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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항지 잃은 항로

   - 다시 돌아오시겠죠?

  - 글쎄요, 지금은 그러지 않으려고 합니다만……

  - 혹시 필요한 일이 있으시면, 이젠 제게 연락해 주세요.

  미스 윤의 눈에 뽀얀 것이 서리는 것을 보고 나는 머리를 끄덕여 주었다. 그리고 정말로 꼭 한 번쯤은 다시 이곳을 찾을 일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생각하면서, 지금 막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거리로 천천히 병원문을 걸어 나갔다.

  65년 가을에 쓴 나의 문단 데뷔작 「퇴원」의 끝 장면이다. 소설의 주인공은 그 무렵 거짓 위궤양을 칭병하여 친구의 병원에서 무위도식 젊음을 허송한다. 병원 간호원 미스 윤은 주인공의 생성이 정지당한 젊음에서 그의 방황과 절망을 목도한다. 그리고 그 정신과 육신의 폐허로부터 그를 안아 일으켜 그렇듯 병원을 떠나보낸다.

  그리고 어언 40년. 소설의 작중 인물(특히 초기 작품의 경우)을 통해 어느 정도 그 작품을 쓴 사람의 처지나 생각이 드러나게 마련이라면, 바로 나 자신 내 문학의 출항지를 떠난 이후 올해로 40년의 세월을 흘러온 셈이다.

  - 내가 이 소설질로 무엇을 해 왔나?

  지난날과 자신이 새삼 한 번 더 되돌아 보임직한 시점이다. 자신의 일에 대한 그런 자성과 의구심은 이전에도 수없이 되풀이되어온 것으로, 등단 10년쯤 되던 무렵 벌써 ‘다시 돌아보는 헤맴의 내력’이라는 넋두리 조를 털어놓기 시작한 데다, 연전(2003)엔 그간에 써온 글들을 한 데 묶어낸 자리에서 ‘4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참 많이 헤매고 멀리 흘러왔다’는 요지의 소회를 숨기지 못했을 만큼, 그것은 내 필생의 화두자루였던 셈이니까.

  그런데 두 번의 사례에서도 공통으로 드러나듯 내가 그 소설질로 이루고 남길 바는 그 때나 지금이나 그 ‘헤맴’ 혹은 ‘헤맴의 세월’에서 크게 나아가거나 벗어난 데가 없으니, 그렇다면 내가 처음 이 소설의 길목을 잘못 들어섰던 것인가.

  하늘의 영광을 증거하랴, 이 땅의 평화를 기구하랴, 아니면 참 사랑의 섭리를 궁구하랴, 한시대의 정의를 선양하랴…… 이 소설질로 열어 나가고 싶은 문은 많았고, 이르고 싶은 꿈도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소설이란 태생이 추상적 대의보다 구체적 삶의 숨결과 족적을 본령으로 삼는 자라, 우리 장삼이사들의 삶이 그러하듯 크고 넓은 대로보다 비좁고 어두운 소로를 함께 하며, 그 결핍과 상처를 어루만지고 위무하기를 첫 소임으로 삼아온 것이 당연지사. 소루(疏漏)하나마 그 길섶에 떨어진 글 이삭들을 떠오른 대로 추려보면 대충 이런 식이다.

  - 가을이 다 지나가도록 그는 여전히 신문을 팔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도 기다리고 있었다. 녀석이 그의 연습을 끝내고 새로 완성된 대사를 외며 나타나기를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불이 켜지지 않은 가로등 사이를 건너가듯, 녀석이 보이지 않는 서대문께를 지나다니면서 끈질기게 그를 기다렸다. 낯익은 거리일수록 우리가 우리의 가로등을 사랑하듯, 소년의 등불이 어느 날 그의 자리에서 다시 살아나 빛나지는 않으나마 우리들의 조그만 사랑을 그에게 전할 수 있기를 오래도록 기다렸다.

  - 양산댁은 내처 그 텅 빈 초가의 사립문을 들어서고 나서야 아들아이의 연이 날아간 하늘을 향해 잠시 발길을 머물러 섰을 뿐이다. 하지만 이제 그 하늘에 연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텅 빈 하늘만 하염없이 멀어져가고 있었다. 양산댁은 다만 그 무심한 하늘을 향해 다시 한번 가느다란 한숨을 삼키며 허망스럽게 중얼거렸다. - 아가, 어딜 가거나 몸이나 성하거라.

  서대문 버스정류장께서 신문을 팔던 한 소년(「건방진 신문팔이」)과 척박하고 남루한 시골살이를 못 견뎌 어머니와 집을 떠나간 어린 아들아이(「연」)를 그린 이들 두 대목이 우리가 살아온 시절의 궁핍상에 대한 자애와 감싸기 표현이라면, 북에 두고 온 친정 식구들을 그리다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한 여자(「흰 철쭉」)와 제 열악한 생존의 조건을 넘어서 보려 이 지상의 무덤을 지우고 한 구절 노랫가락이 되어간 시인(「해변 아리랑」)을 조상(弔喪)한 다음 두 대목은 그 궁핍하던 시대의 삶과 죽음에 대한 항변이자 호곡이었을 터이다.

  - 언제부턴지 철쭉꽃 나무 가지 위에 이름 모를 새 한 마리가 눈을 감고 깃을 개고 앉아 있었다. 순백의 꽃빛 속에 적막스럽고 애틋한 모습이 어떤 기나긴 기다림의 꿈속에 젖어 있는 것 같았다. 할머니의 넋이 새가 되어 돌아온 것인가……

  - 노래장이 이해조.

  그는 생전에 늘 여기 와 앉아서 그의 바다의 노래를 앓고 갔다. 그 노래가 끝났을 때 그의 혼백은 바다로 떠나갔다. 바다로 가서 반짝이는 물비늘이 되고 작은 섬이 되고 돛배가 되었다. 그 돛배의 노래가 되고 바닷새가 되고 바람이 되었다…… 그가 이 땅에 노래로 살다 간 사랑은 저 바다의 눈부신 물비늘로 반짝이며 먼 돛배의 소리로 이어지며 작은 바닷새의 꿈으로 살아갈 것이다.

  그런가 하면, 한 젊은이의 불안한 방황과 좌절의 행로(「별을 보여드립니다」), 그리고 이유 모를 옥살이 끝에 비슷한 처지의 새를 구해 마음속의 남쪽 고향집을 찾아 떠나가는 한 노인(「잔인한 도시」)의 다음과 같은 여정은 그 존재론적 결핍과 부재의 삶에 대한 불안한 영혼의 자장가쯤이라 할지.

  - “가만있어. 여기가 좋겠어.”

  그는 어둠 속에서 나를 한번 건너다보고는, 그 눈길을 하늘로 큰 호를 그린 다음 다시 강물로 내려뜨렸다.

  “이 녀석의 멋있는 장례식을 생각했지. 아까 오후에 이 강물이 생각났어. 이렇게 잔잔히 별 그림자가 무늬진 강을 덮고 잠이 들면 이놈은 별의 꿈을 꾸겠지.”

  그는 기다란 것을 마치 어린애를 안 듯 깊이 가슴에 끌어안았다가는 몸을 구부려 가만히 강물 아래로 밀어 넣었다.

  - 석양의 햇발이 점점 더 풀기를 잃어갔다. 구불구불 남쪽으로 뻗어나가고 있는 하얀 신작로길도 먼 곳에서부터 차츰 윤곽이 아득히 흐려져 가고 있었다…… 그건 차라리 사내의 가슴 속을 끝없이 비춰주는 영혼의 빛줄기와도 같았다. 사내는 아직도 지침이 없이 그 따스하고 행복스런 빛줄기를 좇으며 품속에서 가끔 발짓을 꼼지락거리는 녀석에게 쉴새없이 혼자 중얼대고 있었다. -탱자나무 울타리와 붉은색 벽돌 굴뚝이 높은 기와집…… 그런 집이 있는 동네…… 그게 바로 우리가 찾아가는 남쪽 동네란다……

  근자에 떠오른 일이지만, 그것들은 한 마디로 우리 삶의 씻김질에 다름 아니었다. 팔려버린 고향집을 떠나지 못하고 기다리던 ‘어머니’와 마지막 하룻밤을 지낸 끝에 이른 새벽 그 어머니를 눈발 속 찻길 가에 혼자 남겨 두고 떠나갔던 ‘아들아이’의 씻김질―, 그 추운 새벽녘 어둠 속에 언제까지나 사라질 줄 모르고 서 있던 어머니가 그 아들이 뒷날 회한의 ‘눈길’ 이야기를 쓰고 나서야 그 막막하고 창연한 모습을 거두어 갔듯이. 그야 이후 나는 저 50년대 전란기의 민족적 상흔과 제주 4․3사건 희생자들의 고혼을 한마당 위령굿과 씻김굿판으로 위무해보려 하기도 했으니까.

  그래온 내가 아직도 제 소설질 길에선 헤맴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니. 그것은 아직도 자신을 씻기지 못했음일 것이다. 자신의 삶과 문학을 제대로 씻길 바르고 화창한 길을 찾지 못했음일 것이다. 그 삶과 문학에 그렇듯 단단한 신념과 밝은 빛을 얻지 못했음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 삶이나 문학에 어디 마지막 믿음이 있고 빛이 있을 수 있는가. 그것은 오히려 끝없는 장애와 의구심을 앞에 한 깜깜한 어둠 속의 외로운 행로일 수도 있지 않은가.

  - 혼자 가는 길, 앞을 알 수 없는 길, 믿음이 없는 길…… 그 숙명 같은 길. 지금 이곳에서 삶이 주저앉아버릴 수 없는 한 내 소설도 그 암중모색을 이어갈 수밖에 없으리라. 하지만 이것이 나와 이 세상에 무슨 뜻이 있을 수 있는 노릇인가.

  언젠가 탄식을 금치 못해하는 내게 시를 쓰는 한 이국 친구가 충고해 왔다.

  - 너는 물론 그 길을 계속해 가야 한다. 그 밤 산길 행이 어째 너 혼자뿐이냐. 네가 가고 있는 산 이웃에도 다른 산들이 있고, 그곳에도 저 혼자 두렵고 어두운 제 산길을 가는 외로운 독행자들이 있을 수 있지 않으냐. 그들은 모두 깨어진 영혼들이다. 네 소설은 그 깨어진 영혼들의 존재, 그 밤 산길의 보이지 않는 독행자들의 존재를 우리에게 알려 줄 수 있다. 자신만이 그 어려운 어둠 속 길을 가지 않고 다른 수많은 사람도 각기 자신의 어둠 속 산길을 외롭고 힘들게 가고 있다는 사실의 인식은 우리 삶의 길에 대한 근본적 이해뿐 아니라, 그 각각의 독행자들에게 얼마나 큰 위로와 용기를 주는 일이냐. 네 소설은 적어도 그것을 할 수 있다.

  하긴 그런 위로에라도 마음을 기대어야 하는지 모른다.

  그렇듯 내겐 아예 그 귀항지가 사라지고 만 것인가. 대학병원 앞의 미스 윤은 영영 다시 찾아볼 길이 없는 것인가. 이제는 이미 그 모습마저 옛 꿈속처럼 아득하기만 하건만.