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청춘의 끝자락 『내 아내의 모든 것』 |
| |
2004년 2월 말, 귀국은 나름대로 의미심장한 구석이 있었다. 그것은 이십대, 곧 청춘의 종말이었고, 신인작가라는 표찰과의 작별이었으며, 11년간 꿰차고 있던 학생증의 폐기였다. 이 모든 것을 아쉬워하느라 한 해가 저물고 새해가 밝았을 때, 유학시절의 기억덩어리와도 같은 『내 아내의 모든 것』이 책의 모양새를 하고 나타났다. 나의 오랜 꿈이 새록새록 환기되었다 ― ‘글쟁이’.
2000년 가을, 박사과정의 마지막 학기, 8년째 기숙사와 학교를 오르락내리락 하는 생활의 반복이었다. 『미성년』 이후 소설은 단 한 줄도 씌어지지 않았고, 수업과 잡무로 하루하루가 지나갔다. 유일한 낙은 장학금 시험 합격과 더불어 시작된 유학 날짜 세기였다. 그러던 중 온 몸이 피진(皮疹)으로 물들어버렸다. 피진은 상당히 오래 계속되었고, 그만큼이나 오랫동안 힘겹게 ｢피진의 가을｣이 씌어졌다.
2001년 2월,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짐을 푼 곳은 기숙사의 많은 방 중에서도 하필이면 쓰레기 통로 바로 앞에 있던, 게다가 룸메이트가 둘이나 되던 802호였다. 4월경, 타자기 수준의 중고 컴퓨터 한 대를 헐값에 구입하자, 몇 년 전부터 생각해온 ‘실종’에 대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초고가 완성되기가 무섭게 고물 컴퓨터가 망가지는 덕분에 소설 파일이 완전히 사라졌다. 하지만, 도스토예프스키의 『악령』 초판본을 교정하던 그 해 여름 그것은 ｢내 아내의 모든 것｣이라는 이름으로 소생했다.
가을 학기가 시작될 무렵, 605호로 이사했다. 룸메이트라면 고양이 한 마리만으로 충분했건만, 어김없이 새 룸메이트가 들어왔다. 베트남에서 막 날아온 활기찬 소녀였다. 이와는 무관하게 지도교수를 통해 수취인이 사라진 바르셀로나에서 온 엽서 한 장을 갖게 되었다. 역시, 이와는 무관하게 내년 여름이면 논문자격시험을 다 치르고 도스토예프스키가 머물렀던 유럽의 여러 도시들, 특히 드레스덴에 꼭 가보리라고 단단히 벼렸다. 영원히 못 보고 만 드레스덴 대신 ｢드레스덴에서 온 엽서｣가 씌어졌다.
2002년 여름, 막 스무 살이 된 룸메이트가 결혼을 함으로써 605호는 내 차지가 되었다. 러시아 여인의 찰나적 아름다움에 비유되곤 하는 황금 같은 여름, 이어 푸슈킨이 ‘음울한 시절이여’라고 찬미한 가을을 도서관과 기숙사를 오가며 대략 청승맞게 보냈다. 그 덕택에 그 해 겨울에는 박사논문의 초고를 잡게 되었다. 이와 나란히, 단조로운 삶의 예기치 못한 균열과 같았던 연애의 추억에서 ｢나의 가자미 색시｣가, 내 방의 애물단지였던 고양이와의 추억에서 ｢허를 죽이다｣가 씌어졌다.
2003년 3월초, 찬바람이 쌩쌩 불던 날, 새로 지은 기숙사 건물로 거처를 옮겼다. 월세는 삼십만 원도 안 됐지만, 평수와 시설은 우리나라의 웬만한 아파트에 맞먹었다. 가난을 훈장처럼 달고 사는 내게는 참으로 분에 맞지 않는 부르주아적인 생활이었다. 이곳에서 논문이 퇴고를 거듭하고 외로움과 향수 속에서 ｢눈꽃놀이｣가 나왔다.
러시아에서의 마지막 여름이 시작되면서, 페테르부르크 열병이 도져버렸다. 모스크바의 기숙사에서 끝나버린 이 우스꽝스러운 페테르부르크 여행에, 1999년 여름 페테르부르크로 어학연수를 다녀온 이후에 쓴 ｢내 몸 속의 곰팡이｣, ｢두 횡사｣, ｢절망｣이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이들보다 좀더 일찍 씌어졌던 ｢결코 주체가 드러나지 않으려는 시편｣도 거의 다시 씌어지다시피 다듬어졌다.
장편소설은 기어코 완성하지 못했지만, 내적인 짜임새를 갖춘 소설집을 만들고 싶은 소망에서 전체적인 틀에 대한 고민이 시작되었다. 작품들을 사계절 형식의 네 장으로 나누고 각각의 소설들(특히 ｢내 아내의 모든 것｣과 ｢피진(皮疹)의 가을｣)을 배치하는 일은 오랜 숙고의 결과였다. 작가후기도 이 무렵 마찬가지의 형식에 따라 씌어졌다.
내 책이 “미약한 시작”과 “심히 창대한 끝”의 중간 지점 어딘가에 위치해 있으리라고 자축하는 순간은, 늘 그렇듯, 짧지만 짜릿하다.
※ 『내 아내의 모든 것』은 재단의 대산창작기금을 받아 올 2월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되었다.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