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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사건의 기억을 되살리는 작가- 『화산도』의 소설가 김석범

지난 4월 6일, 작가 김석범(金石範, 1925～ )은 ｢언어, 민족 그리고 세계문학｣이라는 제목으로 동국대에서 초청 강연을 했다. 젊은 신세대 대학생들로 가득 찬 강연장에서 그는 여든이라는 나이가 무색할 정도의 힘 있는 목소리로 두어 시간이 족히 넘게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작가는 지금까지 줄곧 남쪽도 북쪽도 아닌 ‘조선’이라는 국적을 유지해오고 있다. 이 때문에 그의 모국 방문 절차는 늘 순조롭지 못했고 때로는 작가 스스로 포기하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김대중 전 대통령의 취임 이후 달라진 시대적 정황과 더불어 그의 방문은 비교적 원활해졌다.

제주도. 김석범에게 제주도는 그의 고향이자 조선 그 자체이며, 지리적 공간으로서의 실체를 초월한 이데아적 존재이기도 하다. 사실 그의 출생지는 일본 오사카(大阪)이며, 제주도는 부모의 고향이다. 작가가 처음 제주도 땅을 밟은 것은 그의 나이 열세 살 때였고, 반 년 정도의 체재를 통해 ‘황국(皇國)’ 소년이었던 그의 내부세계는 어린 민족주의자로 변모되었다. 그리고 작가가 제주도를 쓰는 가장 큰 이유는, 자신 역시 피로 얼룩진 고향섬의 눈물도 메말라버린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라는 데에 있다.

재일 작가로서 김석범은 무엇보다 그가 제주도 4․3 사건을 문학적 모티프로 삼아 정력적으로 창작 활동을 지속해왔다는 점에서 매우 독특하다. 그의 대표작이자 출세작인 ｢까마귀의 죽음 鴉の死｣은 1957년에 발표되었고, 이 작품의 연장선상에서 대장편 『화산도 火山島』를 집필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까마귀의 죽음｣에서 주인공 정기준(丁基俊)은 제주 미군정청 통역인인 동시에, 빨치산 간부의 비밀활동을 돕는 스파이로 설정되어 있다. 이러한 기준의 임무는 마을사람들의 적대적인 시선을 감당해내야 할 뿐만 아니라, 애인과 그 가족의 총살 앞에서도 무력할 수밖에 없는 고독감을 수반한다. ｢까마귀의 죽음｣은 주로 기준의 내면묘사에 치중하여, 스파이라는 이중적 생활에서 오는 정신적 고뇌와 인간적 갈등이 자기성찰적인 관점에서 긴장을 유지하면서도 안정감있게 전개된 작품이다.

하지만 작가는 직접 4․3 사건을 체험한 게 아니다. 김석범은 ‘문학적 상상력’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한다. 그는 일본으로 밀항해온 제주도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해 듣고, 소설이라는 허구의 틀을 빌려 상상력으로써 재생해냈다. 재일 작가들의 작품에서 흔히 발견되는 일본의 사소설(私小說)적인 경향을 고려할 때, 이는 김석범 문학이 지닌 개성이라 말할 수 있다.

아울러 김석범은 여느 재일 작가보다도 특히 언어(일본어)에 유달리 신중하고 민감한 자세를 보인다. 재일조선인이 식민지 지배자의 언어로 문학을 한다는 것, 이를 생각하면 견디기 어려운 일이라고 그는 고백한다. 말은 살아 있는 생명체다. 말에는 고유의 전통적 의미와 정서, 역사가 담겨 있다. 일본어 자체에 내재된 기능(메커니즘)이 작가를 구속하게 된다. 이것을 김석범은 ‘말(言語)의 주박(呪縛)’이라 부른다. 그 ‘주박’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해 그는 ‘일본말의 민족적 형식을 먹어서 위장에서 녹인다’고 했다. ‘왜 일본어로 쓰는가’라는 문제에 대해, 작가는 이미 다음과 같은 분명한 견해를 피력한 바 있다. “내가 일본어로 조선적인 것을 표현할 수 없다면, 나는 일본어로 쓰는 것을 그만 둘 작정입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일본어로 쓰는 일을 나는 심정적으로 허락할 수 없습니다.” 일본어로 쓰되 조선인의 일본어로 쓰는 것, 이 명제는 바로 김석범 문학을 떠받치는 주춧돌이 되는 셈이다.

“자주 다니지 못하는 고향 땅이지만 제주도에 가면 제주국제공항 활주로 밑, 서귀포 정방폭포 밑 깊은 물 속, 여기저기에 아직도 떠도는 원혼(寃魂)의 환청(幻聽)에 마음이 괴로웠다. 하지만 ‘까마귀의 죽음’ 이래 ‘화산도’에 이르기까지 반세기 동안 4․3을 문학적 테마로 다뤄온 나는 지금, 망각이 기억으로 재생하는 아주 극적인 시대의 흐름을 눈부시게 바라본다.”(동아일보 2003년 4월 12일자)

원고지 총 2만2천 장. 20여 년이라는 긴 세월에 걸쳐 완결된 작가의 노작 『화산도』는 1997년 전(全) 7권으로 일본(문예춘추사)에서 출간되어, ‘마이니치(每日)예술상’을 수상했다. 소설의 전반부가 80년대 후반에 우리말로 번역된 적이 있긴 하나, 그의 작품이 보다 온전한 상태로 국내 독자들을 만나게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