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재단 - 21세기 문학의 창 -

웹진 대산문화

아들에게 편지를 쓰는 아버지의 다정함으로- 스테판 말라르메 『시집』

번역서 리뷰  상당히 오래 전에 나는 앙세르메가 쓴 글들을 우리말로 옮긴 적이 있다. 드뷔시와 라벨 해석에 있어 정평이 나 있던 이 스위스의 지휘자는 가장 프랑스적인 작곡가들의 음악을 설명하기 위해 줄곧 말라르메를 인용하고 있었다. 누구에게나 영롱하다는 느낌을 주어 해설이 필요 없을 것 같은 이 인상주의 음악을 설명하기 위해 난삽한 전문용어는 물론이고, 말라르메 같이 난해하기 짝이 없는 시인의 작품을 동원하는 그의 글을 따라가는 것은 내겐 힘이 부치는 일이었다.

  물론 음악의 문외한이 다만 어느 정도 프랑스어를 읽어낼 수 있다는 이유로 그 책의 번역을 맡았던 것이니, 그것은 당연한 일이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고백하건대, 정작 나를 곤혹스럽게 만든 것은 말라르메의 시 구절들을 우리말로 옮기는 일이었다. 앙세르메는 프랑스의 독자들도 그의 작품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한다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낯선 것처럼 보이는 이 시인의 언어 역시 분명 엄격한 논리를 가진 프랑스어임을 강조하고 있었다. 그의 논지는 인상주의 음악 나름의 어법을 이해한다면 그 엄정한 조성체계 위에서 빛을 발하는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와 같은 부끄러운 경험을 잊기 위해서일까, 나는 꽤나 오랫동안 말라르메의 작품집을 열어볼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어쩌면 나의 프랑스어 해독 능력이 언젠가 말라르메를 읽어낼 수준에 이를 때를 기다린다는 핑계를 마련하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렇지만 그 핑계는 이런 의문들을 담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과연음악을 공부하고 나면 앙세르메의 설명을 이해할 수 있고, 그러면 드뷔시와 라벨을 좀더 높은 수준에서 이해할 수 있을까? 아니 음악은 연주라는 해석 행위를 통해서만 그 온전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것은 모든 예술 작품에 공통된 현상이 아닌가?

  이런 의문은 아마도 시의 번역은 애초에 불가능한 것이리라는 나의 선입견에서 출발했을 것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산문은 의미 전달을 위해 언어의 투명성을 미덕으로 삼는데 비해, 시는 형식미와 음악성이라는 외적 표지를 통해 이와 길항하는 내적 의미를 담아내야 하는 언어의 불투명성 자체를 본질로 한다. 특히 말라르메와 함께 정점에 이른 현대시는 언어 그 자체를 시적 대상으로 삼는 메타 언어인 까닭에 이를 다른 언어 체계로 옮기려는 누구라도 번역은 반역이라는 자조적 반어법으로 자신을 정당화할 수밖에 없다.

  반역임을 알면서도 번역을 해야 한다면 그것은 객관적 정확성이 아니라 주관적 유효성, 다시 말해 해석을 지향할 수밖에 없다. 각각의 연주가 다르고, 각각의 해석이 다를 수밖에 없음을 인정할 때만 객관이 성립될 것이기 때문이다. 어차피 체계가 다른 언어로 옮겨질 때, 원작의 예술성을 담는 그릇인 언어의 불투명성의 훼손은 불가피하다. 다만 다 드러낼 수는 없다 해도 원작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게 하는 역문만이 유효한 것임은 부언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번역본의 가치는 두드러진다. 정확한 번역이라는 유혹 혹은 원문의 불투명성을 간직해보려는 욕심 때문에 자칫 소통 불가능이라는 함정에 빠질 위험이 상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라르메의 시적 언어를 소통 가능한 언어로 옮기려는 노력을 잊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접근이 쉽지 않은 이 시인을 이해시키기 위해 전문 용어로 구축된 난해한 논리를 동원하는 학자가 아니라, 아들에게 편지를 쓰는 다정한 아버지의 모습으로 해설을 시도하고 있는 역자의 태도로 상징되고 있다. 시를 읽을 수 있는 여유와는 무관한 상황을 경험하고 돌아와 이제 평범한 생활에 다시 적응하려는 아들에게 고도의 철학적 반성이 담긴 비범한 언어의 비밀을 풀어내려는 아버지의 해설은 그렇다고 단순한 에세이에 머물고 있지 않다. 또 나름대로의 선택에 의해 가장 적확한 역문을 구성하려는 노력을 기울이면서 역자는 그 선택이 놓칠 수밖에 없는 원문의 모습을 이제까지의 말라르메 연구 성과를 망라한 자세한 주석으로 보완하고 있다. 사소한 해석의 차이는 있을 수밖에 없다. 한 세기에 걸친 말라르메 연구의 역사가 이를 웅변하고 있다. 지금 이 대목에서 중요한 것은 소통 불가능이리라 짐작했던 언어를 우리말로 옮길 수 있는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번역 리뷰를 맡은 사람이 번역본 자체에 대한 소개 대신 다른 이야기를 더 길게 한 것은 한편으로는 그것이 번역본에 담겨 있는 역자의 노력에 걸맞지 않은 객설이 될까 하는 우려 때문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 리뷰를 읽는 사람들이 직접 그 번역본을 찾아 읽을 것을 바라기 때문이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이 번역본에 포함되어 있는 말라르메의 원문을 직접 읽어보기를 권유하기 위함이다.

※ 『시집』은 황현산 고려대 불문과 교수의 번역으로 재단의 외국문학 번역지원을 받아 문학과지성사에서 대산세계문학총서로 출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