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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책과 화집과 헤르만 헤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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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림을 그리겠다고 마음먹은 때는 다른 사람에 비하면 좀 늦은 편이다. 물론 초등학교 시절부터 그림을 잘 그리는 것으로는 반에서 손꼽을 정도였지만, 완고한 집안 분위기 때문에 그림하고 인연 맺기는 거의 불가능한 형편이었다. 미술 과목을 제외한 여타 과목도 성적이 지지부진한 것이어서 도통 공부에 취미를 붙이지 못했으니 독서에는 영 관심이 없었다. 늘 공부 못하는 아이들이 바람직하지 못한 길로 빠져드는 여러 유형이 있었지만 다행이랄까 나는 학교 앞 개천변에 줄지어 늘어선 판자집 만화가게에 들락날락하게 되었고 어느새 상습적인 만화광이 되어버렸다.
그래도 그림 그리는 걸 밥 먹는 것 빼고는 제일 좋아했던 나로선 체계적인 미술 공부는 못해봤지만 만화에는 일가견이 있었다. 1960년 초로 기억되는데 김산호 선생의 공상과학만화 ‘녹의 여왕과 라이파이’는 실로 선풍적인 인기만화였다. 전쟁이 끝난지 얼마 되지 않은 때라 피폐해진 동심에 그만큼 꿈과 상상력을 불어넣어준 만화는 없었으리라 본다. 용돈을 한푼두푼 모아 만화책을 여러 권 수집하여 밤낮 가리지 않고 그려대기 시작했으니 당연히 만화가가 되어야겠다는 꿈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중학교 시절 선망의 대상이었던 미술반 아이들이 미술실에서 미술 선생님의 지도 아래 석고와 정물을 늘어놓고 수채화며 데생을 그리는 것을 등 너머로 보고 있노라면 한없이 부러웠지만 대신 펜과 잉크로 그려내는 만화의 상상세계도 짜릿한 흥분을 느낄 수 있는 것이었다. 만화에 대한 나의 집착은 가히 병적으로 발전하여 정작 고교 입시에 필요한 공부를 등한시하다 결국 지방의 농업고등학교로 진학하게 되었는데 물론 이렇게 전락(?)하게 된 것은 공부 안하는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고육지책이었다.
그러나 시골로 유배(?) 떠난 것이 전화위복이랄까? 그 시절부터 집안의 감시망이 소홀해진 틈을 타 미술반에 들게 되었고 마음먹은 대로 산으로 들로 풍경스케치를 하며 자연을 벗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림에 빠져드는 나의 생활은 하숙집 아줌마의 밀고로 끝내 들통이 나고 그제서야 아버지는 한숨어린 심사숙고 끝에 그림 그릴 것을 허락하고 서울예술고등학교로 전학시켜 주셨다.
그 무렵 유럽의 여러 나라를 여행하고 돌아오신 아버지는 내게 빛깔도 휘황찬란한 화집 ‘모딜리아니’와 ‘피카소’를 선물로 주셨다. 나는 너무 좋아서 품에 안고 잠이 들 정도였다. 아직도 잊지 못하는 ‘큰 모자를 쓴 여인 Femme au Grand Chapeau’(모딜리아니, 1918년작)의 빨려들 것만 같은 푸른 눈과 ‘인생 La Vie’(피카소, 1903년작)의 전면에 흐르는 슬픈 청보라색은 아마도 그 무엇보다도 나의 화업에 큰 영향을 주었으리라 본다.
대학 입시는 눈앞에 둔 고3 어느 날, 같은 반 여학생이 읽어보라고 던져준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은 입시 준비에 여념이 없던 나에게는 고갈되어 밑바닥을 드러낸 마음에 단비와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그때까지도 독서 취향이 전혀 없던 나에게 『데미안』은 독서의 물꼬를 터준 계기가 되었다. 너무 오래 전에 읽은 터라 소설 내용이 정확하게 기억나는 것은 아니지만 주인공 싱클레어가 성장해가면서 데미안을 통해 알에서 깨어나오듯이 인생의 참의미를 터득해간다는 내용이 감동을 주었다.
내가 화가가 되기까지는 몇 번이고 다른 길로 갈 뻔한 적이 있었다. 어찌 보면 인생 자체가 험난하고 아찔한 순간들로 이어지는 곡예사의 줄타기와 같은 것이 아닐까 본다. 그때마다 나에게 나의 길로 가도록 붙잡아준 것은 주변 사람들의 정성어린 충고도 있었겠지만 무엇보다도 작은 책 몇 권이 아니었을까?
초등학교 시절 상상력을 확대하여 꿈을 키워준 만화책 ‘녹의 여왕과 라이파이’, 그리고 신비로운 삶의 의미와 색과 형태를 일깨워준 화집 ‘모딜리아니’와 ‘피카소’, 삶의 깊이를 미리 짐작하게 해준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과 같은 책들이 고비마다 알 껍질을 깨뜨려 보다 참된 인생으로 이끌어준 길라잡이가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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