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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 낙동강 앞바다 풍경

  답답하고 우울한 일상에서 헤어나지 못할 때, 무작정 동해바다로 달려가 바닷바람을 쐬고 나면 체증이 내려간 듯 홀가분해진다. 어깨를 짓누르는 짐을 바다에다 부려놓고 돌아온들 세상이 바뀌어있지는 않다. 설령 그렇더라도 몸과 마음은 가볍다. 바다는 그렇게 넉넉한 품을 지녔다.

  옛날에도 바다는 똑같은 자세로 사람을 기다렸다. 그러나 사람들은 바다보다는 산을, 아니면 강을 찾았다. 감동어린 여행이나 탐방의 장소로 바다가 등장하는 일도 많지 않았고, 그만큼 바다가 아름다운 풍경으로 등장하는 산수유기가 적다.

  그래서인지 먼 바다는 아니지만 갯벌을 헤치고 근해 연안을 배를 타고 한 때의 즐거운 여행을 기록한 유기가 시선을 끈다. 이학규(李學逵, 1770～1834)가 쓴 산문 「남포를 노닐다 遊南浦記」와 시 「남포에서 南浦」 네 편이다. 남포는 낙동강 하구를 가리키는 말로 낙동강이 남해 바다와 접하는 일대를 배를 타고 노닌 체험을 묘사했다.

  글쓴이 이학규는 자(字)가 성수(醒叟), 호는 낙하생(洛下生)이다. 유복자로 태어나 외가에서 성장한 그는 당대를 대표하는 문인인 외조부 이용휴(李用休)와 외숙 이가환(李家煥)의 훈도를 받았다. 전형적 서울내기로 뛰어난 시인이요 산문가다. 정조 사후 신유박해가 일어났을 때 경상도 김해에 유배되어 무려 24년 동안이나 억류생활을 했다. 온갖 불행을 혼자서 겪은 불운하기 짝이 없는 문인으로, 송곳 하나 세울 땅조차 없는 극빈 상태 속에서 고독과 고통이 묻어나는 시문을 남겼다. 그의 불행은 김해로서는 다행이었다. 바닷가 고을인 김해 지역의 풍토를 묘사한 빼어난 작품이 그의 손에서 나왔으니 말이다.

  그나마 그의 절망을 달래준 것은 술과 시였다. 낙동강 하구를 찾은 것도 실의를 달래기 위한 나들이였다. 유배온 지 3년 되던 1813년 늦가을, 이학규는 낙동강이 바다에 몸을 푸는 남포(南浦)를 노닐었다. 동행은 모두 넷, 낚시꾼과 사냥꾼도 섞여 있었다. 목적은 밤바다 낚시를 해서 회를 치고 술을 마시면서 늦가을 갈대로 뒤덮인 밤바다의 정취를 만끽하자는 것이었다. 김해 사람들이 즐기는, 늦가을 초겨울의 정취가 듬뿍 담긴 풍속이었다. 그 무렵은 낙동강 하구는 온통 갈대로 뒤덮인 세상이었다. 그는 이런 시를 읊었다.

갈대발에 갈대 자리, 갈대 울타리의 집

그 문 앞에는 또 갈대가 어지럽게 가로막았네.

너무도 아름다워라! 갯벌에는 가을도 저물어

어부집 지붕은 온통 갈대꽃 들러붙었네.

荻簾荻簟荻籬笆兼有門前亂荻遮

最好江倉秋日暮釣家黏得滿頭花

               - 「금관기속시 金官紀俗詩」

지금도 철새도래지요 갈대밭으로 유명한 김해인데 당시는 더욱 멋진 풍경을 선사하였을 것임을 예상할 수 있다.

  출발 시간은 저녁밥을 먹은 뒤였다. 막걸리 두 말을 지고 갈대 모자, 갈대 짚신을 신고 성문을 나서 배를 타고 비린내가 자욱한 갈대밭을 통해 바다로 나갔다. 낙동강 하구의 갈대밭으로 유명한 을숙도가 있는 곳이다. 이 장면을 그는 이렇게 묘사했다.

  해서문(海西門)을 통해 곧장 남으로 4～5리를 걸어 하씨(河氏)의 포구에 도착하였다. 하씨는 낚시질을 하는 사람인데 김표와 잘 아는 사이다. 거룻배 한 척을 빌려서 탔다. 여기서부터는 물길로 가는데 포구와 물길이 갈리는 곳이 너무 많고, 주변은 몽땅 개펄이요 갈대가 자란다. 배는 갈대밭을 뚫고 지나가는데 물은 전체가 더럽고 탁하여 비린내가 자욱하다. 갈대의 하얀 꽃과 누런 잎이 서걱서걱 옷과 삿갓에 스쳐 바스락거리며 은은하게 헛기침을 하며 누구냐고 묻는 소리를 낸다.

  낚시꾼이 앉는 자리는 포구 구부러진 곳인데 그곳에서 친구를 기다리고 있다. 물새가 사람의 기침소리를 듣고서 모조리 조금 앞에서 끼룩끼룩 떼 지어 일어난다. 하류에서 배가 나타나 화급하게 외친다.

  “상앗대 멈춰! 배가 부딪힌다!”

  누구냐고 물으니 같은 마을 사람으로 녹산도(菉山島)에 가서 소금을 사오는데 성은 심(沈)씨요 그도 김표와 잘 아는 사이란다. 관솔불을 주니 불빛을 여러 점 끌면서 떠나갔다.

  어둠이 깔리는 포구를 배를 타고 갈대밭을 뚫고 가는 모습, 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난 배와 부딪힐 듯 스치는 장면, 물새가 떼 지어 일어나는 장면, 관솔불을 켜고 미끄러지듯 사라지는 배의 모습이 영화의 인상적인 장면처럼 아름답다. 청각, 후각, 시각의 감관이 모두 동원되어 개펄의 갈대숲을 느끼는 듯하다. 하얀 갈대꽃과 누런 잎이 서걱대는 소리를 헛기침을 하며 누구냐고 묻는 소리라고 묘사한 비유가 특히 아름답다.

  곧 이어 낙동강 하구가 바다와 만나서 만들어내는 넓은 바다 위로 달이 뜨는 장면의 묘사가 이어진다. 글을 읽기만 해도 환상적인 장면이 떠오른다. 포구의 경치는 가을이 가장 좋고, 가을의 경치는 밤이 좋고 새벽이 좋으며, 또 밤에는 달이 뜰 때가, 새벽에는 안개가 낄 때가 가장 좋다고 했다. 김해 사람들이 최고의 풍경으로 여기는 포구의 늦가을, 밤, 달이 뜨는 장면을 감동적으로 묘사했다. 글은 이렇게 계속된다.

  얼마 있다가 달이 뜨고 서풍이 크게 일어났다. 배안의 사람들이 모두 몸을 웅크리고 있는 사이 순식간에 포구에 도착했다. 하늘과 물이 크게 환해져 깜짝 놀라 눈을 휘둥그레 떴다. 가까운 곳은 솟구치는 황금이요 번쩍이는 거울인데, 먼 곳은 옥으로 만든 밭, 은빛 바다다. 종합해 말하자면, 달이 물을 만나면 더욱 맑아지고, 물이 바람을 만나면 더욱 일렁거린다. 배를 함께 탄 사람 중에는 어부들이 있는데 이런 광경은 자주 보지 못한다고 입을 모았다. 대체로 포구의 경치는 가을이 가장 좋고, 가을의 경치는 밤이 좋고 새벽이 좋다. 밤에는 달이 뜰 때가, 새벽에는 안개가 낄 때가 가장 좋다. 다만 큰 안개가 낄 때 나가서는 안 된다.

  물새가 떼를 지어 밤새도록 울어대는데, 소리가 높고 시원한 새가 고니다. 멀리서 들어야 어울리는 그 소리는 횡취곡(橫吹曲)에 뒤지지 않는다. 포구에서 나는 물고기로 갈색에 입이 큰 것이 있는데, 상강(霜降)이 지난 후 밤에 잡는 것이 어울린다. 잘 잡는 사람은 하룻밤에도 수백 마리를 잡는다. 나와 김표 둘은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 전날 밤 하씨에게 물고기 한 바구니를 사서 밑판에 놓아두었는데 가져다 회를 쳐서 술안주를 했다.

  김해부에서 오리 정도 떨어진 이 바다는 바닷물과 안개가 끊없이 펼쳐지고 갈대밭이 시야에 가득한 곳이다. 게다가 가을과 겨울이 교차하는 시기의 밤이면 물새떼가 밤새도록 울어대는 독특한 풍경의 장소다. 바다 위로 달이 뜨는 황홀한 배 안에서 물새 떼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낚시를 하다가 회를 쳐서 막걸리를 마신다. 한 번도 그런 체험을 하지 못한 처지지만 생각만 해도 호쾌한 기분이 든다. 「남포에서」 네 편 가운데 다음 시 역시 이러한 멋을 묘사했다.

바다 세계는 강 세계와 이어지고

어부 집은 바로 술집이라네.

개펄 헤치며 도요새를 쏘아 잡고

바닷물 내려 보며 고니새 울음을 듣는다.

가을철 풍광은 개여뀌풀에 선연하고

거센 바람에 갈대풀이 쓰러졌네.

방산(舫山) 바닷가에 가지를 못해

지금도 여전히 아쉬움 남네.

海國連江國漁家卽酒家

衝泥彈鷸鷸臨水聽鴉鴨

秋色葒蘢得風威葭菼斜

于今有遺恨未到舫山涯

이날 밤 이학규는 밤바다의 풍경을 감상하며 술을 마시다 취기가 올랐을 때 그야말로 문인다운 상상의 세계를 펼친다. 이어진 글을 보자.

  술을 마시며 김표에게 말했다.

  “여기는 물이 아주 광활하게 펼쳐져있는데 가장 깊은 곳이라야 한두 길을 넘지 않네. 물속에 돌을 쌓아 두 길 남짓 높이로 네모난 기단을 만들고, 그 위에 기단의 반 높이로 주춧돌을 세우네. 그 위에 누각을 세우고 가로세로 각각 네 개의 기둥을 세운다. 사방에는 갈고리와 난간을 설치하고, 가운데에는 곡방(曲房)을 만들어 별모양의 창을 다네. 모두 운모(雲母)를 붙이고 담황색 비단 주렴을 걸어놓는데 주름 무늬 비단처럼 아주 곱다네. 방안에는 법서(法書) 명화(名畵) 다기(茶器) 술잔 거문고 바둑 은낭(隱囊) 및 낡은 솥 골동품같은 물건을 소장하고, 여종 둘과 서동(書童) 둘을 데리고 지낸다네. 모두 귀엽고 나이 어린 아이들로 시를 지을 줄 알고 노래를 잘 부르지. 누각 아래에는 작은 배 두 척을 매어 두고 하인 둘에게 관리를 맡겨, 하나는 저자에 오가며 술과 안주를 사오게 하고, 다른 하나는 연안을 두루 다니며 날마다 낚시질을 하여 조석을 제공하게 하네. 이렇게 산다면 나는 만족일세.”

  김표가 벌떡 일어나 말했다.

  “누각은 무어라 이름할까요?”

  “수심루(水心樓)라고 하면 괜찮겠지?”

  “비용은 얼마면 되겠습니까?”

  “십만 냥이 아니면 안 될 걸세.”

  배에 탔던 사람들이 모두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드넓게 얕은 물이 펼쳐진 연안 바닷가에 돌을 쌓아 수심루(水心樓)라는 화려한 누각을 세우고 갖가지 고아한 멋을 즐길 도구를 갖추고서 운치있게 살고 싶다는 소망을 피력한다. 술기운에 자신이 술값도 제대로 마련하지 못하는 가난한 유배자라는 것도 잊고서 말이다. 하지만 저같은 아름다운 풍경에서 술을 마시며 저같은 상상조차 하지 못한다면 정말 몰취미한 사람일 것이다. 그가 십만 냥이라는 거금을 들여 만들고 싶어한 수심루를 지금이라도 만들어 본다면 역시 멋진 풍경을 제공할 것만 같다. 호쾌한 상상도 멋질 뿐만 아니라, 해학으로 끝을 맺는 장면도 멋들어지다. 밤바다에 뜬 달을 보고 술을 들면서 그는 잠시나마 세상이 버린 자신의 비운을 잊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을숙도 갈대밭을 구경한 적은 있지만 이학규가 묘사했던 풍경을 경험하지는 못했다. 아마 그가 묘사한 풍경은 숱한 변화 뒤라서 그대로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갈대 모자에 갈대 짚신을 신고 막걸리 두 말을 배에 싣고 갈대밭을 헤쳐 밤바다를 노니는 것을 어떻게 다시 경험하랴? 하지만 그래도 이번 늦가을에는 시간을 마련하여 한번 그곳의 밤바다 풍경을 꼭 구경해야겠다고 다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