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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남북공동선언에서 분단체제 극복의 가능성을 읽다”- 백낙청 선생과의 가상대담

  장마가 끝나고 휴가철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8월 초에 나는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백낙청 선생 댁을 찾았다. 방배중학교에서 2차선 도로를 따라 방배로 방향으로 가다 보면 길 양옆으로 고급 빌라와 주택들이 떼지어 들어서 있다. 백 선생 댁은 이 고급 주택들의 틈새에서 관악산을 바라보고 있다. 지은 지 20년쯤 되는데 겉모습이 병풍을 접어놓은 듯해서 동네에서 병풍집이라고들 부른다. 징검돌을 밟고 정원 잔디를 지나서 집안으로 들어간다.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 첸: 바쁘신데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지난 1년 사이에 북한을 여러번 다녀오셨지요?

  - 청: 그래, 자네도 잘 지냈나? 북한은 지난 연말에 만해문학상 시상식 때문에 갔고, 6․15 행사 준비차 한 번 잠시 들렀고, 또 6․15 때와 이번 남북민족작가대회 때도 갔으니까 일 년도 안되는 사이에 네 번을 들른 셈이네. 작년 연말에는 조촐해서 좋았는데 올해는 공식 행사인데다가 사람들도 많고 책임을 맡아서인지 잔뜩 긴장해 있었다네. 그나저나, 자네가 날 보자고 보낸 메일에서 체첸이라는 이름을 써서 처음엔 누가 장난하는가 싶었네.

  - 첸: 아아, 그거요. 얼마 전에 책을 읽다가 체첸이란 명칭이 몽골어 ‘현명하다(賢)’에서 파생되었다는 걸 알게 되었습죠. 저도 최근 몇 달 사이에 이름을 여러 개 갈아쓰느라 바빴지요. 제 생각엔 이름도 일회용으로 쓰면 좋을 거 같습니다. 밤에 잠 안오곤 하면 편의점에 가서 하나씩 사서 쓰다가 버리게요. 그러면 명성에 집착해서 생기는 일도 없어져서 좋을 거 같구요. 체첸도 길어서 걍, 첸이라고 쓰고 있지요.

  - 청: 자넨 여전하구먼.

  - 첸: 6․15 때는 결국 정동영 장관이 언론발을 세우긴 했지만 아는 사람들은 다 그게 민간 쪽 ‘은덕’을 입어 얻은 성과라고들 하지요. 백 선생과 함께 다녀온 분들이 다들 놀랐다고 그러더군요. 선생님이 그렇게 대중 연설을 잘 하시는 줄 예전엔 미처 몰랐다는 겁니다.

  백 선생은 소년다운 데가 있다. 속된 ‘끼’가 없다는 의미다. 오랜만에 만나서 처음엔 서로 상당히 긴장하고 있었는데, 백 선생은 이 대목에서 모처럼 칭찬받은 소년처럼 환하게 웃는다. 하지만 영리하게도 곧바로 정색을 하곤 단서를 단다.

  - 청: 내가 작년에 모 일간지 시평에도 썼듯이 그건 본디 6․15 남북공동선언의 ‘은덕’이라고 해야겠지.

  - 첸: 그렇지만 이번 6․15 때 민간 쪽에서의 활동이야말로 그동안 정부 쪽의 남북관계에서 꽉 막혀 있던 하수구를 펑 하고 뚫는 성과를 거두었다고 생각합니다만.

  - 청: 그야 그렇지. 자네도 아다시피 내가 분단체제론을 제출한지 이제 10년이 넘었네. 내 분단체제론이 흔히 말하는 평론가적 입장에 국한된 게 아니라 이렇게 실천적이라는 걸 보여준 게 요즘 내 보람이라면 보람일세.

  하지만 나는 아직 분단체제‘론’에 동의할 수 없다. 한편으로 그건 너무 상식적인 얘기를 늘어놓은 것인 반면에 다른 한쪽으로는 알맹이에 비해 과도하게 이론적으로 포장해왔단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분단체제론이 기대고 있는 월러스틴의 세계체제론에도 별로 정이 가지 않는다. 엔리크 두셀이나 안드레 군더 프랑크의 그것과 비교해 본다면, 월러스틴 이론은 서구 중심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다만, 나는 실천적 성과라는 점에서 백 선생 편을 들 따름이다. 반북 우익 진영이 지난 겨울과 봄에 퍼뜨렸던 ‘6월 위기설’을 감안하는 한에서, 나는 백 선생의 최근 활동을 인정하는 것이다.

  - 첸: 김정일에 대한 선생님의 호의적인 평가에 상응하는 게 박정희 재평가일텐데요, 저로서는 둘 다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최근에 이에 대한 공식적인 비판도 나온 거로 알고 있는데요.

  - 청: 박정희 재평가 문제는 『녹색평론』에 실린 강국주 씨 글을 얘기하는 걸 텐데, 현실적인 맥락에서 봐야 할 것이네. 자네도 한때 유물론자를 자처한 바 있으니 실질적인 효과를 두고 이론적 논쟁을 평가해야 할 게 아닌가.

  - 첸: 그렇지만 이 논쟁의 초점은 철학적인 거 아닙니까?

  - 청: 그야 그렇지. 근대화의 문제, 그리고 이와 연관해서 발전의 한계에 관한 거지.

  - 첸: 강국주 씨 비판의 초점은 발전에 관한 선생님 생각에 큰 문제가 있다는 거 아닙니까?

  - 청: 박정희 식의 ‘지속불가능한 발전’에 대해 나는 대안으로 ‘지속가능한 발전’을 내세우고 있네. 다만 그런 전제 위에서 박정희를 일정하게 평가해 줄 수도 있다는 거지. 본디 박정희의 한계라는 것은 분명히 인식하면서 말이지.

  - 첸: 강국주 씨 문제 제기는 더 근본적인 거라고 이해합니다. 상식적으로 볼 때, ‘지속가능한 발전’이라는 슬로건이 결국에는 상당한 수준에서 발전을 완료해 낸 유럽 등의 선진국에서 만들어 낸 것 아닙니까. 환경이라든가 생태적인 문제를 극히 조금 의식하면서요. 이건 브라질이나 러시아, 혹은 인도나 중국 등과 같은 개발도상국 혹은 제3세계 및 제4세계 나라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게지요. 게다가 미국은 교토의정서조차도 승인하고 있지 않은데요.

  - 청: 사상적인 문제로 가서 서로의 바탕을 건드리면 논의의 접점이 없을 테고, 단지 ‘지속 불가능한 발전의 유공자’로서 박정희를 제한되나마 인정하는 게 남북문제나 소위 남남문제를 풀어가는 데 현실적으로 효과적일 걸세.

  여기서 나는 백 선생 민족문학론의 태생적 한계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이건 백 선생이 속한 세대 자체의 역사적 한계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식민지, 분단, 전쟁을 몸으로 겪은 이 세대는 결국 근대 민족국가의 발전 패러다임에 갇혀서, 그런 한에서만 분단체제의 극복이라든가 민주화라든가 근대화라는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이다. 나로서는 『녹색평론』의 심오한 생태적 근본주의도 너무 버겁고 힘들지만 백 선생 식으로 근대 민족주의에 갇혀 있는 발전관과 문학관에도 찬성할 수 없다. 전자는 너무 종교적이고 후자는 결국 절충적으로 되어 버린다. 하이데거를 거론하면서 ‘근원적 진리’에 집착하고 있는 데서도 알 수 있듯이, 백 선생은 결국 여러 모로 타협할 수밖에 없는 실용주의자인 것이다. 여기서, 지난 번 남북민족작가대회 보도 사진이 문득 떠오른다. 식장 단상의 정면 위에는 김일성과 김정일의 사진이 나란히 높게 걸려 있었는데 남한에서 간 작가들은 어떤 심정으로 그 사진들을 보았을까? 나는 박정희나 김일성 어느 쪽에 대해서든 비판적이다. 굳이 선택하라고 한다면, 차라리 최인훈이나 송두율 쪽이다. 하지만 밖으로는 절대 나가지 않는다. 철저히 국내로의 자발적 망명을 선호하는 쪽이다. 여기서 싸우고 버티면서 살아가야 한다. 이런 점에서 내게 백 선생은 구루(guru)가 될 수 없다.



  - 첸: 문학 쪽으로 얘길 돌려보지요. 평소에 제가 아주 궁금해 하던 건데요.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지요. 선생님께서는 이은성의 『동의보감』이나 신경숙의 작품들이 선생님의 민족문학론과 어떤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 청: 민족문학의 범위를 너무 당위적으로 좁게 잡고 있는 거 아닌가, 자네는? 이은성과 신경숙이 뭐가 문제가 되는 건지 모르겠네, 나는.

  - 첸: 그 작품들의 대중성이나 문학성에 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요, 선생님의 민족문학론, 그러니까 굳이 이름 붙인다면, ‘백낙청류’ 민족문학론이 주장해 온 바에 과연 합당한 작품들이냐는 거지요.

  - 청: 이은성 소설의 출간은 내가 출판사 식구들이랑 같이 논의해서 결정한 거고, 신경숙에 관해서는 이미 평론을 썼네. 자네도 한때는 비평가였으니까 읽어보고 판단하면 될 게 아닌가.

  백 선생은 논쟁을 즐긴다. 신경숙론은 궁색하고 지리멸렬한 쪽이라고 나는 기억하고 있다. 신경숙 작품에 관해서 말을 많이 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 글은 본디 신경숙론이 아니다. 창비가 신경숙을 팔아먹은 것에 대한 비평적 자기변명에 불과했다고 기억한다. 물론, 백선생도 어느 좌담에선가 말했듯이 기억이란 매우 엉터리라서 믿을 게 못될뿐더러, 전직 비평가의 입장에서는 현직 비평가와 논쟁하지 않는 게 여러모로 신상에 이롭다.

  - 첸: 강준만, 권성우, 이명원 등의 비판에 대해서 창비 쪽에서 묵살하는 식으로 대응한 것도 납득할 수 없습니다. 저로서는 창비 진영에서 권성우나 이명원과 같은 친구들에게 기회를 많이 주는 게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창비가 돈을 벌었다고 한다면, 젊은 친구들에게 “너희들 창비에서 계간지나 하나 해 봐라. 거기서 나를 씹든 김윤식을 조지든 김현을 까든 간에 너희들 맘대로 해 봐라” 뭐, 그렇게 해볼 아량이나 배짱은 없는 겁니까? 계간지가 돈이 많이 들면 반연간지나 무크지를 해보라고 하던가요.

  - 청: 나는 그런 주장에 동의하지 않네. 어떻게 창비나 나를 문학권력이니 상업주의니 하면서 비난할 수 있는가. 창비와 나는 문학을 통해서 권력과 싸워 왔네. 그리고 삼십 년 가까이 고생하다가 겨우 90년대 들어서 창비도 점차 안정이 되고 돈도 좀 벌게 되었네. 권력이라고 오해할 만한 힘이 생긴 건 사실이네만, 그걸 사악하게 쓰진 않았네. 내가 언젠가 “시백편 사무사”라는 공자님 말씀을 인용한 적도 있는데, 바로 그런 사무사의 심정과 자세로 창비와 나는 일해 왔네.

  - 첸: ???

  - 청: 어느 집단이나 조직이든 덩치가 커지면 잡음이 생기기 마련이네.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 원하는 걸 내가 줄 수는 없지 않은가. 창비로 말하자면 책 팔아 번 돈을 딴 데 쓴 게 아니네. 만해문학상, 신동엽문학상 등 갖가지 제도를 만들어서 문인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도록 해 왔네. 창비나 민족문학론은 큰 강이나 마찬가지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네. 그것은 이제 한두 사람의 소유도 아닐뿐더러, 큰 강이 흐르다보면 거기서 물을 길러 먹는 사람도 있고 생활 폐수를 흘러보내는 사람도 있는 거 아니겠는가. 창비에 대해 비판하는 사람들은 역사적 과정과 전체 정황을 놓치고 있는 거라네. 비판을 하더라도 전체적으로 균형을 잡고 해야만 지성적인 태도가 아니겠는가? 고난 속에서 애써 어렵게 거둔 성과를 먼저 인정할 줄도 알아야지.

  - 첸: 그런 식의 논리라면, 백 선생님이야말로 김병걸, 구중서, 임헌영 선생 등의 민중문학론, 민족문학론의 초기 성과를 인정하는 데 아주 인색했다는 비판을 엄중하게 새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단지 창비라는 매체를 갖고 있었다는 유리함 때문에 백 선생님이 소위 민족문학 진영의 이론적 선두에 서게 되었다는 지적인 게지요. 또 상대적으로 어려운 시절에 창비를 맡아 고생했던 염무웅 선생이 백 선생님을 의식해서 비평적 사선(射線)에서 줄곧 뒤로 물러서 있게 된 측면도 있는 거구요. 저는 이런 비판과 지적에 동의하는 쪽입니다. 그건, 그렇다 치구요, 또 궁금한 게 있는데요. 이윤기 선생의 그리스 신화 작업에 대해서 영문학자인 이재호 교수가 비판한 거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영문학자로서 견해가 있으실 거 아닙니까.

  - 청: 영문학자로서 내가 가장 안타깝게 생각하는 건 로렌스에 관한 책을 쓰겠다고 말해놓고 전혀 손을 못대고 있는 걸세. 설준규 교수와 김명환 교수와의 대담에서도 말했듯이, 나는 리비스가 20세기 영문학의 가장 위대한 전업비평가이고 소설가 로렌스는 20세기 영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평론가이기도 하다고 생각하네. 하지만 어디 시간이 나야 말이지. 재작년에 학교 선생 일을 그만 두었지만, 2000년부터 시민방송 일을 맡은 데다가 작년부터는 6․15 관련 일의 책임을 지게 되어서 전혀 시간을 내지 못하고 있다네.

  - 첸: 제가 여쭈었던 건 로렌스가 아니라 이윤기 선생의 작업을 둘러싼 논쟁에 관한 건데요? 저야 이윤기 선생 편이지만요. 이윤기 선생도 백 선생님과 똑같은 케이스로 뽑혀서 유학을 갈 뻔했지만 결국 집안 문제로 연좌제 때문에 미국에 갈 수 없었다고 알고 있는데요.

  - 청: ……

  백 선생은 뼈대 있는 가문 출신이다. 종조부는 정주 오산학교의 초대 교장을 지냈다고 한다. 큰아버지 백인제는 경성제대 출신으로 일제 강점기 때 유명한 외과 개업의였고 국회의원을 지낸 적이 있다. 아버지 백붕제는 교토제대 법학부 출신으로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해서 1940년대에 군수를 지냈다. 백 선생과 나이차가 제법 나는 형님인 백낙환 선생은 큰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인제병원을 맡아서 오늘날처럼 크게 키웠을 뿐더러 인제대학을 설립해서 이사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백붕제 변호사는 해방 후 ‘수선사’라는 출판사를 만들어 백철, 양주동, 고정옥 등의 책을 간행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출판사의 설립과 경영은 유전적인 측면이 있다는 얘기다. 백 선생은 부친을 기념하는 출판 관련 재단을 만들기도 했다. 백 선생의 아버님과 큰아버님은 6․25 때 납북되었는데, 백 선생이 유달리 민족문제에 관심을 갖는 것에는 이러한 개인사적 아픔도 상당히 작용했을 것이다.

  백낙환 이사장의 막내 아들 백도형 군은 내 대학원 동학이자 후배이기도 해서 안국동의 안동교회에서 결혼을 할 때 가 보았다. 유길준의 동생인 유성준 등이 중심이 되어 만든 안동교회는 윤보선 일가를 포함한 기호(畿湖)계 개신교인들이 꾸려온 교회다. 장로와 교인들의 기가 세서 목사를 몇 번씩 갈아치운 역사를 자랑한다. 하지만 백 선생은 개신교보다는 원불교를 심정적으로 더 선호하는 듯하다. 원불교 쪽에서 백 선생은 원불교여성회장인 한지성 선생의 부군으로 통한다. 백 선생이 1998년에 문화훈장을 받았다는 소식도 이번에 인터넷 검색을 하다가 원불교 쪽 사이트를 통해서 알게 되었다. 백 선생이 원불교 종법사인 송정산의 건국론에 관해 글을 쓴 거나 원불교의 ‘정전’과 ‘대종경’을 합본한 ‘원불교 영문교전’ 번역에 손을 댄 것도 다 이와 관련이 있는가 보다. 집에서는 사모님 파워가 더 센 걸 거라고 나는 짐작한다.

  - 청: 내가 서울대에서 해직된 해가 1974년이고 7․4 남북공동선언은 그 두해 전인 1972년에 나왔지. 그리고 2000년에 6․15 선언이라는 역사적 사건이 탄생했다네. 6․25에서 6․15까지 50년이 걸린 셈이지. 내가 1938년생이니까 굳이 따진다면 4․19 세대인 셈이지만 내게 정신적으로 큰 영향을 끼친 것은 7․4 남북공동선언이라네. 분단체제를 허물 수 있다는 현실적 가능성을 읽게 된 셈이지. 그로부터 무려 30여년이 지나서 6․15가 나온 것이고. 자네도 알겠지만 내가 최초로 쓴 비평적 출사표인 ‘시민문학론’은 여러 가지로 허점이 많은 글이네. 다만 한반도의 분단체제가 격변을 겪으면서 요동을 쳐 온 만큼 나 자신도 정신적으로나 실천적으로 성장해 온 셈이라고 할 수 있네. 내 민족문학론이나 분단체제론도 그런 맥락에서 접근하면 자네와는 상당히 다른 시각에서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네.

  - 첸: 몇몇 작가들이 노벨 문학상을 타려고 나라 안팎에서 애쓰고 돌아다니는 것에 대해서 얼마 전에 김정환 시인이 술자리에서 호되게 비판하는 것을 들었는데 그 얘기를 듣고 나서 꽤나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유치한 작태에 대해서 ‘백낙청류’ 민족문학론이 수수방관하고 있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노벨상에 연연하는 것이야말로 전형적인 식민지 노예근성이라고 할 수 있지요. 선생님이 강조해 오신 영문학이나 세계문학을 주체적으로 읽어내는 작업과 모순되는 일이 아닐까요.

  - 청: 그 양반들 모두 이미 대가 반열에 올라서 나로서도 어쩔 수 없다네. 우리가 노벨상을 타서 굳이 나쁠 건 또 뭔가.

  - 첸: !$@dl#%ぢㅠhrk#&?^8^./

  어느새 땡볕이 한풀 꺾였다. 거실의 대형 유리창을 통해 들어온 석양볕이 한결 수그러들었고 그림자가 길어졌다. 니스칠한 거실 바닥에서 반사되는 산란광도 처음처럼 눈을 따갑게 하지는 않는다. 에어컨 바람이 다소 춥게 느껴진다. 하지만 유리창 아래쪽에 쭉 늘어선 난초들은 이제 그만 돌아가 주었으면 하는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다.

  - 첸: 선생님, 이만 일어나야겠습니다.

  - 청: 그래, 앞으론 자주 얼굴 좀 보자고. 파주라서 좀 멀기는 하지만 창비 사무실에도 가끔 들리고. 고세현 사장이나 김이구 군 만난 지도 꽤 되었잖는가.

  - 첸: 예에……

  - 청: 그럼, 멀리 못나가네. 잘 가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