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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시의 러시아 나들이- 러시아어譯 『한국현대 대표시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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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에는 러시아 여행이 대수로운 일이 아니지만, 1990년 한-러 수교 전만 해도 땅을 밟아보기가 여의치 않은 나라였다. 한국 노어노문학계의 태두로 필자의 스승이기도 한 작고하신 동완 교수님께서는 70년대 후반, 당시로서는 아주 예외적인 모스크바 방문 중에 들고 온 보드카 한 병을 비우지 않고 오래 동안 애지중지 하셨으며, 투르게네프,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 솔제니친 등의 번역으로 우리에게 친숙한 고 김학수 교수님 같은 분은 살아생전 러시아를 한 번도 가보지 못하고 언젠가 한번 동경에서 유럽으로 향하는 길에 모스크바 세레메치에보 공항에서 잠시 기착하는 동안 비행기 창을 통해 본 러시아의 모습을 소중한 추억으로 간직하셨던 기억이 난다.
이제는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방문이 가능한 러시아에 가면 우리나라 기업의 화려한 광고가 곳곳에서 눈에 들어오고, 꽤 외진 곳을 가도 남한에서 왔다는 말에 고개를 갸우뚱하는 러시아 사람들도 드물어졌다. 국내에서도 어렵잖게 러시아 인의 얼굴을 볼 수 있고, 듣기로는 두 나라 국민이 국제결혼한 사례도 상당수에 이른다고 한다. 그 멀던 러시아가 최근 10여년 남짓 기간에 가까운 이웃이 되었다는 얘기다. 그런데 정작 문화, 특히 문학 분야의 교류는 여전히 지나치게 일방적인 것이 현실이다. 한국에 관심이 있는 러시아 식자 계층 사람들로부터 가장 자주 받는 질문 중 하나는 한국에도 중국이나 일본처럼 독자적인 문학이 있느냐는 물음이다. 쉽게 접할 수 있는 우리 문학 번역 작품이 전무하다시피 하기 때문이다.
라리사 피사레바 교수와 필자가 함께 번역하여 2004년 모스크바 세계문학연구소 출판부에서 출간한 『한국현대 대표시선 Sovremennaia Korejskaia Poeziia』은 러시아 독자들의 한국 문학에 대한, 특히 그 중에서도 시에 대한 갈증을 조금이라도 해소하려는 노력의 결과이다. 1950년대를 기점으로 당시 소련의 대표적 한국학자들에 의해 우리 고대 소설과 시의 번역이 이루어지기는 했지만, 이들의 번역은 일반 독서 대중을 대상으로 하기보다는 전문가를 위한 학술서적 번역의 성격이 강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나마 일부 러시아 독자들에게 한국 시에 대한 이미지가 각인될 수 있었던 것은, 저명한 러시아 시인 안나 아흐마토바가 1956년에 번역한 『한국 고전시 Korejskaia klassicheskaia poeziia』(1956)처럼 예술 텍스트로의 번역 작업 덕택이었다. 러시아 번역 전통에서 특이한 점은, 번역가를 작가와 동일시하는 경향이 뚜렷하다는 데 있다. 소설을 번역하려면 소설가가 되어야 하고, 시는 시인만 번역 할 수 있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있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문학 번역을 업으로 하는 사람은 명함에 “작가”라고 표기하기를 좋아한다. 우수한 외국어 능력을 갖추는 것이 바람직하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도 전문가의 초역을 바탕으로 하여 안나 아흐마토바와 같이 기념비적 번역을 창조한 작가들이 러시아에는 상당수 있다.
최근 우리 문학의 러시아어 번역이 활기를 띠고 있기는 하지만, 시 장르에서는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나온 『정현종 시집』과 2003년 모스크바에서 출간된 김소월의 『진달래 꽃』이 전부여서, 우리 현대시의 특징적 흐름을 보여주는 러시아어 번역시 선집의 발간은 반드시 필요한 일 이라는 것이 한국외대 러시아어과에서 강의하던 피사레바 교수와 필자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50년대와 60년대에 활동하던 총 30여 시인의 목록을 정한 다음, 각 시인의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을 중심으로 번역이 수월해 보이는 90여 편의 시를 선정하여 번역 대상으로 삼았다. 초기에 필자의 초역 결과물을 놓고 피사레바 선생과 의견을 교환하는 과정에서 드러난 문제는 하나 둘이 아니었다. 토속적 색채가 강한 시를 풀어서 어렵사리 설명은 해 놓았는데 그것을 시 형식에 담으려니 앞길이 막막했고, 러시아어로 시적 분위기를 강조하다 보면 원전의 의미가 위축되거나 훼손되는 경우가 허다했기 때문이다. 여러 차례 중도 포기를 고려하기도 하고, 또 계획된 시간을 훨씬 넘기면서나마 이 번역 시집을 내놓을 수 있었던 것은, 예술 텍스트로 다듬는 일을 맡은 피사레바 선생의 한국 시를 음미하는 솜씨가 작업진행 동안 몰라보게 성장했기 때문이었다. 시를 번역하면서 한국인의 삶과 문화에 흠뻑 빠져든 고리키 문학창작대학 시 번역 학과 출신 라리사 피사레바는 본격적인 한국 시 공부를 결심하고 금년에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대학원에 입학했다.
최종 마무리 단계에서 현지 출판사 편집인한테 괜찮은 번역이라는 평을 듣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지만, 시인을 각별히 존경하고 평소에도 좋은 시들을 즐겨 암송하는 러시아 독자들에게 우리의 현대시가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내심 조마조마하다. 우리 현대 시인들의 이번의 첫 러시아 나들이가, 지금까지 러시아 문학으로부터 큼직한 선물들을 받아온 우리가 고마운 마음으로 전하는 정성어린 선물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 『한국현대 대표시선』은 재단의 해외 한국문학 연구지원을 받아 2004년 모스크바 세계문학연구소에서 출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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