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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의 현실 저편에는 아름다운 유년의 기억이 - 1985년의 화제작 『나의 라임오렌지나무』

  ‘이십 년 전쯤에 맨 처음 손을 잡던 날……’로 시작되는 노래를 잘 부르던 선배가 있었다. 떠오르는 몇 얼굴 중에서 정확하게 누구였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다만 한 사람이 시작한 그 노래가 ‘그때 그 음악 소리 아직도 생생한데……’ 부분에 이를 때쯤이면, 같이 있던 선배들 모두 한껏 소리를 돋우어 합창하던 장면만이 눈에 선하다. 나는 그 때 시를 쓰고 싶다는 바람 하나만으로 서울대 국문과에 들어온 대학 2학년의 풋내기였고, 그들은 내가 속한 창작 동아리의 선배들이었다. 노래를 들으며 감정의 불합리성에 대하여 생각했던 것 같다. 기껏해야 이십대 중반의 나이에 ‘이십년 전쯤에’라는 노랫말은 어울리지 않았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배들의 노랫소리에는 억눌린 슬픔이랄까, 우울이랄까 그런 감정이 짙게 묻어있었다. 길고 긴 암울했던 시간들. 1985년, 지금으로부터 이십 년 전의 일이다.

  아마도 그 언저리에 있었을 몇 가지 기억들이 파편적으로 떠오른다. 박노해의 『노동의 새벽』, ‘오월 서점’, 전방 입소 거부, 김세진과 이재호의 분신, 미문화원 점거 농성, 박혜정 선배의 죽음……. 기억들은 실타래 얽히듯 얽혀 있다. 『노동의 새벽』이 출간된 것은 1984년이고, 전방 입소 거부와 김세진 이재호 열사의 분신, 그리고 혜정 언니의 죽음은 1986년의 일이다. 각각의 기억들이 제자리를 찾지 못하는 것은, 그 몇 년 동안의 시간이 반복적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교정에는 늘 최루탄 가스가 자욱했고, 시위가 없는 날은 거의 없었다. 특히 오월이 되면 캠퍼스 곳곳에는 광주의 원혼들을 위로하는 검은 천들이 둘렸다. 대학의 낭만이나 청춘이라는 말은 거리가 멀었고, 지나갔거나 다가올 모든 날들은 고통스러웠다.

  그 해 3월, 소련에서는 고르바초프가 서기장으로 선출됐고, 4월에는 워싱턴에서 한미정상회담이 개최되었다. 7월에는 미국-중국 간 핵협력협정이 체결되었고, 9월 미국은 위성공격무기 실험에 성공했음을 발표했다. 국내적으로는 2월에 김대중 미국으로부터 귀국, 5월에는 12년 만에 제8차 남북적십자회담이 재개되었고, 9월에는 남북경제회담이 그리고 10월에는 남북체육회담이 잇따라 열렸다. 지하철 3․4호선이 준공되고, 63빌딩이 준공된 것도 이 해였다.

  표면적으로 세상은 순조롭게 돌아갔지만, 피로 세워진 정권의 탄압은 악랄하고 교묘했다. 광주의 피비린내가 이대로 묻혀버릴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이 싹트기 시작했다. 5월 23일, 함운경을 비롯한 서울대․고려대․연세대․서강대․성균관대 5개 대학교의 학생들은 미문화원을 점거하고 광주사태의 진상을 대내외에 알리고자 했다. 농성은 26일에 끝났고 미국은 끝까지 자신들의 책임을 부인했지만, 이것은 광주사태를 대내외적으로 알린 중요한 사건이었다.

  문단에서는 4월에 무크지 형태였던 『실천문학』이 계간지로서 창간되었다. 8월 1일에 ‘창작과 표현의 자유에 관한 문학인 401인 선언’이 발표된 직후, 정권은 『깃발』, 『이화언론』을 용공유인물로 간주하여 보안법을 적용, 제작자를 구속했고, 8월 17일 『민중교육』 창간호 내용을 문제삼아 실천문학사 주간 송기원과 교사 두 명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한다. 그리고 8월 23일, 문공부는 『실천문학』의 등록을 취소한다. 10월에 『창작과비평』 57호가 무크지 형식으로 발간되고, 11월에는 계간 『동서문학』이 창간된다.

  1985년의 베스트셀러 목록에는 김정빈의 『단』과 이해인 수녀의 시집들, 강만길의 『한국 근대사』가 나란히 올라있다. 김지하의 『황토』, 『남』, 박노해의 『노동의 새벽』이 대학가를 중심으로 급속하게 파급되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불법이었으므로 공식적인 집계를 찾아볼 수는 없다. 선도(仙道)를 표방하고 나온 책 『단』이 최고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것은, 명상과 정신과학 서적이 유행했던 당시의 사회적 경향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크리슈나무르티, 라즈니쉬 등의 명상 서적은, 어둡고 고통스러운 사회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정신적인 위안과 도피처를 제공했다. 브라질 작가 바스콘셀로스의 『나의 라임오렌지나무』가 베스트셀러에 오른 것 역시 유사한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제제는 가난하고 자식 많은 가정에 태어난 다섯 살짜리 아이이다. 아빠가 실직을 하면서 형편이 어려워지자 제제의 가족들은 모두 돈을 벌기 위해 나선다. 엄마는 방직공장에서 밤늦게까지 야근을 하고, 누나는 공장으로, 형은 성당에서 복사 일을 맡아보면서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애를 쓴다. 제제의 마음을 알아주고 친구가 되어주는 것은 ‘밍기뉴’라는 이름이 붙은 작은 라임오렌지 나무뿐이다. 그러던 제제에게 새로운 친구가 생겨난다. ‘뽀르뚜가’라는 애칭을 가진, 돈 많고 마음씨 좋은 포르투갈인이다. 제제는 그에게서 늘 목말라하던 사랑을 얻고 비로소 행복을 느끼지만, 뽀르뚜가는 자동차 사고로 죽고 만다. 제제는 아픔을 겪은 후 철이 들고, 라임오렌지나무 역시 꽃을 피우고 어린 시절에서 멀어져 간다.

  이 책이 잘 팔렸던 이유는 무엇보다도 우리가 모두 한때 ‘제제’였기 때문일 것이다. 끊임없이 말썽을 부리고, 어른들 세계를 엿보고, 그러면서 사랑받기를 애타게 갈망하는 제제의 모습은, 어린 시절 누구나 겪었을 법한 성장의 한 과정이다. 또한 이 책이 유행했다는 것은, 그만큼 사회가 암울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아이가 보는 삶은 아름답고 천진난만하다. 아무리 세상이 힘들고 주위 환경이 암담해도, 아이들은 나름대로 놀이를 찾고 견디는 방법을 개발해낸다. 유년은 책임 없음, 자유로움, 순수함을 상징한다. 어른들의 보호에 둘러싸여 세상을 몰라도 되는 시기, 아무도 책임을 묻지 않는 시기가 유년이다. 너무 많은 고통과 절망은 사람들로 하여금 현실에서 멀리 있는 이상향으로 가고 싶은 갈망을 가지게 한다. 게다가 제제가 가난한 집의 아이였다는 것 역시 독자들을 감동시키는 중요한 요인이었을 것이다. 제제의 엄마는 여섯 살 때부터, 작업대 위에서 쇠붙이를 닦으면서 자란다. 학교에 다녀본 적도 없고 읽는 법을 배운 적도 없는 일자무식의 엄마는, 결혼하고 나서도 남의 집 빨래와 방직공장 일로 생계를 꾸려간다. 이들 주변에 있는 진지냐 할머니와 에드문두 아저씨 역시 가난하긴 마찬가지다. 가난은 대대로 물려지는 것이다. 이들에 대한 연민은 민중에 대한 연민과 동정심을 간접적으로나마 만족시킨다. 어두운 현실에서 도망가고 싶은 충동, 어린 날에 대한 향수 그리고 민중에 대한 연민이 아우러져 『나의 라임오렌지나무』는 그 꽃을 피웠던 것이다.

  사실 나는 이 책을 그보다 더 전에, 중학생 시절에 읽었다. ‘이십년 전쯤에’, 그보다 더 전의 이야기다. 이십년 전에 노래를 하던 선배들 중 몇은 대학에 적을 둔 교수가 되었고, 몇은 문화평론가가 되었으며, 몇은 시인이거나 혹은 소설가가 되었다. 이십년 전의 그날들을 기억하는지, 나는 그들에게 물어보지 않았다. 우리는 이제 그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

1985년의 베스트셀러

순위	도서명	저자명	출판사명	분야
1	단	김정빈	정신세계사	소설
2	오늘은 내가 반달로 떠도	이해인	분도출판사	시
3	내 혼에 불을 놓아	이해인	분도출판사	시
4	민들레 영토	이해인	카톨릭출판사	시
5	손자병법	정비석	고려원	소설
6	처음을 위하여 마지막을 위하여	안병욱	자유문학사	비소설
7	나의 라임오렌지나무	M.바스콘셀로스	동녘	소설
8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는 말은	윤동주 외	삼일서적	시
9	아이아코카 자서전	윌리엄 노바크	범우사	비소설
10	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	김용옥	통나무	인문
11	아도라	버트리스 스몰	모음사	소설
12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	레오 버스카글리아	지문사	비소설
13	내훈	소혜황후 한씨	열화당	비소설
14	내일이 오면	시드니 셀던	청목	소설
15	지적인 여성을 위하여	김혜원	육문사	비소설
16	한국 근대사	강만길	창작과비평사	인문
17	한국의 명시	김희보	종로서적	시
18	한국 현대사	강만길	창작과비평사	인문
19	한그루 진실의 나무를 심을때	안병욱	자유시대사	비소설
20	낭만적인 고고학 산책	C.W. 세람	평단문화사	인문

* 자료제공 : 교보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