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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내 순결의 영웅

  아버지를 추억한다는 것은 나에게는 불모의 명민함, 소진되어 버린 천재성, 세상을 뚫어내지 못한 순결함 등에 대해 생각한다는 뜻이다. 그분은 어떤 분이었을까. 아버지를 깊이 사랑했고 존경했으면서도, 나는 그분에 관해 많은 것을 알지 못한다. 아버지의 근원은 언제나 나에게 닫혀 있는 문이었다. 아버지는 당신의 과거에 관해 많은 이야기를 해주지 않으셨다. 어린 딸을 붙잡고, 숱한 이야기를 해주신 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떠나온 북쪽 고향에 대해서는 많은 이야기를 하지 않으셨다. 마치, 그 이야기를 떠올리는 것 자체가 당신의 상실되어 버린 젊음에 대한 모욕이기라도 한 것처럼, 아버지는 그 추억을 완강하게 당신의 가슴 속에 자물쇠로 채워두고 있는 것 같았었다. 이따금 친척들에게서 주워듣는 이야기를 통해서 아버지의 젊음은 나에게 파편처럼 남아있다. 신동이라는 이야기를 들으며 성장했다는 것, 할아버지는 큰 재산가였으며, 기독교를 일찍이 받아들인 기독교 제1세대라는 것, 아버지는 이른 나이에 일본 유학을 다녀오신 후에는 큰 사업체를 경영하셨다는 것, 수학에 특히 뛰어난 능력을 지니고 계셨다는 것 등. 말하자면, 아버지의 기원은 맨손으로 출발해야 했던 남한에서의 삶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우월한 어떤 것이었다는 것. 그것이 전부였다.

  그 기원은 내 앞에 완강히 문을 걸어 잠그고 있었다. 아버지의 책상 서랍 하나는 늘 잠겨 있었다. 그러나 나는 아버지가 그 안에 넣어둔 것을 이따금 몰래 꺼내보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느 날이었던가. 아버지가 그 서랍을 잠그는 것을 잊어버리신 날, 나는 그 서랍 속에 들어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고등학교 다닐 때였던 것 같다. 북한의 토지 대장들, 신의주에 있었다는 아버지의 아름다운 집 앞에서 찍은 사진들, 일본 유학 시절의 젊은 아버지의 사진, 우리 어머니와 두 번째로 결혼하시기 전의, 피난길에 폭격으로 돌아가셨다는 아버지의 첫 번째 아내의 사진, 돌아가실 때까지 그토록 잊지 못해 하셨던 납북된 큰 아들의 흔적들. 그이가 일본 유학 시절에 일본 제국주의 통치를 비판했다가 수배당하는 처지가 되어 도망다니면서 아버지에게 보냈던 절절한 편지들, 우아하고 아름다운 필체, 그 아들이 해방 후에 집필하고 있었던 독일어사전 초고(그 깨알 같은 꼼꼼한 글씨, 아마도 완성할 수 있었더라면 한국 최초의 독일어 사전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가슴이 두방망이질을 하며 뛰었다. 지금도 그 초록색 철제 책상이 기억난다. 서랍 안에 들어있는 우아한 물건들과 전혀 어울리지 않던, 매우 기능적인 싸구려 철제 책상. 열 때마다 삐걱삐걱 소리를 내던, 서랍 양쪽에 거무스름한 고무 바킹이 끼워져 있던, 이사다닐 때 여기 저기 긁힌 자국이 보기 싫게 나있던…… 나는 마치 도둑질을 하는 것 같은 기분으로 그 물건들을 훔쳐보았다. 미지의 그 무엇, 내가 초대받지 못한 어떤 안온한 평정, 자기 확신에 가득찬 우아함. 나는 그 물건들이 경이로웠다. 아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단순히 경이롭다는 느낌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어떤 무참함 같은 것이 있었다. 그 순간, 나는 아버지에 대해서 어떤 계급적 위화감 같은 것을 느꼈던 것 같다. 물론, 당시의 내가 그것을 그런 용어로 정리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것은 나의 생 자체가 절반은 유령이라는 것을 이해한 순간이었을 것이다. 나의 아버지인데도, 나는 그와 같은 계급에 속해 있지 않은 것이다. 나의 기원인데도, 나는 그 기원을 내 것이라고 주장할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절반은 유령으로 태어난 것이다.

  나는 아버지에게 서랍 속의 물건에 대해 묻지 않았다. 당신이 침묵하시면, 그 침묵을 존중해 드려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어쩌면, 그보다 더 근원적인 원인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떤, 어린 내가 마주설 수 없는, 운명 또는 역사가 무겁게 짓누르는 모든 생의 디테일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 불가능성, 생 자체의 압도적 부조리. 감당하는 수밖에 없는.

  단정하고 우아한 얼굴. 키는 크지 않으셨지만, 아름다운 분이었다. 목소리가 특히 아름다웠다. 창창 소리가 나는 음성. 깊은 자기 확신을 가진 자가 영혼에서 자기다움을 끌어올리는 깊은 울림을 가진 음성. 아버지가 장로로 오래 봉사하셨던 교회 강단에서 검은 예복을 입고 기도를 하실 때면, 나는 눈을 몰래 뜨고 아버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 모습은 오래도록 나에게 가장 아름다운 남성의 이미지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당신의 타고난 명민함을 세계에 등록시키지 못하셨다. 어떻게 생각하면, 애초부터 그런 일에 관심이 없는 분이셨던 것 같기도 하다. 그냥 태어난 그대로 살다 가신 분. 당신 자신 안에 통합된 채로 아무런 욕망도 가지고 있지 않으셨던 분. 남편은 아버지를 만나뵙고 나서, 조금 흥분한 어조로 그렇게 말했다. “내가 만나본 사람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라고. 진흙바닥에 집어넣고 뒹굴려도 진흙 한 방울 묻지 않을 것 같은 사람. 남편은 “난 너보다 네 아버지를 보고 너에게 장가가는 것”이라고 덧붙여 말했다. 아버지에게는 감동적인 순결함 같은 것이 있었다.

  천재들이 가지는 어떤 근원적인 현실부적응증 같은 것이 아버지에게 있었다. 옷차림, 격식, 그런 것에 아버지는 아무 관심도 없으셨다. 아름다운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음치셨는데, 모여 앉아 찬송을 부를 때면, 우리는 아버지의 노랫소리 때문에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느라고 무진 애를 써야 했다. 그러나 당신은 결코 작은 소리로 노래를 부르는 법이 없으셨다. 언제나 씩씩한 음치음정으로, 어떤 노래를 불러도 똑같은 곡조와 가락으로, 남들이 뭐라 하든 아랑곳하지 않고,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셨다. 어디 잔칫집에라도 갈 양이면,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이쁜 옷을 입히기 위해 실랑이를 해야 했다. 도무지 옷차림에 아무 관심도 없으신 것이다. 내 결혼식 날은 한겨울이어서 무척 추웠다. 결혼식이 열리는 교회로 떠나기 전에 나는 어머니가 오늘은 늘 신고 다니시는 털신(고무신 안에 털을 댄 신발. 군고구마 장수가 신을 법한)을 벗고 꼭 구두를 신으셔야 한다고 신신당부하시는 것을 들었다. 아버지 손을 잡고 식장으로 들어가던 나는 아버지가 기어이 털신을 신고 오신 것을 보았다. 아, 아버지, 웃음이 쿡 솟았다. 결혼식 사진에는 웃음을 참지 못하는 내 표정이 그대로 찍혀 있다. 주무실 때면, 동네가 떠나가도록 드르렁드르렁 코를 고셨다. 그렇게 코를 고시다가 당신이 코고는 소리에 놀라서 깨어나고는 하셨다. 그럴 때, 어리둥절한 아버지의 모습이 기억난다. 낮잠의 나른함에서 갑자기 쫓겨난 듯한 표정을 짓고 있던, 내가 왜 여기 있지, 하는 표정을 짓고 있던 늙은 아기.

  나는 오랫동안 아버지를 여의지 못했다. 돌아가신 다음에도 오래도록 아버지를 보내드리지 못했었다. 딸의 영혼 깊은 곳에 순결의 원형으로 자리잡은 분. 어느 해였던가. 아버지가 꿈속에 나타나셨다. 잠옷을 입은 모습이셨다. 아버지가 왼쪽에 있는 문을 밀면서 말씀하셨다. “정란아, 나 이제 간다.” 그리고 꿈의 오른쪽 하늘에서 투명한 베일이 너울거리면서 내려왔다. 꿈속의 나는 그 베일 안에 ‘잘린 머리’가 들어있다, 고 막연히 느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처참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무언가, 한 사이클이 끝났다, 는 느낌이 조용히 스며들어왔을 뿐이다. 꿈에서 깨어난 나는, 내가 이제 아버지를 여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잘린 머리는 아마도 내 안의 어떤 결단이었을 것이라고 해석했다. 아버지가 실내복을 입고 계시다가 밖으로 나가셨던 것도, 이제 내가 세상으로 나가서 사람들을 만나야 한다는 메시지라고 이해했다. 이제 아버지의 딸이 아니라, 세계의 딸로 살아야 한다. 존재의 안쪽에만 머물러 계셨던 아버지의 불모의 명민함을 뛰어넘어 세계를 만나야 한다.

  중풍에 걸려 평소의 아름다운 모습을 몽땅 잃어버리셨던 아버지는 숨을 거두시고 난 뒤, 기적처럼 아름다워지셨다. 내 둘째 아들 재석이가 “울 할아부지 이렇게 이쁜 줄 알았으면 자주 안아드리는 건데”라고 말하며 울었다. 죽음이 사람을 아름답게 만들기도 한다는 것을 우리 가족은 아버지를 보며 깨달았다.

  생은 아버지에게 무엇이었을까. 나는 알지 못한다. 다만 그이의 딸이었다는 것, 그것이 늙어가는 내 영혼의 내벽에 새삼스러운 의문부호를 갈고리처럼 건다는 것을 날카롭게 느낄 뿐이다. 아기 같았던 아버지의 생을 뛰어넘어야 할까? 그러나 꼭 그래야 할 이유가 있는 걸까? 무엇을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