편한 생활도구 등을 싣고 대부분 검둥개(개의 목욕과 관계가 있는듯함)를 대동하고 다녔다.
저녁이면 그들이 비틀거리며 모여드는 피플파크 길목에 위치한 프리 드럭 존(향정신 성약품자유지역)이 유난히 빛났다. 그곳에서 만난 한 학생은 이런 말을 했다. 저들 중에 등급이 높은 벤츠를 타고 오는 사람도 있다고 했다. 얘기인 즉 벤츠를 태워 데려다 놓고 얼마간의 기간이 지나면 다시 벤츠를 태워 데려간다는 얘기였다. 노숙이라는 의미가 새삼스럽게 느껴지는 대목이었다.
자식의 행려병을 고스란히 떠안고 살아가는 부모의 심정이랄까? 자식을 포기 하지 않는 것은 동서양 고금을 막론하는 것 같다. 그래도 나는 좋아한다. 텔레그래프의프리 드럭 존을. 약 2주 가량 프리 드럭 존을 줄기차게 들락거렸다. 한 점포만 남겨진 사회과학서점인 <모에스북>과 욕쟁이 티셔츠 집인 <티셔츠 올지>(이곳에서 김정일 티셔츠는 GET IL 이라고 쓰여 있었으며 클린턴 풍자 티셔츠보다 잘 팔렸다), 타투가게, 해질녘이면 길가의 모든 사람이 죄다 변종으로 보이는 이곳이야말로 내 일생의, 내 시의 큰 전환점이 만들어질 것 같은 착각이 일어났다. 버클리에 도착한 2주차가 지나갔다.
샌프란시스코, 버클리, 알바니, 리치몬드, 오클랜드,산호세 등을 이곳에서는 베이지역 이라고 했다. 4월 5일 샌프란시스코 공항에 도착한 이후 나는 오전은 연구소에서 오후에는 걷는 데 시간을 보냈다. 비록 7주 정도를 걷고 버스를 타기도 해서 다녔지만 학교 주변인 오클랜드, 리치몬드, 버클리 같은 곳을 이 잡듯이 휘잡고 다닐 수 있었다(도착하자마자 타깃에서 산 7달러짜리 운동화를 7주 만에 교체했다. 비록 허술한 신발이었지만 내가 미국 생활뿐만 아니라 세상 어디를 가더라도 어떻게 적응하면 가장 정직한 적응인지를 신발이 가르쳐줬다). 버클리 <케이닝숍>에 대한 얘기다.
버클리 프리 드럭 존만큼이나 내게 궁금증을 유발하는 곳이었다. 저녁 10시경 문을 여는 케이닝숍 앞은 연일 만원이었다. 길에 죽 늘어선 젊은 사람들을 볼 때마다 나는 흥분됐다. 꼭 호러 영화에 나오는 좀비들을 보는 듯했다. 버클리 선임자인 모 시인이 왕벚나무라고 얘기했지만 사실 체리나무들이다. 버클리 주변 가로수는 체리나무가 많다. 그 검붉은 나뭇잎 아래 길게 늘어선 좀비들. 그들은 말이 없었다. 그냥 묵묵히 줄지어 서서 순서만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메뉴에 나온 매질 품목이나 학대 품목도 미리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리고 품목에 따라 들어갈 요금도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오로지 묵묵히 순서만 기다릴 뿐이었다. 한 대 잘만 맞으면 느끼게 될 쾌감만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늦은 봄 날 밤 체리 나무 아래에서 매 맞는 순서를 기다리는 사람들. 그들을 헤집고 숙소로 가는 길에 내 입에서는 어김없이 <봄날은 간다>가 흘러 나왔다. 미국에서 밤늦게 얼큰한 술기운에 대고 불러대는 봄날은 간다가 왜 그렇게 아쉬운지 나는 알 고 있었다. 언젠가는 용기를 내어 저 좀비 대열에 끼어야겠다는 다짐 비슷한 노래였다는 것을. Q공, 그만 함께 있었어도 당장 점령했을 버클리 <케이닝숍>.
어느 구석이든 빈 벽을 허락하면 허한 마음을 들키기라도 하는 듯 허한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었다. 버클리와 오클랜드, 리치몬드의 슬럼가를 가면 벽이나 가로등, 길바닥이나 심지어 아이들 학교 운동장 바닥까지 낙서와 그림으로 채워져 있다. 누구나 어디서든지 낙서를 할 도구들이 산재해 있었다. 마치 짧은 역사 속에 내재해 있는 국가적 기억상실증들을 풀어내려는 것일까? 마치 나랏무당이 벌려놓은 큰 굿을 구경하는 느낌이 든다. 무거운 주제를 가벼운 낙서로 터치해낸다는 것이 무거움과 어두움을 내려놓는 일과 같다면 내 속에 땅거미처럼 얽히고설킨 낙서들은 무얼 풀기위한 것들일까?
이들의 낙서 행각은 빈 공간들을 넘어 몸에서도 이뤄지고 있었다. 몸이 화폭으로 변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 문신과 귀, 코,혀에 장식품을 매다는 일들이 미국인 20~30대 층에서는 30%
이상이라고 한다. 몇 해 전보다 10% 가까이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취향이라고 하기에는 그 증가 속도가 놀랍다는 것이다. 라스베이거스 하드록 호텔에 전시되어 있는 메탈리카 멤버들의 공연 장면을 연상시키는 이 기이한 현상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정말 가닥을 잡을 수 없었다.
‘세상 사람들에게 자기표현의 한 방식으로 몸과 빈 공간에 낙서와 문신을 새긴다’라고 정리하면 어떨까? 아닐 것이다. 그보다는 서로 다른 언어와 생각과 고독과 그리움을 지닌 이들이 세상의 공간과 마음의 공간인 몸에 말과 생각을 그려 넣는 것이라고 하고 싶다. 말로 세울 수 없는 그리움과 외로움과 고독감의 또 다른 표현들. 그들에겐 말로 표현 할 수 없는 것들을 문신이나 낙서로 표현해내고 있었다. 바로 그렇게 찾던 불립문자(不立文字)같았다.
미국의 지명이나 도로 명들을 살피다보면 어느 지역을 가든지 같은 이름들이 많다. 물론 우리의 경우도 그렇다. 중국의 지명과 같은 지명들. 지명을 새로 세우기에 부족한 것들은 분명히 있었겠지만 그래도 그런 지명들을 볼 때마다 불쾌했었다. 그런데 미국의 경우 그 정도가 더 심각했다. 물론 3백년도 안 된 역사라지만 해도 너무했다. 이 땅에도 분명 인디오의 역사가 있었을 진데,‘ 늑대와춤을’이나‘주먹쥐고물구나무서기’같이인디오들이 사용하던 이름들이 있었을 텐데, 지금은 없었다. 빼앗기에만 바빴을 뿐 이름 하나 제대로 못 짓고 자기가 온 땅이나 남이 지어놓은 이름들을 급조하기 바빴을 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통 가질 않았다.
걷기를 좋아한다고 말을 해놓았지만 빈 걸음 뒤에는 짜증이 난다. 내공이 부족해서다. 하지만 나는 보았다. 소 뒷걸음질에 쥐 잡는다고 잘못 들어간 길에서 미국 개가 쌀쌀 맞은 이유를 알았다. 리치몬드와 알바니 중간쯤 해안에 개 공원이 있다. 정말이지 그 규모를 생각하면 서울의 올림픽공원을 놓고 봐도 거의 손색이 없다. 물론 사람과 관계한 편의시설은 없고 개들과 관계된 시설만 있다. 지역 신문에서 그 공원 때문에 알바니로 이사를 했다는 인터뷰도 기사도 봤다. 나는 정말 의아해했다. 어찌된 영문인지 개들이 사람이나 다른 개, 심지어 고양이를 봐도 설치지 않았다. 처음 미국에 도착해서 나는“개도 쌀쌀맞은 나라”라고 혼잣말을 하곤 했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절제였다. 설치는가 싶으면 한적한 데로 데려가 울대를 움켜쥐거나 아니면 개를 지휘하는 지휘봉(확인한바는 없지만 혹자는 전기 고문을 하는 전자 봉 이라고 했다) 같은 것으로 사정없이 찔러댔다. 그러면서도 서로 핥고 어루만졌다. 서로간의 정을 지키기 위한, 함께 살기위한 철저한 교육이었다.
나는 또 같은 선상에서 다른 형태의 것들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어린이와 여자들의 낙원이라는 말에 대해서다. 과연 그럴까 하는 생각에 자료들을 뒤졌다. 과거 미국은 여성과 아동 학대가 많이 일어난 나라 중에 하나였다. 그렇기 때문에 법을 강력하게 세운 나라가 아닐까하는 결론이 내려졌다. 엄격하지 않으면 지켜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다민족들이 함께 살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을. 씁쓸했다. 한국의 법들이 좀 더 격을 갖추지 않았나 생각도 해봤다.
도보와 버스와 전철로 시작된 버클리 생활은 한 달을 넘기자 서서히 지루해지기 시작했다. 맘에 내키는 몇곳을 제외하곤 한국과 다를 것도 없다는 생각을 했다.
난장이밀과 야생 귀리가 익어가는 북가주 저녁 들판은 그야말로 황무지처럼 노랗고 황량했다.사람들은 건기라고 했다. 어린 시절 겪은 건기를 생각했다. 밀과 보리를 추수했던 5월 들판을, 잠깐 동안이지만 들판을 노랗게 물들였던 그때 나는 사춘기가 시작되었다. 그날 이후 나는 지금까지도 사춘기다. 버클리에서 겪는 사춘기 또한 그때와 비슷하다. 오후 4시가 되면 어김없이 불어 오는 서늘한 바람, 그 바람 앞에 서 있다가 종이꽃같이 말라버린 꽃과 잎들, 그리고 기억의 저편으로 실려 가는 내 모든 것들. 그러던 차에 오사마 빈 라덴이 죽었다는 소식이 들렸다. 구급약 상자엔 야생귀리(천연비아그라)가 가득 있었다는 소식과 오바마가 연임될 것이라는 소식이었다. 버락 오바마와 오사마 빈 라덴이 인쇄될 티셔츠에 어떤 문구와 어떤 풍자가 그려질지도 생각했다. 세상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들이 이곳 버클리에서는 단 하나의 방정식일망정 그냥 그대로 배설되지는 않았다. 어쩌면 우스갯소리로라도 소화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내게 큰 위안이 되었다. 그리고 아마존에서 체 게바라의 성장에 관계관 <모터사이클 다이어리>란 디브이디를 구입했다.
| ▲ 4월과 5월 버클리에는 야생귀리와 난장이 밀이 지천이다 | |
미국에 도착한 지 달포 만에 렌트를 했다. 먼저 온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보험료 포함 1개월에 1,500불 이상이 든다고 했다.
알샘(아론 로버트 밀러를 개인적으로 부른 이름, 매일같이 오전에 학교에 나가다 보니 학교에 나오는 사람들도 없고 알샘과 둘이 점심을 거의 함께 했다)에게 얘기했더니 학교에서 연결해주면 1천불이 안 들어도 해결될 것이라고 했다. 나는 무작정 차를 렌트부터 했다. 캘리포니아를 차로 뒤질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
우선 대중교통이나 도보로 다니기 힘들었던 곳을 다니기로 했다. 가장 먼저 오클랜드 잭 런던 스퀘어에 차를 세워 놓고 배를 탔다. 미국의 대중작가 잭 런던이 생활을 했던 잭 런던 스퀘어는
미국 내 범죄의 도시 1위라는 오명에도 불구하고 오클랜드에서는 보기 드물게 정리가 잘 되어 있었다. 배는 그렇게도 궁금했던 트래저아일랜드(보물섬)를 지나 알카트래즈까지 나를 데려다 줬다. 배위에서 보는 샌프란시스코는 그야말로 물의 도시 그대로였다. 알카트래즈가 눈에 들어온 순간 나는 내 불립문자를 만날수 있다는 생각에 흥분됐다. 과거 알 카포네가 수감생활을 하기 이전 아시아에서 노동자로 팔려온 사람들이 어느 지역으로 보낼지 분류하는 동안 가둬두었던 섬, 알카트래즈. 한국의 첫 이민자들과 아시아 이민자들의 두려움과 외로움이 한숨이 되어 어디쯤인가에 불립문자로 남아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결국 환상일 뿐이었다.
도보와 대중교통을 이용한 북가주 베이지역 탐방은 마무리되는 듯했다. 나는 이번 힘든 여행을 통해 시란 무엇인가에 대해 나름 정리할 수 있었다. 낙서와 문신 케이닝, 메마른 대지와 멈추지 않는 바람, 그 가운데를 거의 홈리스처럼 누비며 얻은 결과 물이었다. 시는 항상 덜 떨어진 것들이 우리를 우리이게 하는 것처럼 끝끝내 어리석기를 포기하지 않는 자리라는 것, 그래서 비천한 사람살이와 현실의 그것으로부터 천상의 그것까지 노래해야 한다는 것을. 이데올로기 체계나 현실의 체계 속에 들어가지 않고 그것들이 가두어도가두어도 남겨지는 뒷자리라는 것을. 결국 시는 존재와 정신이 언어를 뒤흔드는 일이 아니라 언어가 존재와 정신을 뒤흔드는 일이라는 것을, 버클리가 말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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